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어디가고 싶은데라도 있어?"
이곳에 가만히 있어봐야 할 것이 없었기에 주제도 돌릴겸 상혁이가 말했다. 하지만 수연이의 입장으로선 그렇게 물어봐야...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다고 해야하나. 움직이기 싫다거나, 볼게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돌아다니기만 해도 나름 즐거웠기에 특별히 특정한 어딘가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 딱히."
" 으음.... 그렇게 대답하면 할말이 없잖아. 역시,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동화풍의 놀이공원은 별로인거야?"
수연은 상혁이 '역시'라고 말하는 말에 눈가를 살풋 찡그렸다. 자신이 동화적이고 소녀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게 그렇게나 이상하다는 것인가. 아까 곱슬이와 대화하는 것을 못들었던 모양이다. 분명 곱슬이에게 자신은 동화적이고 소녀적인 것도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 상혁이에게 다시한번 설명해야할 판이다.
몹시 귀찮았지만 그래도 이야기하는 수밖에.
" 싫어하지 않아. 좋아해."
" 뭐?! 진짜?"
진심으로 놀라는거냐. 조금 기분이 나빠졌지만 평상시의 수연이를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음공주인데다가, 부실에선 언제나 고수위의 게임이나 남성적인 액션게임을 주로하니 주변인물들로선 '동화적인 것을 좋아하는 소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 기분나쁜걸. 그렇게 놀랄만큼 의외니?"
" 아, 아니. 그렇다기 보단 의외의 갭이라고 할까. 애니적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갭모에?"
" 호오, 여자애한테 직접 그거 갭모에야. 같은 대사를 하다니 쓰래기에 최저라고 생각하지만 이해해줄게."
아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애들에겐 이해하기 힘든대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냥 '의외의 모습이 귀여워서..'라고 하면 호감도도 올리고 좋았을텐데 갭모에가 뭐야 갭모에가.
" 고맙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우선 여기에 가만히 있기도 좀 그러니 걸을까?"
수연이는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이다보니 한 곳에만 있기에 좀 그랬다. 거기다 기껏 디즈니 랜드까지 왔는데 가만히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도 이상했으니 수연은 상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지금으로선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울 것같았다. 상혁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까 고민하다가 퍼레이드나 다양한 극단 같은 곳이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수연이 그 옆을 가만히 붙어서 걸어갔다.
아마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본다면 고등학생 커플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남자들 중에선 유독 상혁이를 노려보는 사람이 많았다. '저렇게 예쁜애를 저런 녀석이!'라는 시선.
물론 상혁과 수연은 그런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는 별개로 무척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남녀간의 달콤한 분위기도 없었고 단지 '같이 걸어간다'라는 무덤덤한 감각이라고 해야하나. 상혁은 지금 자신이 동성의 친구와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어색하거나 그런 감각은 아니었다. 의외로 수연이의 옆에서 걸어간다는 것은 무척 편하다고 해야하나. 처음에 걸을 때는 어디라도 가야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몰랐지만 의외로 수연이는 자신의 옆에 걸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배려를 많이하는 편이었다.
걸음속도도 상혁이의 속도에 맞춰 걸었고, 자신이 불편하지 않게 때에 따라서 거리를 벌리거나 좁히는 등. 신경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 한달간 같이 지냈음에도 이제야 안 새로운 사실이랄까. 아마 상혁이 자신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도 이런 식으로 걸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 응?"
걸어가던중 귀여운 기념품이나 상품을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곱슬이가 머리에 쓰고 다니던 쥐모양 머리띠나 윤아가 착용하고 있던 토끼 머리띠 등등, 다양한 머리띠가 있었고, 풍선이나 귀여운 장난감도 많이 있었다.
상혁이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수연도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다양한 동물귀 머리띠가 있고,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쥐모양 머리띠였지만 수연이가 애니에서나 보던 사실적인 동물귀 머리띠는 아니다. 단지 놀이공원에서 파는 귀여운 머리띠라고 해야하나.
아까 곱슬이나 윤아가 차고 있는 것을 보고 비웃어 넘겼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나도 하나 써볼까?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이것이 놀이공원의 마력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저런 것을 쓰고 분위기를 내는 것도 재미있긴 할 것같았다.
" 일로."
" 응? 아, 잠깐 갑자기 빨리 걷지마!"
사람도 많아서 자칫하면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수연이는 행동력이 있다고 해야하나. '뭔가를 해볼까?'라고 생각하면 '그래 해보자'로 바로 결론이 나버리는 편이었다. 아까 까지만해도 곱슬이나 윤아가 차고 있을 때는 별 생각없는 것같더니 막상 이렇게 다양한 머리띠를 보고는 단숨에 그쪽을 향해 걸어가지 않았는가.
아니, 행동력이라기 보단 변덕이 맞는건가?
" 흐응...."
디즈니 랜드다 보니 대표적인 것은 미키 마우스 머리띠 였지만 그 외에도 귀여운 머리띠가 많이 있었다. 토끼도 있었고, 호랑이나 팬더, 고양이 등등의 머리띠가 있었다.
" 신기한게 많은걸. 놀이동산은 원래 이런가?"
" 모르지. 그보다 어떤게 어울릴 것 같니?"
토끼 모양의 머리띠를 머리에다 가져다 대며 말하는 수연이의 모습에 상혁은 순간 튀어나오려는 헛기침을 꾹 눌러 삼켰다.
이런저런 머리띠를 머리에 가져다대며 올려다봐오는 수연이의 시선은 가슴이 두근두근 할정도로 귀여웠기 때문이다. '귀엽다'라는 표현은 평상시 수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지금의 수연이는 분명 너무나도 '귀여웠다'.
" 글쌔, 고르기 힘든걸."
" 왜, 나에겐 이런게 어울리지 않는것 같아?"
