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드디어 시험날이 다가왔다. 교실에 들어서니, 다들 자리에 앉아서 오늘 볼 과목을 필사적으로 외우고 있었고, 몇몇은 자랑이라도 되는 듯 공부 하나도 않했다며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정도는 아니지만 전교에서 손가락에 꼽힐정도로 잘하는 애들 몇명은 속으로 별로 긴장안하고 있을텐데도 겉으로는 이렇게 두려울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공부 별로 안했다고 시답잖은 연막을 펼치고 있었다.
저런거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저러고서 시험이 끝나면 아 이번 과목 완전 망했어! 라고 떠들겠지. 한 두개 틀리고서 말이야. 전생에는 그런 모습을 그냥 그러려니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내가 압도적으로 성적이 좋기 때문인지 그런 시덥잖은 자랑을 보자면 기분이 확 나빠지곤 했다.
물론 만점을 받을 만큼 공부를 하고도 한 두문제를 틀려 망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굳이 일일히 떠들 필요는 없잖아. 자기 성격이니 넘어간다 하더라도 난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수연아 공부 많이 했어? 잘볼 것같냐?"
침울한 표정의 곱슬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느릿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무래도 어제 밤늦게까지 공부라도 한 듯, 눈 아래에 진한 다크서클이 표시되고 있었다.
" 나름데로 열심히 했어. 성적이야 한 만큼 나오겠지."
나의 머리는 무척이나 좋다보니 암기과목같은 것은 한번 본 것만으로 외워버린다. 치트캐릭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진짜 열심히 하는 애들에게는 나 스스로 조금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꼬박꼬박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열심히 하는 애들도 많은데 이런 성적을 받기 미안하다고 할려나. 그래도 이런 말을하면 정말 재수없는 애가 될 것같아서 그냥 속으로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 역시, 전국 1등은 다른걸."
" 나한테 말 걸 시간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외우는게 어때? 시험 바로 전에 봐두는 것은 정말 크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말에 곱슬이는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 오늘 볼 과목인 수학과 과학 교재를 꺼내고 필사적으로 외우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로 돌아가 공식이라도 한번 훑어보도록 할까. 시험대형으로 벌려진 내 자리로 돌아가 옆을 흘깃보니 상혁이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시험까진 한시간은 남아있으니 알아서 오겠지.
느긋하게 정리해둔 공식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려니 창 밖에서 윤아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상혁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학교 앞까지는 차를 타고 왔는지 입구에서 배웅을 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처음엔 상혁이나 윤아의 어머니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내 시력으로 유심히 바라보니 상당히 젊어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이름만 들은 기억이 있는 상혁이의 누나인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누나든 젊어보이는 어머니든 미인 것은 확실하네. 상혁이 이녀석은 전생에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나서 근처에 왜 이렇게 미인들이 많아.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교재쪽으로 시선을 돌려 한번 씩 읽어보고 있으려니 교실의 뒷문이 열리며 힘겨운 모습으로 목발을 집고 걸어오는 상혁이의 모습이 보였다. 기술도 좋지, 오른팔과 왼다리가 부러지고 금갔는데 잘도 목발을 집고 걸어오는구나.
반에 있는 다른 녀석들은 부축을 해줄만도 한데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도리어 못본척 자신이 외우던 책이나 붙들고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내가 도와줘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미 상혁이는 내 옆자리에 힘겨운 모습으로 앉고 있었다.
" 생각보다 일찍 왔는걸."
가방을 책상위에 올려 놓으며 한숨을 쉬는 상혁이에게 그리 말하자 상혁은 피식 웃으며 답해왔다.
" 응, 일찍와서 오늘 시험볼 것을 한번 훑어보려고 했거든."
짜식 기특하긴. 어제 밤에 몰래 노트북을 한 건 알고 있지만 봐주도록 하지. 그래도 해보려는 모습이 가상하구나.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준비한 초콜릿을 하나 꺼내 상혁이에게 던져주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초콜릿을 왼손으로 받아든 상혁은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 왠 초콜릿?"
