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시간이 저녁 열두시가 될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까지도 상혁이의 수준이 수연이가 생각한 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분들에게 민폐가 될 것같았기에 그만할 수밖에 없었다.(불은 열시에 소등했지만 개인 전등을 이용해 공부했다)본래 수연이의 목적은 암기 과목을 다 끝내고, 과학과 수학도 어느 정도 봐두는 것이었지만 예상보다 암기과목에서 시간을 잡아먹어 과학과 수학은 별로 보지못했다. 덕분에 나머지는 내일 수연이가 학교에 다녀오면 정리하기로 했고, 상혁이는 수연이의 날카로운 시선을 애써 외면한체 잠들 수 밖에 없었다.
기껏 도와주러왔는데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외워도 막상 수연이에게 쪽지시험만 볼라치면 모조리 기억이 안나는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물론 나중에는 대부분 정답으로 합격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대략 여섯시간만에 암기과목을 대충이나마 정리를 끝낸 셈이니 그리 오래걸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 목마르다.'
자기 직전까지 공부하다가 부랴부랴 잠들어서 그런지 새벽에 눈을 뜬 상혁은 마른 목을 축이고 싶어졌다. 더불어 화장실도 가고 싶은지라 상체를 일으켰지만 어둠속이라 휠체어의 위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팔이나 다리 둘중 하나만 뿌러진 것이면 모르겠지만, 오른팔이 부러지고 왼다리에 금이간 상황이다보니 혼자 목발을 집고 걸어갈 수도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 아, 생각해보니 막상 휠체어 타도 이동할 수가 없잖아. 역시 간호사를 불러야되나.'
휠체어가 있는 쪽으로 주섬주섬 움직이던 상혁은 한손으로는 휠체어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간호사를 부르는게 좋겠지? 혼자서는 이동할 수 없을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왼편으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오른손의 깁스때문인지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공교롭게도 멀쩡한 왼손도 간호사를 호출하는 버튼을 찾느라 공중에 붕 떠있던 터라, 미처 균형을 잡지못하고 몸이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 위, 위험?!'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던 터라 기울어진 몸은 급격히 침대 아래쪽으로 떨어졌고 황급히 바닥을 집기 위해 왼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이쪽에는 수연이가 자고 있잖아. 상혁은 순간 하나의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거 완전히 러브 코미디 전개?! 잠깐 그렇다면...
자신이 침대의 오른편으로 떨어진다->당황에서 왼손을 뻗는다-> 마침 수연이가 아래에 있다.-> 수연이와의 러브코미디 이벤트 발생!-> 사망라는 결과가 도출되자 상혁은 앞으로 뻗던 왼손을 급히 회수했다. 좋아, 쉽게 러브코미디 이벤트에 당할 수는 없지. 이러면 이 왼손으로 수연이의 몸을 터치하는 사태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그냥 자기만 바닥에....
'....이러면 온몸이 전부 수연이 위로 떨어지는게 아닌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연이의 위로 덮치듯 위로 올라타있는 상혁이 있었다.
여기서 급히 비켰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상혁이는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다.
오른팔과 왼다리가 깁스인지라 혼자서는 움직일수도 없던터라 급히 비킬수도 없었고. 어둠속에서도 반짝이는 수연이의 냉정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때문이다.
" ....어머나. 무슨 일일까, 이런 밤에 음란한 자세로 나의 위에 올라타있는 이유를 설명 해줄래?"
오른팔의 깁스가 무거워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설명하려 했지만 수연이의 차가운 눈에 입을 열수가 없었다.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같은데. 그때는 아마 수연이가 순식간에 제압해서 볼펜으로 푹찍해버리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다친 팔과 다리를 염두하고 있는 걸까.
" 거기다... 아주 씩씩한걸. 내 아랫배에 닿고있는거."
" ....!!"
자고 일어난 상태다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메가캐논이 크게 경직되어있는 모양이다. 가뜩이나 최근 몇주동안 자가발전도 하지 않은 터라(잘하지도 않는데다가 최근 일주일동안은 하고 싶어도 못했다) 아주 힘차게 에너지 충전을 하고 있어 수그러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 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위험해 이거! 살해당한다고!'
