86화
나는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니, 눈치 챌 것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카페 안은 고요한 적막이 흘렀고, 단 한명의 소녀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비단 우리 일행뿐이 아니다.
카페에서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커피를 들고 서빙을 하던 카페의 웨이트리스도 하나같이 움직임을 멈추고 소녀-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부서의 사람들이야 수연이의 외모에 적응이 되어 편하게 대하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수연이는 거짓말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아름다운 소녀였으니 말이다.
뚜벅, 뚜벅 하고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수연이의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아니, 이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결코 눈앞에 있는 수연이는 환상이 아니었다.
저 성격나빠보이는 옅은 미소가 바로 그 증거.
내가 이 카페의 모임에 가자고 할 때 거절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구나! 설마 설마 이 녀석이 '검은긴생머리모에'였을 줄이야! 학교에서 하는 짓이 그 모에라는 사람과 너무 흡사해서 세상엔 닮은 사람이 참 많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동일인물일 줄은 몰랐다.
' ....핫, 잠깐 그렇다면 내가 카페에 올렸던 글들도 다 봤을 것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 안 돼. 내가 쓴 글은 평범한 애니리뷰 뿐이 아니라 내 성적 취향이 다분히 들어간 글도 상당히 많단 말이야. 거기다가- 내가 팔이 부러졌을 때도 뭐라고 글을 올렸던 것 같은데....
" 카페에서 검은긴생머리모에라는 닉으로 활동 중입니다. 짧게 '모에'라고 불러주세요."
우아하고 여유로운 태도. 평상시의 수연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 태연한 그 모습에 카페 멤버들도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가만히 서있는 수연이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서둘러 권했다. 무척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상황이었다.
남자인줄 알았던 카페원이 여자인 것은 물론, 외모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보던 라이트노벨, 혹은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닌가.
" 에, 그.... 아, 정말로 '검은긴생머리모에'님이 맞으신가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지 유유윳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유유윳키의 말에 수연은 여유로운 태도로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 예, 제가 '검은긴생머리모에'가 맞아요. 흐음, 무슨 문제라도?"
성격 나쁜 녀석. 유유윳키가 왜 그렇게 물었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굳이 저렇게 되묻는다. 건방지다면 건방진 태도이지만 그 모습이 또 놀랄 정도로 잘 어울려서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 잃은 우리 일행들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던 수연은 능숙한 동작으로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연이는 의외로 손에 든 짐이 많아서 카페의 탁자 옆에 가지런히 모아두어야만 했다.
" 어머나,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정말 한국이라는 나라는 참 좁은 것 같아. 그렇지, 유상혁?"
나의 옆에 앉은 수연이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한참 고민하고 있는 일행들을 무시한체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마치 '우연'이라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난 알 수 있다. 이녀석 알고 있었다니까! 내가 이 카페 모임에 나오는 것 알고서 나온 거라고!
...물론 증거는 없다.
정말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수연이라면 분명 모두 알고서 왔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내가 채팅방에서 학교생활을 이야기한 것이 한두번이어야지. 그 이야기 속에 수연이 이야기도 있으니 당사자로선 그런 말을 하는 게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놓고... '검은긴생머리모에'로 활동할 때는 '헐, 저 꼭 그 검은머리 잘 어울린다는 분이랑 만나고 싶음 ㄷㄷ'하면서 모른 척 했다는 말이냐. 악마다. 악마가 여기에 있다고.
" 에? 혹시 모에님이랑 고딩님이랑 아는 사이였나요?"
나에게 아는 척을 하는 수연이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우리랑 가장 나이또래가 비슷한 유유윳키였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곰 형(사실 유유윳키도 형이긴 하지만 뭔가 동갑으로 보여서)이나 미연시 형을 대신해서 수연이를 향해 물었다.
" 네."
돌아온 답은 아주 간결했다. 수연이라면 수연이 다운 대답이었지만 그 짧은 대답에 유유윳키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적어도 '사실 학교 친구고 이리저리 해서 어떻게...' 정도의 설명이 있어야 할 법한데도 수연이의 말은 딱 거기서 끝이었다. 이대로라면 유유윳키와 일행들의 혼란이 더욱 가중될 것 같았기에 나로선 수연이를 대신하여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 제가 채팅에서 이야기했던 검은 긴생머리 잘 어울린다는 여자아이가 이 녀석이에요. 전에 오타쿠라고 말씀드렸었죠?"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카페 채팅방에서 수연이에 관한 이야기는 넘치도록 했기에 그것만으로 이녀석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설명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 ...와, 뇌내망상에만 존재하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 설마 진짜 였을 줄이야..."
이사람들이! 내가 채팅방에서 이야기할땐 '우와 보고싶다...'라는 식으로 대꾸해주더니만 하나도 믿지 않고 있었어!
' 뭐어, 하긴 나라도 믿지 않았겠지.'
