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데이트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흔히 데이트라는 것은 남녀가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상혁은 지금 이 상황이 데이트라고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단순한 문제집을 사러온 것이 계기이긴 했지만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처음엔 분명 문제집을 사러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곱슬이가 책을 바로 사면 그 이후에 돌아다닐 때 귀찮다는 이유로 책방은 마지막으로 가기로 정해져버렸고. 지금에 와선 단순히 둘이서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는 상황이다.
" 아, 벌써 거리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왔네."
길을 걷던 곱슬이가 길 한구석에 있는 조그만 이동식 아이스크림 판매점을 보고는 말했다. 아직 5월이면 저런 조그만 아이스크림 판매점이 나오기엔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탓에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 보통 이럴때 저런 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건가?'
곱슬이의 말에 상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윤아가 말하길, 여자아이들은 결코 쓸데없이 이것저것 언급하지 않는다던가. 대부분 간접적으로 돌려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액세서리 샵에 가서 여자가 '와~, 이거 너무 예쁘다!' 라는 이야기는 이 액세서리를 나에게 선물해주지 않을래? 라는 표현이라는 것.
곱슬이가 저것을 사달라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저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의도로는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그래? 그럼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면서 잠깐 쉴까?"
곱슬이는 그런 상혁의 말에 방긋 웃으며.
" 좋아! 그렇지 않아도 너와 같이 요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고 싶었어. 거기서 먹자."
요 근처에 있는 공원? 아, 가람 공원을 말하는 건가. 상혁으로서도 익숙한 공원이다. 어린 시절에 자주 놀았던 공원이니만큼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며 공원에 잘 가지 않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나던 친구들도 하나둘 이 동내를 떠났기에 최근 몇 년간은 간 기억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운 이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아이스크림 가게에 다가가자 약간 아이가 있으신 아저씨가 상혁과 곱슬이를 향해 웃어온다.
" 그래, 예쁜 아가씨, 무슨 맛으로 줄까?"
조그만 아이스크림 판매점답게 파는 맛은 초콜릿, 딸기, 바닐라 세 가지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대부분 싼 맛에 먹는 것이다 보니 사실 맛을 기대하기는 좀 힘들다. 그래도 나름 어린 시절에 자주 먹기도 해서 오래간만에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먹어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상혁은, 고개를 돌려 곱슬이를 바라보았다.
" 곱슬아, 넌 뭐 먹을 거야?"
" 음~. 역시 난 바닐라가 좋을 것 같아."
바닐라라. 상혁은 곧바로 아저씨에게 초콜릿 맛 한 개와 바닐라 맛 한 개를 달라고 이야기한 뒤, 돈을 꺼내려고 하자 그보다 빨리 곱슬이가 아저씨에게 돈을 건내 주었다.
" 에? 이건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비싼 것도 아니니 곱슬이 것까지 같이 내려고 했던 상혁은 갑작스런 곱슬이의 행동에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하지만 곱슬이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빙긋 웃었다.
" 괜찮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온 것이잖아. 비싼 것도 아니니 내가 살게."
별것 아닌 곱슬이의 말이었지만 상혁은 솔직히 좀 감동했다. 곱슬이가 이렇게나 부드럽게 다가올 줄은 몰랐던 상혁으로선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평상시와 달리 잔뜩 꾸미고 나온 탓에 무척이나 예쁜데다가 이렇게 자신을 배려해주니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거참 학생. 복 받았구먼. 여자친구가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도 참 예쁘네."
아이스크림 아저씨는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상혁과 곱슬이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각각 쥐어주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라는 말에 상혁이 급히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곱슬이가 당황하여 들어 올린 상혁의 왼팔을 자신의 오른팔로 끌어안으며.
" 감사합니다. 그럼 가자 상혁아."
" 아니, 잠-… 그게 아니고……."
뭐라 설명할 세도 없이 상혁은 곱슬이의 팔에 질질 끌려갔다. 분명 자신이 남자인데 곱슬이의 힘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서 속절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아니, 그리고 닿고 있다니까...!'
