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상혁이 그런 생각을 하며 올라가고 있으려니 어렴풋이 나마 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제야 다왔구나. 사진만 찍고 내려가면 되겠거니 싶어 한층 발걸음의 속도를 높이는데 갑자기 지윤이 손을 뻗어 그런 상혁의 행동을 제지했다.
" 저기... 뭔가 이상한게 보이는데요."
" 이상한거?"
고개를 갸웃하며 어둠속을 보기위해 눈을 가늘게 좁히자, 지윤의 말처럼 뭔가 이상한게 보였다. 다만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어둠속이었던지라 그 윤곽만이 보인다고 하려나. 뭔가 거대한 무언가가 나무에 매달려있는 듯한 모습...
좀더 가까이 가서 보자는 마음으로 지윤이와 상혁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그곳에 다가갔다. 조금씩 다가갈수록 그 커다란 무언가는 줄에 연결되어 매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형태가 무척 기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 아니 사람처럼이 아니라 사람이잖아! 지윤아 손전등 좀 비춰봐."
" 명령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꺄아악?!"
나무에 밧줄로 메달려있는 사람형상의 무언가에 손전등을 비춘 지윤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것은 다름아닌 '네메시스'의 모습을 한 집사님이었으니 말이다.
그 흉악한 면상을 손전등의 역광을 통해 본 지윤은 그야말로 심장이 가슴 밖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 음, 조금 늦으셨군요. 수연이 아가씨는 이미 절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사진을 찍고 곧 나오시지 않을지."
"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지 말아요! 무서우니까!"
목소리를 듣고 정체를 짐작한 상혁은 깜짝놀라서 얼어있는 지윤이를 대신해 소리쳤다. 아무튼 청이 선배도 그렇지 이 아저씨에게 네메시스 분장을 시키다니! 이렇게 묵여있지 않은 체로 만났다면 진짜 네메시스를 만난 기분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 -아, 잠깐. 방금전 수연이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지금 아저씨를 이렇게 매달아논 것이 수연이라는 이야기라는 말입니까?"
" 예. 면목없지만 그렇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더군요. 그 비범한 신체능력을 보며 저도 모르게 혈기에 타올랐지만 나이가 나이다보니... 물론 젊었다하더라도 이길 수 있었을지는 모릅니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수연이는 이 네메시스 집사님과 한판 붙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깔끔하게 제압해서 나무에 매달아뒀다는 건가. 아니 제압을 했으면 이미 그 시점에서 이긴 걸텐데 왜 굳이 메달아놔? 라고 상혁이가 생각하니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네메시스 집사님이 중얼거렸다.
" 그리고 참 아쉽군요.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었을텐데. 수연이 아가씨는 어째서 저를 이런 곳에 묶어둔건지."
아, 우리를 위해서였구나.
상혁이와 지윤이는 깨달았다. 아마 저 아저씨를 제압한 수연은 다음에 올 우리가 저 아저씨와 한바탕 하는 것을 막기위해 나무에 매달아 둔 것이리라. 그것이 지윤이를 위한 것인지, 상혁이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그런데... 들어가신지 좀 시간이 지난 것같은데 말입니다."
" 혹시 안에 함정같은 것이 있는게 아닌가요?"
하도 오면서 이상한 좀비들을 본 탓에 지윤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지만 네메시스 집사님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분장상태라 그 모습도 몹시 두려웠다).
" 아닙니다. 저 안에는 방울만 놔두었으니까요. 그저 사진을 찍고 나오시기만 하면 될텐데."
" 흐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모습은 아닌 것같았다. 지윤은 조금 의심이 들긴했지만 우선은 넘어가기로 했다. 다른 것보다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는 언니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상혁도 그 때문인지 흉흉해 보이는 폐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고.
" 수연이라면 또 안에서 무슨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르니 서둘러 들어가보자."
" 마치 언니를 트러블에 휘말리기만 하는 짐덩이라는 듯한 말투지만 우선 지금은 넘어갈게요."
반박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지윤이지만 굳이 지금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절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는다는 언니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절의 계단을 올라간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절의 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낡은 나무문인 탓에 약간 삐걱거리는 면이 있었고, 거미줄이 길게 늘어졌지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처음 열었을때는 이보다 심했겠지만, 아무래도 수차례 문을 열었던 것이 원인이리라.