" 초콜릿을 먹으면 두뇌활동에 도움이 되. 시험보기 전에 하나쯤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의 말에 상혁은 그렇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비싸지 않은 ABC초콜릿 이었지만 상혁은 기쁜 듯 웃으며.
" 네가 나한테 뭔가 준 건 처음인데. 기분 좋은걸?"
" 흐응, 그런가?"
요약노트도 주고 그러긴 했지만 확실히 뭔가를 전해준 것은 처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상혁은 만족스런 얼굴로 초콜릿의 포장지를 벗긴 뒤 입에 넣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이는 상혁이의 모습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굳이 공부하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걸어 방해를 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시험도 30분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좀 더 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띠리리리리리린리리리리린
" 자, 책상 위에 있는거 다 집어놓도록."
첫번째 시험의 감독이신 체육 선생님이 들어오며 교탁을 탕탕 두드렸다. 체육 선생님은 맨 앞줄에 먼저 OMR카드를 나눠줬고, 언제나 처럼 OMR카드의 사용법과 주의 사항을 일러주셨다. 꼭 주의 사항을 알려줘도 청개구리처럼 일을 저지르는 애들이 있더라고.
" 그럼 시험 시작! 혹시 컨닝하는 애들은 모두 시험지 찢어버릴테니 각오하도록 하고!"
오늘 시험보는 첫번째 과목은 수학. 앞줄부터 시험지를 받은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도 시험지를 받아들고 한번 쓱 훑어보자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유연 고등학교인가. 문제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흘깃 곱슬이가 앉아있는 곳을 보니 이쪽에서 알아챌만큼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첫번째 분제부터 풀려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풀어보실까.
뭐 나에겐 식은 죽먹기지. 누워서 껌씹기나 마찬가지인걸. 느긋한 손놀림으로 1번 문제부터 하나씩 풀자 마지막 25번 문제까지 다 풀었을때는 시간이 대략 30분정도가 지나있었다. 느긋하게 풀어서일까,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네. 뭐 이정도면 분명 만점이다.
다 풀고 느긋하게 시험지 아래에 OMR카드를 끼워 둔 다음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려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게 주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까 하얗던 얼굴은 어디갔는지 혈색을 되찾은 곱슬이가 꽤나 열심히 답을 적어가고 있었고, 몇몇 객관식 문제에서 펜을 굴리는 아이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어이, 언제적 방식으로 찍는건데.
상혁이는 잘 풀고 있나.
그래도 나름 열심히 가르쳐서 그런지 신경이 쓰여 흘깃 바라보니 생각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다만 왼손으로 풀이를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린 듯,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OMR카드를 마킹할때가 제일 문제인듯, 검은 원을 하나 칠할때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와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순간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아까 상혁이를 부축해줘야 되나, 라는 생각을 했을 때도 그랬지만 내가 언제 남을 도우려고 한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스로 '친구'라고 자각을 한 탓일까,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상혁이에게 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었고,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스스로 상혁이를 도와줘야 되나? 라는 생각을 한 것은 꽤나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전에 계단에서 상혁이가 받아준 뒤의 그 찝찝한 기분처럼.
' 신경쓰이네.'
알 수 없는 감정만큼 불쾌한 것도 없다. 인상을 찡그리며 턱을 괸 체 생각에 잠겨 있으니 얼마 지나지않아 종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치자 몇몇 다 풀지 못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체육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가차없이 OMR 카드를 수거해서 가버렸다.
" 아... 역시 왼팔이라 불편하네. 마킹을 몇문제 못했어."
옆에 앉아있던 상혁이도 마킹을 다 하지 못한듯, 아쉽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아까 마킹하는 속도를 보고 불안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랬나보다.
" 몇 문제 정도 못했는데?"
" 한 세 문제...? 뭐 확실히 정답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쉽잖아."