곱슬이가 갑작스럽게 팔짱을 껴버린 탓에 상혁의 팔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윤아나 청이 선배, 거기다 수연이에 비하면 확실히 존재감이 부족한 곱슬이의 가슴이었지만 딱히 작은 것은 아니었던지라 상혁이로선 그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고. 당혹스럽다고.
" 자, 이제 됐어."
곱슬이는 가람 공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하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상혁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묘한 아쉬움이 느껴졌기에, 잡념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크게 두어번 흔들었다. 순수하게 변태가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 미안."
" ……?"
무심코 사과해버린 상혁이었지만 곱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달라는 듯 한 시선이었지만 상혁은 애써 외면하며 근처에 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근데 여기도 확실히 많이 변했구나."
공원 한쪽에 있는 작은 놀이터를 보며 상혁이 과거를 생각하는 아련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이곳에서 놀던 때엔 단순한 흙 공터였는데 몇 년이 지났다고 작지만 훌륭한 놀이터가 생긴 것이다.
" 그러네. 예전엔 저기 흙 공터였지? 공사장 모래가 잔뜩 쌓여만 있고."
" 응, 대체 몇년을 방치하다가 만든 건지. 지금 생각하면 웃길 뿐이야."
그것이 벌써 십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엔 아마 윤아랑도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때지. 막 유치원에서 처음 만났었으니까. 도리어 유치원 친구들보단 이 공원에서 만나서 놀던 애들과 더 사이가 좋았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상혁은 문득, 곱슬이가 저 공터에 잘 알고 있자 궁금증이 생겨 가볍게 물었다. 자신의 말을 간단하게 받아넘긴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예전에 이 근처에서 놀았다는 이야기인데 자신이 알기로 곱슬이의 집은 이곳보다 상당히 멀었다.
" 예전에 여기서 놀았던 적이 있어? 여기서 집 멀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혁의 말에 곱슬이는 새초롬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살포시 웃었다.
" 어린 시절엔 이 근처에 살았었어.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사 갔지만."
" 헤에, 그렇구나. 그러면 혹시 이 근처에서 자주 놀았으면 나 혹시 보지 못햇어? 난 너 같은 여자애랑 만난 기억이 없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생각나는 어린 추억이다. 그 추억 속에서 곱슬이와 같은 여자아이와 함께 놀았던 기억은 없었다. 지금의 곱슬이를 생각하자면 당시로선 골목대장이나 그에 준하는 것이었을텐데 그런 여자아이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말에 곱슬이는 눈을 살며시 좁히며.
" 글쌔. 그건 나보단 상혁이가 떠올려야겠지. 내가 말해봐야 의미도 없으니까."
만났다는 건가? 아리송한 곱슬이의 말에 상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시절에 만났던 여자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그 나이 대엔 남녀 구별 없이 놀기에 일일이 남녀를 구분하여 기억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당시엔 그냥 상가 앞에서 포켓몬 딱지를 치던 아이들 틈에 아무렇지도 않게 낑겨 들어가도 바로 친구가 되던 나이였으니.
" 아, 생각보다 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달아서 맛있어."
입술에 하얗게 묻은 바닐라를 혀로 핥는 곱슬이의 모습이 묘하게 요염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상혁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근데 곱슬이는 뭐라고 해야 하나. 예상외네. 이런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것도 그렇고. 거절햇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말하는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별로 수연이가 말하듯 양아치나 일진 같이 보이진 않는 걸."
" 헤에, 그 이야기는 새삼 나의 매력을 알아봤다고 해도 좋은 거야?"
기쁘다는 듯이 씩, 웃으며 말하는 곱슬이의 말에 상혁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곱슬이는 매력적인 소녀였다. 그런 상혁의 반응이 마음에 들은 듯, 곱슬이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비어있는 양손을 쭉 기지개 피며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 뭐~. 상혁이가 이상하게 주위에 여자애들이 많은 것은 의외이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좋아했으니까 고백한 거야. 거절했다 해도 지금의 상혁이는 나를 잘 알지 못하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도리어 바로 받아들였다면 조금 섭섭했을지도."
