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사실 우리 집도 상혁이 집과는 크게 다르지 않기는 하다. 어머니는 나의 성적을 알고 있긴 하지만 내가 꼴찌를 하건 말건 솔직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거기다 아버지와는 화해를 한지 이제 겨우 두 달 정도가 되었을 뿐이고 말이야. 사실 이번 생애에 내가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라기 보단 나 스스로를 꾸미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게 옳다.
이렇게나 예쁜데, 기왕이면 성적도 좋은 게 좋지 않겠어?
" 자자, 이제 다시 공부해야지. 내일 다시 시험 볼거야.♪"
중얼 중얼 거리며 자책하고 있던 윤아와 곱슬이는 부드럽게 이야기해오는 청이 선배의 말에 절망에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청이 선배도 대단하네. 저렇게 매일 시험지를 준비해온다고 말하다니. 보니까 직접 만든 시험지인 모양인데 대부분이 핵심적인 부분을 집고 있었다.
' 확실히 이렇게만 꾸준히 해줘도 성적은 오르겠는걸.'
뭐 지금처럼 계속 피의 비가 내린다면 소용없겠지만. 나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PSP를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그냥 느긋하게 게임이나 하려고 했지만 막상 곱슬이나 윤아가 훌쩍이며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니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나 역시 저 녀석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평상시의 나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게임기를 작동시키며 흘려 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 가르쳐주지는 않아도 물어보면 알려줄 수는 있어."
그리 크지 않은 나의 말이었지만 조용한 부실이다 보니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곱슬이가 의외라는 얼굴로 입을 열어왔다.
" 헤에. 그 이야기는 마치 우리를 도와준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어머, 멍청한 너의 머리로도 알아들을 수 있었구나. 뭐 틀리진 않아."
" ……조금쯤은 평범하게 말해도 좋잖아. 그래도 이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에 익숙하지만."
곱슬이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영 마음에는 들지 않는 미소였지만 이번만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 뒤, 곱슬이와 윤아는 어제 샀던 교재를 펼치고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청이 선배는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어려운 부분이나 중요한 부분을 정확히 집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청이 선배는 가르치는 거 능숙한 걸. 좀 부럽다.
그리고 언제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던 상혁이도 나름 스터디 그룹에 일원답게 진지한 얼굴로 공부에 임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게임을 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만 놀고 있으니 좀 마음에 걸린다고 해야하나.
크, 이래서야 게임을 해도 게임을 하는 게 아니잖아.
그렇다고 청이 선배처럼 능숙하게 가르칠 자신도 없었다. 뭔가 스스로 좀 계륵이 된 느낌인데. 차라리 나도 옆에서 공부하는 척하며 조금이라도 알려준다고 할 걸 그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게임하는 것에 집중하는데 게임기 위로 한 방울의 땀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5월치고 날씨가 따뜻한데다가 좁은 부실에 다섯 명이나 있다 보니 꽤나 더웠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내가 머리카락도 좀 길어야지. 긴 생머리는 다 좋지만 머리를 감을 때와 더위에 약하다는 것이 큰 단점이라니까.
내가 손을 들어 부채질을 하자 옆에 앉아있던 상혁이가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말해왔다.
" 슬슬 5월이니까 좀 더워지는걸. 너도 머리카락을 좀 짧게 자르는 게 어때? 너라면 뭐든 어울릴 것 같은데?"
뭐든지 어울린 다라, 너 꽤나 기분 좋은 소리를 하는 구나. 고마운 칭찬이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 그건 안 되겠는 걸."
" 왜? 더우면 자르는 게 좋지 않아?"
"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싫어."
왜냐하면 요조라는 머리가 잘리고 죽어버렸거든! 흑발 긴 생머리 여캐가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아이덴티티 붕괴라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요조라의 말로다. 나는 정말 요조라를 좋아했는데 갑자기 머리를 싹둑 자르고 올 줄이야. 너무해 정말. 그래도 부활할 거라고 믿고 있다고.
나의 멘토 중 하나였는데 머리를 자른 것을 보고 울어버렸다. 정말로.
이런 나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는 상혁이는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그럼 어쩔 수 없지. 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샤프가 움직이며 내는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만이 부실에 조용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간간히 청이 선배가 곱슬이와 윤아에게 설명해주는 말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평상시의 시끌벅적한 부실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절박하긴 절박한 모양이구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게임하기가 힘들어졌다. 아아, 정말! 예전이라면 공부를 하건 말건 게임을 해버렸을 텐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게임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곤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내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그리 말하자 곱슬이와 윤아는 책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특별히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물어봐도 대답해줄 수 없지만 말이야. 너희들이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데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서 먼저 간다고 할 수는 없잖아. 아까 말했듯이 나는 교수법이 능숙하지 않다. 그러니 윤아나 곱슬이는 물론, 상혁이에게 직접 하나하나 알려 주기가 힘들다.