현제 상황을 말하자면 자신이 수연이의 위에 올라탄 상황이다. 덤으로 수연이 얼굴은 자신의 목 위치에 있고, 자신의 하반신은 수연이의 아랫배에 위치에 있는 상황. 멀쩡한 팔과 다리가 아니다보니 다른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평범하게 올라타고 있는 상황이라기보단 내리 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일어날 수도 없고 꾹꾹 누르고 있는 상황이랄까.
진정하고 싶어도 목에는 수연이의 숨결이 간질거렸고 명치 부근엔 수연이의 가슴이 눌리는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수연이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꾹 눌려져 있는 메가캐논이 진정한다는 것은 남자로서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 공부를 가르쳐주려고 왔다가 성교육을 하겠는걸."
" 태, 태연히 말하지 말고 좀 나좀 밀던지 일으켜줘!"
자신이 발버둥쳐봤자 하반신에 힘만 들어가서 메가캐논이 수연이의 아랫배에서 비비적 거릴뿐이다. 자칫해서 발사라도 하면 더이상 복구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사태가 일어나 버린다.
다른 환자들이 이 소동에 일어날지도 몰랐기에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수연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시끄럽긴."
번쩍. 하고 수연이는 상혁을 두손으로 밀어 단번에 들었다. 마치 갓난 아이를 들어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보통의 남성을 이렇게 들어올리는 것을 보면 수연이의 근력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침체된 얼굴로 다시 침대위에 앉은 상혁은 뭐라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건 뭐라고 해야할까.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무려... 자신의 메가캐논이.... 아무튼 그랬고.
" 그게.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어. 휠체어를 찾다가 팔의 무게에 못이겨서 그만..."
수연은 그런 상혁이의 말을 간병자용 침상에 앉아서 가만히 들었다. 즉, 휠체어를 찾으려고 침대 위에서 돌아다니다가 그만 팔의 무게에 못이겨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는건가? 뭐 보통이면 말이 안되지만 잠결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 알았어. 이번은 환자니까 용서해줄게."
자신의 위에 올라탄 것은 저번에 이어 두번째인가. 은근히 만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 이녀석에게는 자주 연출되는 것같았다. 물론 고의가 아니었다해도 보통은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환자이기도 하니 넘어가주도록 했다.
' 나 정말 착해.'
스스로의 선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연의 모습에 상혁은 정말이냐는 듯이 물어왔다.
" 진짜? 고, 고마워. 그래도 이번건 정말 미안해. 내가 조금만 조심했어도."
긴장감이 풀린 듯, 옅게 웃던 상혁은 그제야 방금 전의 상황을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하나,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게 사라지자 방금전 수연이 위에 올라탔던 상황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감촉이.
' 지, 진정해야되는데.'
하지만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음에도 메가캐논은 전혀 쇠약해짐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연은 그런 상혁을 뚫어져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 그보다 화장실하고, 물마시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
" 아, 맞아. 간호사를 불러야지."
갑작스런 일에 자신이 왜 일어났었는지를 잊고있었다. 상혁은 수연의 말에 급히 간호사 호출버튼을 찾으려 했지만 수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것을 저지했다.
" 어차피 나도 누구누구씨가 덮친 탓에 잠도 깼고. 그정도는 도와줄게."
" 그, 그래? 고마워."
하필이면 오늘따라 왜이렇게 친절한거냐. 상혁은 아직도 떳떳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슬쩍 바라본 뒤 애써 미소지었다. 아무리 뇌가 그만 진정하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도 이 녀석은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양도 세보고 애국가도 불러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 방금전 수연이를 내리누르며 받은 자극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자신이 너무 변태같았다.
" 그것도 소변을 보고 오면 가라앉을테고."
" 그렇지? 하하.... 하...?"
무심코 수연이의 말에 대답했지만, 흘려말하듯 지나간 수연이의 말은 상혁이의 말에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그것도 소변을 보고 오면 가라앉을테고.'라는 말은 자신의 메가 캐논을 지칭하는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걸아는거야? 아니, 보통은 아는건가?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거지.
