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시간은 어느 덧 오후 네시. 상혁이 일행은 아키하바라를 대체적으로 둘러본 터라 이제서야 상혁이가 가고 싶어했던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일본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대규모 피규어겸 프라모델 가게라고 해야하나. 수연이로선 그다지 관심이 없는 곳이지만 계속 상혁이가 노래를 불렀던 곳이기에 순순히 가주기로 했다.
그리고 보는 정도면 수현이도 꽤 좋아하는 편이니 말이다. 지금은 아니어도 명환이 시절에는 '체포하겠어'라던지 그런 피규어 몇개를 모으기도 했었고.
' 다 옛일이지만.'
모두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다 버려버렸다. 애초에 산 피규어는 체포하겠어나 그런 류의 물건들이 많았기에 그것을 버리고 나니 남은 피규어도 없었고, 딱히 새로살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지금을 잊을 수 있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몰두 했을 뿐.
" 네 시구나."
" 응? 왜 수연아?"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야기에 옆에 있던 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지만 작게 고개를 저어 답했다. 벌써 시간이 네시구나. 아마 여섯시였던가. 명신 고등학교 집합시간이-. 그리고 그곳에서 처참히 망가졌었지.
회생하지 못할만큼. 지금 생각하면 평상시라면 그냥 있었을 법한 일이구나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웃음 당하고, 자신의 꿈이 짓밟히고 부정당해서,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남아 결국 자퇴하고 말았었지.
' 가봐야 되는걸까.'
어디서 집합하는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유연 고등학교의 집합시간은 여덟시 넘어서이니까 시간도 넉넉한 편이다. 다녀온다면 충분히 다녀오고도 남을 시간.
하지만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수연이 자신이 가봤자 명환과 안면도 없을뿐더러 명환의 입장에선 그냥 관객이 하나 더 늘어나는 비참한 상황일 뿐이다. 더불어- 직접가서 쓰러져 있는 명환을 직접 일으켜 세울만한 설득을 할 자신도 없었다.
" 오~! 저기야 저기! 와 대박이다. 진짜 장난아닌데!"
도착한 모양인지 상혁이가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연 그 말처럼 건물하나가 통체로 프라모델과 피규어만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한국에서 이정도로 커다란 가게는 없지. 꽤 크다고 이름있는 가게도 한 층을 모두 빌리는 정도다.
" 응? 저거 뭔가 익숙한 모습인데...?"
가게를 둘러보던 수연은 옆에서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곱슬이의 말을 듣고 정면의 가게 입구를 바라보았다. 과연 익숙했다.
아니 너무 익숙해서 문제였다. 익숙한 금발머리에 새하얀 원피스. 그야말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소녀.
다른 누구도 아닌 '심 청'이었으니 말이다.
" 으엑! 진짜 만났잖아! 아니 이런 경우엔 노리고 찾아왔다고 해야하나."
상혁이만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이쪽을 해맑게 응시해오는 청이를 향해 투덜거렸다. 분명 수학여행 출발하던 날 문자로 '올지도 몰라~'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가려는 장소에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 왔구나! 30분이나 기다렸는걸~."
" 정말 오실줄은 몰랐어요. 용캐 장소는 알고 오셨네요."
설령 찾아온다고 해도 숙소로 올줄 알았는데 이런 장소에서 마주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청이라고 하더라도 아키하바라인데다가 이런 가게에 간다고 사전에 이야기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게 애초에 이상했다.
" 선배. 상혁이한테 미리 언질도 받지 않고 여기에 어떻게 온건가요?"
이것만큼은 수연이도 궁금했던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청이는 상혁이도 상혁이지만 사실 오늘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최근 수연이가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잘 지내고 있나~라는 마음으로 온 것이 더 컸다. 그래서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물어오는 수연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 응, 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직접 안내해줬어. 상혁이랑은 아는 사이라고 하던걸? 지금 음료수 사러 잠깐 갔으니 곧... 아 왔다."
상혁이랑 아는 사이? 수연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미묘하게 불안함을 느꼈다. 왜? 자신이 어째서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그것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청이의 옆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 수연은 숨을 멈출 뻔했다.
" 아, 누나 사람이 많아서 조금 늦... 아, 상혁이 왔구나?!"
" 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이야, 오늘 아키하바라에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대단한걸!"
청이에게 음료수를 건내주며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소년. 그리고 상혁이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으면서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남자 아이.