하아,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야. 집에가서 청이 선배처럼 이 녀석들의 공부를 도울만한 것을 준비해 와야겠어. 프린트를 만들거나 요점을 정리하는 것은 할 수 있으니까. 귀찮기는 하지만 소설이나 만화에서 나오던 스터디 그룹 이벤트를 겪어본다고 생각하지 뭐.
" 그럼 수연아 조심해서 가!"
윤아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었기에 나는 살짝 손을 흔든 뒤에 윤아와 좀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청이 선배를 흘깃 노려보았다. 아마 내가 이렇게 하리라고 예상한 것일까. 내가 친구라는 것에 유독 약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단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활동할 거라 생각하고 이렇게 했을 것이다.
정말 청이 선배도 약았어. 내가 그런 마음을 담아 살짝 노려보자 청이 선배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척이나 평온하고 순수한 청이 선배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부실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아, 집에 돌아가며 책방이나 들려야지. 저 녀석들의 수준에 맞는 교재를 살펴보기도 해야하고 요점을 정리할 노트도 필요하니까.
문득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지금까지 마음이 가는 그대로 행동했고, 앞으로도 그러면 될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온 나는, 부실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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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탓에 시간은 어느 세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책방에 들렸다가 서둘러 돌아가야 갰는걸. 너무 늦으면 지윤이가 걱정하니까. 학교에서 시내의 책방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집에 들어가면 일곱 시에서 여덟시 쯤 될 것 같은데.
아직은 환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통학로에서 시내로 가는 것은 처음이구나. 언제나 집으로 곧장 돌아가 버렸으니 교복을 입고 어딘가를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 거기다 이 길은……."
내가 녀석들에게 쫓겨서 도망가던 그 길이지. 하, 새삼 그때가 떠오르네. 시내에서 학교 통학로까지 달려가서 지윤이랑 달리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이 몸으로 태어나서 '힘들다.'라는 것을 처음 느낀 날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지친다는 게 뭔지 알았고 몸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었다.
하기야 새벽부터 돌아다니다가 후로 종일 뛰어 댕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때는 이 길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한참 뛰어다니다가 결국 통학로로 뛰어올라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리저리 몰려 나 스스로 막다른 길로 달려간 바보 같은 행위였지만 그때로선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지윤이랑 화해하고, 달리기도 따라잡힐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만약 내가 그때까지 쌩쌩해서 지윤이를 뿌리치고 도망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새삼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랬다면 지윤이랑 화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 아버지와 만나지도 못했을 테고. 동아리의 애들하고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전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 살아갔겠지. 외톨이가 되어 홀로 고독하게.
뭐 지금도 아직은 혼자 있는 것이 편하긴 해. 그래도 내가 지금처럼 녀석들을 돕기 위해 움직인 것을 보면 전과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이렇게 계속 변해간다면 언젠가는 적어도 친한 사람들에게는 과거처럼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려나. 슬슬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고 느꼈을 때에야 나는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시내에 나와 있는 것은 이 몸을 가지고 환생하여 처음있는 일이었기에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아니, 전생에도 딱히 이런 시간에 시내에 나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사람이 많은 시내라는 곳은 애초에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고. 시끌시끌하고 복잡하여 정신만 사나워졌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그만큼이나 정신적으로 내몰려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지금과는 다르게 자괴감으로 똘똘 뭉친 상태였던 데다가 정말 방구석 외톨이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 내가 다시 태어나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잡고 생활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꽤나 의외이긴 하네. 아무리 여자아이에다가 스펙이 뛰어났어도 내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자, 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니. 그게 너무 과해 한번 망쳐버렸지만 그래도 나름 어린시절의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책방이... 저쪽으로 가야되던가.
가끔 학교에서 필요한 교재를 살 때가 아니면 가지 않는 책방이다 보니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 야야, 저기 봐. 쟤 어디 고등학교냐? 장난 아닌데?"