" 언니! 안에 있어?"
" 수연아!"
지윤이와 상혁이 안에 들어가자마자 큰 목소리로 수연이를 부르자 안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절의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기에 신중한 걸음으로 안에 들어가니 얼마지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 석상처럼 서있는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언니, 거기 가만히 서서 뭐해? 어둡게 손전등도 키지않고."
의아하다는 듯이 지윤이 이야기하며 손전등을 수연이에게 비추자 약간 이질적인 수연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무표정했다. 그런데 그것이 '평상시의 무표정'이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평상시의 무표정이 남을 관조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면 지금의 얼굴은 누가봐도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 모습이었으니까.
" 부, 불빛을 비추면 안돼!"
지윤이가 손전등으로 불을 비추자 화들짝 놀라며 저지하는 수연의 모습에 상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지윤은 뭔가를 깨달은듯 손전등의 불빛을 끄고 작게 이야기했다.
" 저기, 언니. 거기에 다리많은 애들이 있어? 그래서 못움직이는 거야?"
" 엥? 다리많은 애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뜬금없는 지윤의 말에 상혁이 뭔소리를 하냐는 듯이 묻자 지윤은 유려한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가에 가져가며 '쉿'하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 지네나 거미같은 다리많은 벌레를 말하는거에요. 불빛을 비추면 반응하니까 불빛을 비추지 말라는 것이고. 아마 저기서 가만히 서있는 것으로 보아 언니의 주변에 그런 애들이 많이 있는 것같네요."
" 에? 그 이야기는 마치 수연이가 그런 벌레들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이야?"
" 그럼 그이야기말고 다른 결론이 나오나요? 하여간... 모든게 완벽한 언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리가 많은 벌레는 싫어했어요. 다리가 많지 않은 애중에서는 메뚜기를 특히 싫어했지만. 거의 벌레 공포증 수준이랄까. 모든 벌래에 반응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지윤의 말에 상혁은 놀랍다는 듯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헤에~, 그거 의외네."
" 의, 의외라 미안하네!"
상혁이의 말에 수연이 홧김에 소리쳤지만 그때문인지 발밑에서 벌레들이 꿈틀거리자 재차 히익-하고 놀라며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 최악. 정말 최악이야. 대체 왜 이런 곳에 방울을 둔거야?'
발밑에 꿈틀 꿈틀 기어다니는 벌레들을 느끼며 수연은 아무 생각없이 이 안에 들어왔던 자신을 저주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벌레들이 밖에서 기어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네메시스 집사님을 처리하고 기분좋게 절안에 들어온 수연이가 손전등으로 방울을 찾기위해 사방을 비추었던 탓에 벌래들이 그 불빛을 따라 모여 들어버린 것이다.
방울을 찾고 이제 돌아가야지- 하고서 몸을 돌리는 순간, 바닥에 깔려잇는 벌레들을 보며 수연은 돌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기를 십 여분, 결국 지윤이와 상혁이가 들어와 버린 것이다.
" 언니, 가만히 있어. 벌레들 쫓아줄테니까."
" 으, 으응."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지윤의 음성. 그런 지윤의 말을 들은 수연은 뭔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옛날부터 이런 상황에 몰리면 지윤이가 해결해주었었지. 지금은 틱틱 거리는 여동생이지만 어렸을적에는 벌레같은 것에 돌처럼 굳어버린 자신을 언제나 저런 목소리로 진정하라고 이야기해주곤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비단 수연이만이 아니었다. 지윤도 '아, 아직 언니가 벌레를 무서워하고 저런 표정을 지을줄 아는구나'하고 깨달았으니까. 무심코 옛날처럼 이야기하고 말았다.
뭐 옛날의 언니는 지금보다 한층 난리법석이었지만. 하고 지윤은 작게 실소했다. 유일하게 자신이 언니를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이 벌레를 쫓을 때 뿐이었다는 것은 조금 슬프지만 즐거운 추억이다.