설마.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째서.'
명환이가, 과거의 내가 이곳에 있는거지?
어제 놀이공원에 있었던 일만 아니었으면 바로 등을 돌리고 도망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제 이후로 마음의 준비도 해서 '도망칠'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다.
청이를 안내해준 것이 명환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고. 상혁이와 애초에 아는 사이라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이 장소에 절대 없어야 되는 사람이 이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 수연아? 수연아? 안색이 안좋은데."
여에 있던 윤아가 수연이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어왔다. 하지만 수연은 작게 고개를 저어 괜찮다고 표현할뿐 특별히 말을 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머리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명환과 상혁은 이런 자신의 상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명환이가 상혁이를 알고 있는거야?
" 아, 미안해. 우리끼리만 떠들었는걸. 소개할게. 저번에 내가 수연이 선물 사러갔을때 만났다는 애있지? 그때가 계기가 되서 친구가 됐어. 언제 한번 소개해줄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
" 아, 그, 안녕! 상혁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저번에 그...? 아, 수연은 그제야 뭔가 연결고리를 이해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상혁이가 자신이 시험공부를 도와줬다는 것에 보답을 하고 싶다며 피규어를 선물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걸사면서 동성 친구를 사귀었다고 이야기했었던 것 같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바로 그 '동성친구'가 설마 명환이었을 줄이야.
" 헤에~. 네가 그녀석이구나? 상혁이가 자신 못지않은 오타쿠라고 이야기하길래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는걸?"
" 고, 곱슬아. 무슨 말투가 양아치 같아. 아니 양아치었던가...?"
" 무,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양아치일리가 없잖아!"
사실 양아치 맞지만. 수연은 속으로 코웃음치며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곱슬이와 윤아와 인사를 한 명환이 자신을 바라보며 헤프게 웃고있었다. 마치 전생의 자신처럼-. 저 바보같은 행동은 역시 '명환'이 맞았다. 전생의 자신이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대체 뭐가 뭔지 아직도 혼란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그래도 또 도망칠 수는 없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돌리려던 발걸음을 막았다. 평범하게 소개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기에 수연은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그래, 반가워."
" 아, 으응!"
자신과 동일인물을 만나면 살의가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단지- 이상했다. 모든게 이상했다. 이렇게 달라지면 오늘 있어야할 '그 사건'은 어떻게 되는거지?
바로 그 사건이 전생의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족쇄인데.
수연은 몸에 오한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거지? 아니 아니야. 그 사건은 복귀하던 시간에 일어나던 일이니 아마 명환도 복귀하는 순간 겪게될 사건이다.
하지만...
' 그때의 나와는 상황이 다르잖아.'
수연은 자신에게 인사를 받고 상혁이에게 돌아가 이야기하고 있는 명환을 바라보았다. '와 실제로 만나니 더 무섭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명환. 하지만 입가에는 '무섭다'라는 말과 달리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전생에 누군가의 앞에서 저렇게 걱정없이 웃은적이 있었던가?
전생의 자신은, 명환은 부서졌다. 기댈곳이 없어서, 혼자만이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했기에. 하지만 눈앞의 명환은 다르다. '상혁'이라는 친구가 있는 것이다.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명환'에게 있어 기댈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다르다. 전생과 상황이 너무 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은 '수연'이라는 자신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벌어진 일이다. 아마 중간고사에서 상혁이 자신을 구해준 것부터가 원인이 되었으리라. 아니, 애초에 상혁과 수연이 만났던 것부터가 문제였다.
자신이 중간고사에서 상혁이를 도왔기에 상혁은 수연이에게 뭔가 보답을 하려고 했고, 그랬기에 마침 그날 명환이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수연이 있었기에 상혁은 명환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뿐이지만-.
' 친구가, 되었으니까.'
아마도 명환이에게 있어 첫 친구. 이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수연은 알 수 없었다.
' 그래도 명환은 명환이니까....'
-달라지지 않을거야.
그것이 운명이다. 수연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상혁이 명환과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달라지게 된다면.
전생의 자신이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에.
============================ 작품 후기 ============================
명환이와 만나며 점차 멘탈에 금이가는 수연이! 이제 금이 간 멘탈을 후드려 부서야겠죠!
정말 별거 아닌 만남이었이지만 그것이 계기로 모든 것이 달라지는 명환이.
수연이는 과연 멘탈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