다시 곁눈질로 슬쩍 수연이를 바라본다. 일련의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수연이의 얼굴은 담담하고 무표정하지만 예전의 얼음장같은 태도가 상당히 옅어져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로만 보이게 만든다. 조금 표정이 부족한, 그런 여자아이라고 해야하나?
" 실례인걸. 계속 그렇게 변태같이 힐끔힐끔 바라보지 말아주겠니?"
아무래도 곁눈질로 내가 힐끔힐끔 보던 게 들켰는지 수연이가 눈을 흘기며 말해왔다. 하지만 그 말에 내가 뭐라 반응하기도 다른 쪽에서 격한 반응이 들려왔다.
" 헉."
" 죄, 죄송합니다!"
" 아, 아니 그게!"
...여자 면역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이 사람들! 아니 면역문제가 아닌가... 하긴 수연이 같은 소녀가 이런 모임에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 충분히 이해가 갈법한 반응이다. 더군다나 남자인줄 알았다면 더욱 그렇겠지.
아무튼 이런 곰형과, 미연시형, 유유윳키의 반응은 수연이조차 의외였던 듯, 나를 살짝 째려보던 시선을 풀며 앞의 세 명에게 돌렸다.
" 예상과 달리 제가 여자라서 당황하셨나보네요.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이런 류의 이야기는 남자로 알고 있는 편이 편하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수연이는 비교적 차분한 태도로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아마 곰형이나, 유유윳키, 미연시 형은 모르겠지만 수연이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것은 정말 다정한 마음을 듬뿍 담아 최선을 다해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보통이라면 굳이 저런 말 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도리어 저런 우습다면 우스운 모습들을 꼬투리삼아 놀리거나 독설을 퍼부었겠지.
" 괘, 괜찮습니다. 뭐 전에는 넷카마인 분도 나왔었는걸요. 하하, 그저 좀 예상보다 너무 예뻐서 당황했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가장 연장자답게 곰형이 수연이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회복하며 말을 했다. 그러면서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려 수연이를 보는 것이 정말 이 여자아이가 그 채팅방에서 자신과 야겜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하던 당사자가 맞는지 유심히 지켜보는 듯했다.
" 그렇게 유심히 빤히 보지 않으셔도 제가 '검은긴생머리모에'가 맞아요. 아, 뭣하면 이곳에서 저번에 이야기하던 '히메가리'에 관한 이야기라도 해볼까요?"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날카롭게(특별히 날카롭게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닐테지만 분위기가 과연 수연이라 할만큼 매서웠다) 곰형에게 말하자 곰형은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수연이가 이야기했던 '히메가리'란, 일본의 한 야겜으로 정식 명칭은 '공주사냥던전 마이스터'라는 게임이다.
야겜주제에 나름 게임성은 있어서 수연이가 부실에서 게임하는 것을 지켜본 기억이 있다.
' ...부실에서 야겜을 하는 여자아이를 지켜보는 남학생-이라 하면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아무리 게임성이 있어도 장르자체가 야겜이다 보니 이런 카페에서 훨훨 터놓고 이야기할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연이 때문에 카페의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곰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급히 고개를 내저은 것이다. 만약 고개를 끄덕이며 한번 이야기해보죠,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과연 수연이가 순순히 이곳에서 야겜에 관한 대화를 했을지 나로선 좀 궁금했다만.
" 히메가리라니... 그런 건 좀 하드코어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쪽 취미가 맞아서 모인 사람들이라 그런지 '히메가리'라는 단어가 나오자 유유윳키도, 미연시형도 한층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다만 저번에 그렇게 히메가리 재밌다고 채팅방에서 수연이에게 추천했던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유윳키도 그것을 알기에 떫은 얼굴로 말했다.
" 그거 형이 추천하셨던 건데요."
" 아, 그, 그랬냐."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본 시점에서 이야기하지만...
" 저런 여자아이... 여고생에게 야겜을 추천한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하나..."
"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귀축?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철컹철컹해야죠."
곰형과 유유윳키는 미연시형을 보며 맞장구쳤다. 그보다 여고생이 추천받은 야겜을 당연하다는 듯이 플레이한게 이상한 것 아닌가요. 어쨌거나 야겜이니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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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검사하고 5일만인가요! 이제 앉아서 쓸만하기도 하고 게임이벤트도 잘 즐겼고. 프리덤 워즈 무기도 만들은데다가 코어마스터즈 배타테스트도 해보고 던파 배메 레벨도 좀 올리고, 마영전 온타임 선물도 받은 다음 돌아왔습니다.
뭐,뭔가 많이 논 것같지만 착각이겠죠. 아무튼 이제 당분간 바쁘게 병원갈일도 없으니 소설에 전념하렵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이제 당분간 1일 1연참할 예정입니다. 주말은 못올릴지도 모르지면 평일엔 1일 1연참입니다.
덤으로 정모편은 좀 달달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