" 자, 이제 움직여도 괜찮아, 언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연이의 발밑에 있던 벌레들을 쫓아낸 지윤은 얼어있는 수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조심조심 발을 내딛은 수연은 주변에 확연히 줄어든 벌레의 움직임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윤이의 손을따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죽는 줄 알았어."
" 그래? 나는 예상외의 모습에 깜짝 놀랐는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하는 수연의 말에 상혁이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고 (겉으로는)무서운 절규게 머신에도 멀쩡하던 수연이가 이렇게 겁먹은 얼굴을 보게 될줄은 몰랐다.
" 흥, 그래도 용캐 이곳까지 왔는걸? 보나마나 도중에 좀비들에게 붙잡혀서 끌려갔을 줄 알았는데."
" 그럴뻔 했지만 지윤이가 도와줬어."
" 한심한 구더- 아니 오빠에요. 대체 몇번을 구해준건지 셀수도 없네요."
" 분명 너 지금 구더기라고 하려고 했지!"
" 예."
" 거기선 보통 부정하라고!"
수연은 지윤이와 상혁이가 대화하는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사이가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명환이를 버리고 오듯이 도중에 내팽겨치고 올줄 알았더니 끝까지 챙겨서 온 것을 보면 아주 싫어하는 것도 아닌 듯 싶었다.
" 둘이 사이가 정말 좋은걸? 질투날 정도야."
" -?언니, 저랑 상혁이 오빠 사이를 질투하는 거에요?"
" 응? 아,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닌걸."
방심할 수 없는 지윤이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왜 이런 오빠랑 사이가 좋아요!'라는 답변이 돌아와야 되는데 거기서 그렇게 반문하다니. 수연은 자신의 여동생의 숨겨진 재능에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 흐으응, 뭐어 확실히 언니가 요즘 이상한 것을 눈치 체기는 했지만... 뭐 넘어갈게요."
"......"
뭔가 착각한 듯 싶지만 넘어가준다니 수연이로선 그저 감사할 따름. 거기다가 착각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라는게 무서운 점이다.
' 이렇게 하나둘 나와 상혁이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는 곤란한데...'
물론 자신은 상혁이에게 호감을 느낀다! 격한 표현을 하자면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상혁이 녀석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두명이나 더 있다는 것과, 자신이 상혁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사람이 두명이나 있다는 거지.
거기다가 내둥 필요없는 잉여로 취급하던 자신이 먼저 상혁이에게 알려지는 것은 자존심 문제다. 정말, 이건 뭔가 잘못된거야!
" 아무튼 방울도 찾았으니 슬슬 내려가자. 사진을 못찍기는 했지만 그정도는 청이 선배도 이해해 주시겠지."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상혁의 말에 수연은 괜시리 심통이 나서 슬쩍 째려봤지만 녀석은 전혀 알아차린 기색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또 겨우 이러한 것으로 시선을 신경쓴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하아, 피곤하네. 어서 돌아가서 쉬고싶다.
" 언니?"
" 응, 아니야. 빨리 돌아가자."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지윤의 눈빛에 고개를 흔들며 상혁이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도저히 담력시험이라고 할 수 없는 담력시험장을 뒤로한체 수연은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벌레로 더럽혀진 몸을 씻고 쉬고 싶었으니까.
' 근데 뭔가 잊은듯한데.'
중요한 뭔가를 잊은듯하지만 자신이 기억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까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 ....엣취!"
날씨가 쌀쌀한데다가 계속 움직임없이 메달려있다보니 몸이 서늘해진 기분이 들었다.
" 왠지 저를 잊고 그냥 내려가신 것같지만... 제 착각일 것이라 믿습니다만. 되도록 빨리 이 밧줄좀 풀어주셨으면."
하지만 그런 네메시스 집사님의 바람과는 달리 나무에서 구해진 것은 다음날 좀비 역활을 했던 경호원들이 산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담력시험 부분이 끝났네요. 지윤이 회상씬을 위해 넣은 파트지만 쓰기가 영귀찮아서 힘들었습니다. 본래는 평범한 담력시험을 하려했는데 아무리 봐도 인원구성이 일반적인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윤아와 상혁이뿐... 뭐 곱슬이는 넘어가고.
아무튼 다음편에 가벼운 회상신 나오고 바다편 마무리 짓고 여성캐릭별로 주요파트로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