세 문제면 그렇게 많이도, 그렇다고 적은 것도 아니다. 상혁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 바보같긴, 손도 불편하니 선생님께 도움이라도 청하지 그랬니."
" 그렇게 할걸 그랬나? 하지만 막상 문제를 풀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
뒷머리를 긁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은 상혁이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멍청한 녀석. 선생님에게 말했으면 분명 대신 마킹해주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곱슬이는 어떻게 됐나 싶어서 시선을 돌리니 생각보다 밝은 얼굴의 곱슬이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려 손까지 흔드는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 이야, 확실히 네가 알려준게 도움이 되네. 청이 선배가 찍어준 문제와 비슷한 것도 많이 나왔고. 정말 너희들과 만나서 다행이야!"
이녀석 분명 다음 시험도 도움받으려는 모양이구나. 내가 그렇게 둘까보냐.
" 미리 말하지만 이번 시험만 특별히고 다음부터는 스스로 하도록 해."
" 에에?!"
" '에에'가 아니야. 아무리 바보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어도 생각이란 것을 하렴."
나의 말에 곱슬이는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애처로워보이는 모습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렇게 말해두지 않으면 고등학교 3년동안 계속 빌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내년에는 청이 선배도 고3이고, 내 후년엔 졸업하시니 그때는 나 혼자 곱슬이와 윤아를 맡게 될지도 모르는 만큼 미리 싹을 잘라두는 편이 좋았다.
2교시는 자습시간이다보니 다음 시험인 과학을 대비해서 저마다 자습서를 펼쳐놓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2교시에 시험을 보고 가면 좋았을텐데, 굳이 3교시까지는 해야된다고 하니 원. 이럴거면 차라리 1교시에 자습을 하고 2, 3교시에 시험을 보면 좀 좋아.
물론 이건 나의 생각일 뿐이고, 다른 아이들은 저마다 과학 시험전에 공부할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얼굴로 노트나 교과서를 보고 있었다. 상혁이와 곱슬이도 진지한 얼굴로 자습을 하고 있던 터라 오직 나만이 귀찮다는 얼굴로 샤프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과학이야 옛적에 다 끝내둔 터라 딱히 볼 마음도 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2학년에 나뉘는 문과와 이과중에 어떤 것을 갈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곱슬이는 보나마나 문과로 갈테고. 아마 윤아도 문과로 갈 것같은데. 상혁이는 이과로 가려나 문과로 가려나. 참고로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없지만 이과로 갈까 생각을 하고 있다.
수학이 편하거든. 문과는 외울게 많아서 좀 귀찮다고.
50분의 자습시간은 꽤나 길어서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뒹굴거리고 있어서야 간신히 종이 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아, 시험보다 자습시간이 더 힘드네. 할게 없으니 너무 심심하달까.
하지만 쉬는 시간의 종이 쳤음에도 화장실에 가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과학시험의 대비를 하고 있었고, 나로선 그것을 그저 재미없다는 듯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잠시후 오늘의 마지막 시험을 알리는 종이치자 이번 감독 선생님인 수학 선생님이 들어와서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수학선생님이 1교시 수학시험 어땠냐고 물으면서 놀리자 사방에서 원성이 터져나오며 너무 어려웠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말이 들렸다.
뭐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빨리 시험이나 보고 집에 가고싶은데.
시험은 이래서 좋다니까. 오늘은 두 과목만 보고 집에가면 되는 것이었지? 중간에 자습만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게 어디야.
" 과학선생님이 열심히 풀라고 응원보내주셨어요. 모두 화이팅!"
" 수학 너무 어려웠어요!"
" 과학은 또 얼마나 어렵길레..."
1교시보다는 밝은 분위기로 시험지를 각자 나눠 받자 모두들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슨 과학 시험지가 네장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언어도 아니고 지문이 뭐이리 길어.