약간 시끌 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고등학생으로 추측되는 무리가 나를 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양아치내지 일진 애들 같은 스타일인 걸. 쫙 쫄여 입은 바지에 더벅머리처럼 대충 길게 기른 머리칼. 몇 명은 염색도 한데다가 수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들도 여럿 보였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대체 좀 논다 싶은 애들은 왜 죄다 바지를 저렇게 꽉 죄여 입는 걸까. 전생에 남자였을 적 기억을 따져 봐도 딱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자기들이 좋다는데 내가 뭐라 할 필요는 없잖아.
여전히 좀 시끌 거리긴 했지만 그런 시선이야 익숙했기에 가볍게 무시하며 책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만약에 나의 어깨를 잡는 손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책방을 향해 계속 걸어갔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방금 전 나를 보며 시시덕거리던 일진 녀석들이 나를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새삼 매번 내가 양아치라고 놀리던 곱슬이에게 조금 미안해지네. 진짜 양아치는 이런 거지. 곱슬이는 겉모습만 양아치니까. 아니, 위치도 양아치 대빵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불량스런 웃음을 짓지는 않는다.
참 대단하네. 보는 것만으로 불량스럽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나는 새삼 사람의 인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 수 있었다.
" 우와, 대박이네.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쩌는데?"
" 야야, 교복보니 저쪽 위로가면 있는 그 학교... 어디더라 거기- 아, 그래. 유연 고등학교 교복인데 그 학교에 이런 애가 있었던가?"
패거리는 대략 여섯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길가는 여학생의 어깨를 붙잡더니 자기들끼리 잘도 떠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도 많이 대담해졌네. 전생이었다면 속으로 욕만 줄창하면서 앞으로 있을 일에 덜덜 떨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귀찮을 뿐이다.
' 어라?'
거기다가 이 녀석들 입고 있는 교복을 유심히 보니 전생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복이다. 이야, 나름 그리운 걸. 여기서 그 학교까지는 꽤 먼데 말이야. 하기야 그 근처에는 놀 곳이 없으니 여기까지 원정을 오는 건가.
내가 속으로 이런 우연이 있나, 하고 감탄을 하고 있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주변의 양아치들은 실실 웃으며 나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 에에~, 얘, 얼어있는데? 우리 나쁜 오빠들 아냐~. 너 예뻐서 같이 놀자고 말 좀 걸러 온 거라니까?"
" 맞아, 맞아. 자자, 이렇게 있지 말고 가까운 당구장이나 가자고. 오빠들이 다 사줄 테니까. 좀 웃어봐, 표정이 없으니 너무 딱딱하네."
대체 뭐야 이 녀석들. 내 얼굴은 원래 이렇거든? 얼기는 뭘 얼어. 웃기는 짬뽕들일세. 브론즈한테 겁먹는 첼린져 봤냐. 욕을 하건 뭘 하건 네들이 하는 건 그저 귀여울 뿐이라고!
....물론 이 초 스펙의 신체가 있기 때문이지만 내 몸뚱이니 이렇게 당당해도 상관없겠지?
내가 반응이 없는 게 답답했는지 기어코 팔을 잡고 잡아끌려는 녀석들의 행동에 결국 귀찮은 마음을 가득 담아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 비켜."
싸늘하고 차가운 음성으로 이야기하자 녀석들은 이런 나의 말에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이 녀석이 우리한테 뭐라고 했냐? 라고 서로에게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응? 응? 지금 뭐라고 했냐? 설마 지금 비키라고 한건 아니겠지?"
" 어머, 정답이야. 방해되니 꺼져줄래?"
내가 비웃 듯이 이야기하자 녀석들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이 커졌다. 이런 양아치들 특유의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랄까. 바로 손이라도 뻗어올까 했지만 예상외로 떠뜸떠듬 입을 열어왔다.
" 하, 우리가 좀 귀엽게 대해주니 만만하게 보였나?"
" 얼굴 예쁘다고 까불면 확 스크래치 내버린다. 아오, 확 그냥!"
갑자기 시끄럽게 욕설을 내뱉는 통에 주변에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까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니 딱 그 짝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나처럼 예쁜 여학생에게 욕을 하다니. 뭐 그렇다고 웅성거릴 뿐 딱히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야. 보통 나정도 되면 환심 좀 사려고 도와주려고도 할 텐데 상대가 여섯 명이다보니 쉽지 않아 보였나보다.
" 흐응, 확 그냥 어떻게 할 거지? 궁금한 걸?"
" 아, 진짜 이년이 자꾸 조잘 조잘 떠드네!"