" 서, 설마. 어떤 것이든 너무 잘어울리고 귀엽고... 아, 내가 무슨소릴하는거야?!"
" 흐응~.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건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솔직하게 말하렴. 그런 칭찬 싫어하지 않아."
이런 귀여운 머리띠가 자신에게 안어울릴 턱이 있나. 역시 귀엽구나. 나는 역시 예뻐. 정말 최고야 흑발 생머리 미소녀 만세라고!
라는 수연이의 속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수연이에게 이런 부가적인 옵션은 귀엽게 느껴지는게 사실이었다. 다만, 상혁이가 반응이 없길래 '생각보다 별로인가? 난 괜찮은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어진 상혁의 말에 나름 만족한 수연이다.
" 어, 이건 좀 명백히 다른 귀들하고 분위기가 다른데."
상혁이가 가리킨 쪽에 있는 것은 수연이가 있는 곳보다 좀더 사실적인 모양새의 동물귀가 잇었다. 다만 대부분 '고양이귀'나 강아지, 여우와 같은 것이었달까. 놀이공원에서 기분을 내기 위해서 쓰는 귀라기보단 코스프레용 귀같았다.
" 일본이라 그런지 다양하긴 하네."
솔직히 한국의 놀이공원이었으면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물론 여기도 늘 파는 것은 아닌지, 오늘 있는 어트럭션 쇼를 대비하여 한정적으로 판매하는듯했다.
" 근데 이것도 괜찮은걸. 봐."
수연이가 골라서 머리에 쓴 것은 검은 고양이 귀 머리띠였다. 머리띠부분은 풍성한 수연이의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기에 마치 수연이 머리에 고양이 귀만 뿅 솟아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검은 머리엔 역시 검은 고양이 귀라고 생각하는데, 어떠니?"
" 그거냐. 그... 쿠로네코라던지."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캐릭이야."
엔딩 네타를 듣고 결말은 보지않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캐릭인 것은 사실이었다. 작슨 거울에 비춰서 바라본 수연은 예상보다 고양이 귀가 잘어울리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난 무표정하니 별로일까 했는데. 역시 나라서 귀엽네."
" 스스로 자화자찬하면 좀 그렇지 않냐?"
" 어머, 내숭떠는 것보단 이게 좋다고 생각하는걸? 아무튼 이걸로 해야겠어. 기념품 겸해서 지윤이 것도 사야겠는데."
지윤이는 절대로 그 머리띠를 사용하지 않을 것같지만... 그래도 정말 좋아하는 언니님이 주시는 선물이니 사용하긴 하겠지. 상혁은 문득 지윤이와 수연이가 함께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검고 긴 생머리를 가진 흑발의 미소녀 둘. 차가운 외견에 아름다운 언니와 초등학교를 갓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동안의 귀여운 동생. 더군다나 지윤이는 얼굴이 수연이와는 달리 고양이 상이다보니 특히 잘어울릴 것이다.
" ...무슨 상상을 하는건지 차마 이건 나도 못 물어보겠는걸.."
풀어진 상혁이의 얼굴을 보며 여러가지 머리띠를 계산한 수연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야한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건가.
" 응? 아아, 계산하고 왔어?"
" 이제와서 태연한척 말하지 말아줄래? 아무튼 자, 너도 이것을 머리에 쓰도록 하렴."
작은 가방에서 수연이가 뭔가를 꺼내 내민 것은 머리띠였다. 처음엔 방금 계산한 동물귀 모양의 머리띠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분명 귀가 달려있긴 했지만 그 사이에 길쭉한 뿔이 달려있었다.
" ....뭐야 이건."
" 유니콘. 너한테 딱 어울리는 머리띠야."
유니콘, 무슨 이런 것도 판다는 말인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받아드는데, 유니콘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상혁이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머리띠라고 하며 수연이가 내밀었으니 필경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왜, 하필 유니콘이야? 유니콘은 멋지잖아. 빔매그넘도 쏘고."
" 건담은 됐어. 거가다가 난 시난주를 더 좋아해. 아무튼 '유니콘'이라고 말까지 했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정말 넌 바보구나? 꼭 내가 설명을 해줘야 하겠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담담한 얼굴의 수연이를 가만히 응시하니 고양이 머리띠를 쓰고 있는 수연이가 등을 휙 돌리며.
" 유니콘은 처녀만 노리는 환상속의 색마거든."
" 그런 의미였냐!"
어쩐지 좋은 의도로 준 것같지는 않더라니! 이것을 벗어서 던져야 되나 순간 고민이 들었지만 수연이가 준 것인지라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수연은 등을 돌리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그런 상혁을 바라본 뒤,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 예상한대로 잘 어울려."
" 이런 때만 순순히 말하지 말라고. 절대 여기서 파는 유니콘 머리띠는 그런 의미로 파는게 아닐거야."
덤으로 거울에 비춰보았지만 전혀 잘어울리지 않았다. 유니콘 머리띠를 써봐야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수연은 그런 상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가게 밖으로 걸어갔다. 기념품도 샀고 머리에 든든한 고양이 귀도 샀으니 더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이 없었다.
상혁도 머리에 있는 유니콘 머리띠 빼고는 나름 눈 호강도 하고 해써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거기다 수연이가 좀더 적극적으로 놀이동산을 즐기기 시작한 모습이라 이런 것도 괜찮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우선 이번편은 생각해둔 곳이 여기까지라 좀짧네요. 다음편에 아마 도쿄디즈니랜드편이 끝날 것 같습니다. 덤으로 원래 디즈니랜드는 도쿄에 있는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옆동내인 치바에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려니 넘어가주세요.
빨리 수연이가 플래그가 꽂혀야 모에모에 해질텐데. 말이죠. 빨리좀 꽂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