문제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무려 문제 숫자가 35문제였다. 50분만에 풀기에는 좀 많다고 해야할려나. 문제 숫자가 많지만 어렵지는 않다보니 적당한 실력인 애들에겐 도리어 행운일듯한 시험이었다.
아아, 35개나 마킹할 생각을 하니 벌써 귀찮아지네.
20개 마킹하고 5문제 주관식으로 푸는 것도 귀찮았는데 35문제나 마킹하라니. 좀 너무하잖아. 이건 빨리 풀고 쉬어야겠는걸. 아까 수학처럼 느긋하게 풀다가는 왠지 시간이 촉박할 것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마지막 문제에 마킹을 하고 시계를 보았을땐 시간이 대략 20분이 좀 넘게 흘러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또 너무 빨리 풀었네. 30분이나 남았으면 대체 뭘하고 있으라는 거야.
느긋하게 검토나 해볼까. 나름 지문에 신경쓰셔서 재미난 문장이 많던데. ...누가 보면 언어시험인줄 알거야. 과학시험에서 이렇게 긴 지문을 보는 것은 나도 난생처음이었다.
끝나기 5분전 쯤 되었을때는 할 것도 없어서 아까 자습때처럼 샤프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데 문득 상혁이가 마킹을 다했는지 궁금해졌다. 아까 수학시험도 세문제를 못했는데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과학시험은 마킹을 다 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 ...뭐야. 하나도 안되있잖아?'
이제 막 마지막 문제를 푼 모양인지 1번부터 마킹을 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저 덜덜떨리는 왼손을 보니 도무지 5분안에 35문제를 마킹할 수있을 것같지 않았다.
아, 저 바보 선생님한테 도움을 요청하라니깐 또 혼자서 하고 있지.
땀을 뻘뻘흘리며 마킹을 하고 있는 상혁이의 모습을보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머리는 장식이니? 뭐 됐다. 자기가 굳이 저렇게 하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막상 무시하려고 해도, 그동안 내가 병원에서 가르친 것도 있고 열심히 하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왔더니 그게 힘들었다.
' 하아, 정말 어쩔 수 없네.'
남은 시간은 3분정도. 상혁이가 마킹한 것은 일곱문제. 이대로 냅뒀다가는 분명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나는, 경고도 할겸 마지막으로 상혁이를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
" 선생님."
내가 손을 들며 이야기하자 수학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봐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직접 선생님을 부르는 경우는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 응? 왜그러니 수연아?"
" 상혁이가 팔을 다쳐서 마킹을 제대로 못하는데, 제가 도와주도록 할게요. 제 OMR카드는 미리 제출 하겠습니다."
수학선생님은 나의 말에 그제야 내 옆에 앉아서 열심히 마킹하는 상혁이를 발견하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 아, 그래? 그럼 OMR 카드는 제출하도록 하고 도와주렴."
" 네."
이렇게 말하는 나의 말에 교실이 조용히 술렁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상혁이를 직접 돕겠다고 손을 든 것이다. 물론 내가 상혁이와 같은 동아리라는 것은 반 아이들도 아는 사실이고 같이 대화하거나 꽤 사이가 좋다는 것정도는 알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내가 직접 누군가를 돕겠다고 나선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비단 상혁이도 마찬가지였던 듯, 내가 옆으로 다가오자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 무슨 생각이야?"
" 무슨 생각? 진짜 멍청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내가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지 않았니?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내일부터는 정말 돕지 않아. 네가 다친 것에 대한 빚도 이것으로 마지막. 이번을 마지막으로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날카롭게 쏘아붙여주자 상혁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구하려다가 팔다리가 부러진 애한테 하기엔 좀 그랬지만 나로선 이정도가 최선이었다. 더이상 어떻게 빚을 갚으라고 해도 이정도가 전부. 공부도 가르쳐주고 마지막으로 이정도 도와줬으면 됐지. ...나 좀 나쁜가. 쳇, 그래도 더이상은 안돼. 무리야 무리.