내가 가볍게 도발하자 결국 참지 못한 양아치 중 하나가 나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여자의 얼굴을 향해 이렇게나 쉽게 손을 데려하다니 정말 나쁜 녀석일세! 그래도 여자라고 안 때린다고 하는 애들도 있는데 말이야. 양아치들도 급이 있나보다.
쉬익!
나는 내 뺨을 향해 휘둘러진 손을 가볍게 피했다. 잡아서 업어 메칠까, 아니면 곱슬이에게 했듯이 꺾어버릴까 고민했지만, 주변에 사람들도 있고 다른 패거리도 있으니 서브미션은 자제하도록 했다. 주변에 있는 시민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살짝 움직인 나는 손을 들어 그대로 녀석의 뺨을 후려쳤다. 주먹으로 치는 건 교양 없으니 방금 녀석이 하려한 것처럼 뺨을 매우 강하게 쳤다. 그래 매우 강하게!
유연하게 휘둘러진 팔이, 채찍처럼 날카롭게 녀석의 볼을 후려쳤다.
팡!
짝 소리가 아니라 뭔가 가죽북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양아치가 시야에서 사라지며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길 한구석에 처박혔다. 기절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는 녀석의 볼은 내 작은 손자국을 중심으로 붉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외견만 보면 주먹으로 얼굴을 한없이 맞은 불쌍한 모양새랄까. 내가 때린 것이지만 참으로 아파보였다. 전력으로 때린 것도 아닌데.
내 힘이 이렇게 쌨던가.
나도 사람을 때려본 것은 처음인지라 좀 당황했다. 하지만 눈앞의 양아치들은 더 당황했는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곳곳에서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말하자면 나는 녀석들의 폭력성을 실험한 꼴이 된 모양이다.
" 아 씨, 뭐야! 대체 이년 무슨 짓을 했길래, 승철이가 저렇게 되냐!"
" 곱게 대리고 가서 놀아주려고 했더니 이년이 진짜!"
분노한 양아치들은 이젠 한명이 아니라 단체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히 그게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방금 전 데굴데굴 굴러가버린 양아치를 보자니 조금 미안해져서 방금전 처럼 뺨을 후려치기가 그랬다.
만약 지금 시간이 저녁 여덟 시었다면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으므로 용서 없이 뺨을 후려쳤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시간은 여섯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 또 덤비려는 걸까?, 저 사람처럼 되고 싶으면 얼마든지 환영해줄게."
내가 길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양아치를 가리키며 말하자 나머지 양아치들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내가 한 것이 있으니 차마 먼저 들어올 생각은 안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부어있는 볼의 모양새를 보면 아파보이겠지. 차마 맞을 엄두가 안날 거다.
" 야, 씨 확 조져 버린다!"
" 인생 종치는 수가 있어."
계속 염불외우 듯이 욕설을 내뱉는 양아치들이었지만 발만 동동 구를 뿐 나에게 들어오진 못했나. 이제 된 건가. 나 이제 지나가도 되나? 양아치들도 욕을 할뿐 딱히 의욕 있게 덤비려고 하지 않으니 말이야. 대충 상황 보다가 지나가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이어진 누군가의 목소리에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 물러서,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야."
무슨……?
냉정한 목소리. 양아치들의 가장 뒤에 서서 상황을 보고만 있던 양아치가 앞으로 나서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외모는 양아치치고는 준수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무작정 기른 더벅 머리도 아니고 꽤 깔끔하게 정리한 금발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설마.
실제로 저런 말을 하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 물러서,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야.'라니. 나라면 차마 오글거려서 결코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거기다가 외모도 곱상하게 생긴 것이 라노벨보단 인소에서 튀어나오게 생긴 얼굴 이었다. 참 이상한 게 이렇게 곱상하게 생긴 애들은 대부분 양아치가 많더라고.
거기다가 방금 대사 때문에 분위기가 요상해졌다. 뭐야 저 녀석, 나랑 싸우기라도 하자는 거냐. 여자아이 상대로 진짜 너무한 양아치들이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그저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울 것 같아. 나는 그냥 책방에 가고 있었을 뿐인데.
============================ 작품 후기 ============================
후기도 길다고 말씀하셔서 짧게 쓸게요.
바람돌이소닉님이 이프온리를 봤는지 물어보셨는데 이프온리가 뭔지 몰라서 검색해보니 본 적이 없는 것같아요. 덤으로 센죠가하라를 찾는 분이 많으시네요. 물론 센죠도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 이미지에 가장 큰 모티브가 된 것은 유키노시타인데!
+요조라(는 사망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