이런 상혁이의 복잡한 마음을 알리가 없는 수연은 상혁이의 침대 옆에 놓여있던 휠체어를 끌고 와서는 아까처럼 상혁이를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상혁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을 표시했다.
" 평범하게 부축해주면 안될까?"
" 그러면 몸이 밀착해야되니 싫어."
방금 전에 멋대로 위에서 덮친 경력이 있는 자신으로선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결국 상혁은 수연의 말에 승낙할 수 밖에 없었고, 아까와 같이 갓난아이처럼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려져 휠체어에 앉았다.
정수기와 화장실은 전부 밖에 있었기에 휠체어를 끌고 복도로 나오자 최소한의 불만 켜져있는 병원의 복도가 시선에 들어왔다.
" 어머, 진짜 야근병동이네."
그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아는거야. 불이 꺼진 복도를 보며 하는 말이 그런 것이라니. 상혁은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그저 고개만을 작게 끄덕였다. 휠체어를 끌고가던 수연은 그런 상혁의 반응이 재미없었는 듯, 조그만 목소리로 흘려말해왔다.
"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이야기하면 재밌겠는걸. 지윤이라던지..."
지윤이에게 말한다고. 그 말이 지윤이의 귀에 들어가면 정말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오늘만해도 '각오하세요.'라고 문자가 오지 않았던가.
" 그것만은 봐주라..."
" 그래도 기분좋지 않았니? 그런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야."
기분이야 분명 좋았다. 그 아랫배에... 아, 아니 또 생각날 것같아.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더 자극을 주면. 상혁은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머릿속에서 떠올랐던 기억을 힘들게 지워냈다.
그런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수연은 상혁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부드러웠니? 푹신했을까. 나는 잘모르겠는걸. 역시 구더기 씨라니까. 이런 걸로 지금 상상하고 있지? 변태네, 구제불능이야."
놀리고 있다. 이녀석 지금 분명 즐기고 있는거야. 하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어서 상혁은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수연의 목소리에 전신이 오싹오싹했다. 다른 의미로 정말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런 상혁이를 보며 수연이의 비난은 화장실 앞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됐다. 그리고 수연이 남자 화장실 안으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려고 하자 상혁은 그 행동을 급히 저지할 수 밖에 없었다.
" 여, 여기서부턴 내가 혼자 들어갈게!"
" 무슨 바보같은 소리실까. 아무리 화장실 앞이라고 해도 네가 변기까지 걸어갈 수 있니? 말이 안되는 소리는 머리속으로나 하렴."
" ......."
이 순간만큼 자신의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적이 없었다. 결국 화장실 안까지 휠체어를 끌고 들어온 수연은 상혁이가 소변기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설치한 손잡이가 있는 대변기에 휠체어를 세웠다.
" 여기서부턴 혼자서 할 수 있겠지?"
" 응, 부디 빨리 나가줘."
이런 것은 보통 동급생인 여자아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상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붉어진 얼굴로 그리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 부끄러워하긴. 아까 내 위에 올라타 아랫배에 비비적 거린게 더 부끄러울 것같은데. 아아, 정말 불쾌했어. 뭔가 딱딱한게 내 아랫배 위에서 데굴데굴...."
" 비, 비비적 거리지 않았어! 그렇게 세세하게 말하지 말고 제발 나가주라!"
" 흐응, 그래. 그럼 여러가지로 힘내렴. 뭘 하든 상관없지만 손은 꼭 씻고."
" 그냥 소변만 볼거라니까."
간절한 얼굴로 이야기하자 수연은 뭐 여기까지만 놀려야겠는걸,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수연이가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상혁은 겨우 손잡이를 잡고 변기 위에 앉을 수 있었다. 어쩐지 전신의 힘이 쪽 빠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메가캐논은 여전히 건장했지만.
" 미치겠네."
대체 앞으로 오늘의 일을 어떻게 묻어야 될까.
상혁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같았다.
============================ 작품 후기 ============================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려요 ㅜㅜ. 이번 편의 주 키워드는 아랫배(웃음)이군요. 상혁아, 짜식 힘내라. 수연이는 이미 그런 남자의 고충 다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