속으로 툴툴 거리며 상혁이 옆에 기대어 상혁이가 시험지에 표시해둔 답 그대로 마킹을 하자, 어쩐지 내 몸에 기대어 있는 상혁이의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같이 느껴졌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도 내가 옆에 딱 붙어있으니 긴장한 모양이었다.
" 흐응, 흥분한걸까?"
" 아, 아니야. 그냥 놀랐을 뿐이라고."
깜짝이야. 시험시간에 누가 그리 크게 말하래. 아니나 다를까 수학선생님을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까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덕분에 시선이 쏠렸잖아.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상혁이의 옆구리를 왼쪽 팔꿈치로 강하게 찌르자 그제야 상혁이의 행동이 잠잠해졌다.
아마, 내가 오늘 한 행동때문에 교실에서, 또는 학교에서 무슨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염두해서 한 행동이었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상혁이가 또 혼자 계속 하려고 할 것 같았으니 어쩔 수 없지.
상혁이 것을 모두 마킹하고 선생님께 제출하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의외로 시험이 모두 끝날때까지 이상한 소문은 떠돌지 않았다. 곱슬이조차 내가 그렇게 했던 행동에 대해선 그냥 '도와준거잖아?'라는 식의 반응만 보일뿐 딱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와 상혁이에 대해선 그런 소문이 나지 않을 정도의 갭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것 나름데로 다행인가.
아무튼 그렇게 우리의 첫 고등학교 시험은 끝이났다.
윤아와 곱슬이가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왔으면 좋겠지만-, 글쎄. 그것은 좀더 지켜봐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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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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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를 밀려썼어."
곱슬이는 카페의 식탁에 머리를 쳐박은체 중얼거렸다. 시험이 모두 끝난 기념으로 시내의 카페에 나와있는 우리는 각자 시험성적을 이야기하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오직 곱슬이 만큼은 무척이나 암울한 모습이었다.
" 애초에 못본거였으면 이렇게 억울하지 않았을텐데... 가체점 점수는 내 생에 최고의 성적이었다고!"
크앙!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곱슬이가 포효했다. 그런 곱슬이를 윤아가 차분히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이 무척이나 짠하게 느껴졌다. 함께 공부한 동료라는 것일까.
" 윤아와 상혁이는 모두 성적이 엄청올랐지? 가르쳐준 사람으로서 뿌듯한걸?♬"
청이 선배는 아포카토를 마시며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참고로 나도 오늘은 아포카토. 드디어 아포카토를 먹어봤지만 그게 그거다. 아메리카노에 그냥 아이스크림만 얹어놓은 거잖아. 가격은 훨씬 비싼데. 이럴 바엔 그냥 아메리카노를 먹겠어.
" 네, 특히 저 수학 성적이 엄청올랐어요."
" 전 과학쪽을 정말 잘봤네요."
윤아와 상혁이는 서로 만족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거 잘됐네. 내가 과학을 대신 마킹해주지 않았으면 대형사고가 났을거면서 말은 잘해요. 뭐 그 뒤로는 확실히 내 경고가 먹힌건지 확실하게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즐겁다는 듯이 떠드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카페 창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응시하는데 문득 익숙한 무언가가 시선에 걸렸다.
익숙한... 저번에도 보았던 것같은....
벌떡!
" 까, 깜짝이야! 수연이 너 갑자기 왜 일어나는거야!"
옆에서 곱슬이가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깜짝놀란 듯 소리쳤지만 나의 귀엔 전혀 닿지 못했다. 멍하니 굳어서 방금 전에 나의 시야에서 스쳐 지나간 그것의 환영만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이, 수연아 왜그래?"
" 수연아?"
주변에서 나를 계속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나의 시선 속에서 스쳐지나간 것은 다름 아닌.
'전생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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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분량 끝! 이제 3권 분량 시작이네요. 수연이의 멘탈을 굴려봅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