그렇게 말한 곱슬이는 혀를 빼꼼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 그리고 일진이나 양아치는……. 딱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 했기보단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그냥 중학교 들어가서 좀 달라 보이고 싶어서 머리를 살짝 빨갛게 염색했는데 실패해버려서 적갈색이 됐는데, 그게 또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 계속 그 색깔로 하게 됐을 뿐이야. 그리고 스커트는 왠지 좀 짧아 보이는 게 예뻐 보여서 줄이고. 그렇게 다니다보니 어째 주변에는 그런 애들만 꼬이더라고."
흠, 하고 곱슬이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팔짱을 낀체 하나하나 꼽으며 말하던 그녀의 모습에 상혁은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 그러면서 어째 이런저런 소문이 많던데?"
" 아, 아니. 그게 말이야. 뭐라고 해야 하나. 여자애들이 막 날 따라다는 것도 재밌더라고. 근데 이런 쪽 애들은 자존심도 쌔고 사소한 것에 막 트집을 잡고 싸워서 나도 모르게 휘말렸는데..."
지금 소문의 근원이 된 그 날은 평상시와 별로 다를 것 없었다. 그저 패거리를 끌고 걸어 다니는데 옆 학교 여자 일진들과 곱슬이 쪽 여자애와 말다툼이 있었다. 그런데 꼴에 그 여자아이 남자친구가 그 학교 짱이었던 모양인지 남자애들을 잔뜩 끌고 와서는 곱슬이 일행을 해코지 하려 했던 것이다.
" 중학생 주제에 무슨 여자친구의 사랑을 지킨다느니 뭐니 하면서 잔뜩 애들을 이끌고 나타났더라고. 근데 그 모습이 뭔가 눈꼴시어서."
좋지 않은 무리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이 남자애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려 하니까 곱슬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러 상대 학교 짱의 얼굴을 가격했던 모양이다. 근데 그게 또 어마어마한 위력이어서 곱슬이의 주먹을 맞은 짱은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가서는 피가 나는 코를 부여잡고 눈물을 찔끔 찔끔 흘렸던 모양이다.
" 깜짝 놀라서 몇 명이 나한테 달라붙었는데. 그냥 겉멋만 든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라 그냥 뻥뻥차고 주먹으로 휙휙 쳤더니 다 정리 되버렸어. 그랬더니 갑자기 그런 별명이……."
적색의 사자(웃음) 말인가. 하기야 만화도 아니고 여러 명의 학생들이 여자아이 하나한테 덤볐는데 다 박살이 났다면 그렇게 공포스런 소문이 돌 법도 하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기에 곱슬이 패거리 여자애들은 지금 곱슬이가 상혁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고 이상한 부에 입부하건 말건 변함없이 잘도 쫓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양아치들답지 않은 강한 충성심이라고 해야 하나. 보통 여자애들 패거리는 집단에 특출 난 누군가가 없는 법인데 곱슬이는 유독 예외인 모양이었다.
" 그래도 그런 만화 같은 인간관계는 참 신기하네."
" 그치, 나도 상혁이가 만화를 좋아하니 이것저것 보고 공부하는데 내 쪽의 애들이 참 특이한 것같기는 해."
자신이 만화를 좋아하니 대화를 하기 위해서 일부로 만화를 보고 공부하는 건가... 하고 상혁이 내심 감동하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곱슬이를 향해 말했다.
" ....잠깐, 그럼 이번 쪽지 시험결과가 그리 절망적이었던 게?"
" 뜨끔."
" '뜨끔'이 아니잖아!"
만화를 보고 있느라 전혀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아니, 이 경우엔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인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하는 곱슬이의 모습에 상혁은 옅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자신과 어울리려고 하는 게 웃기기도 했고, 어째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위해 해주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곱슬이와 상혁이가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을 무렵. 그것을 좀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누구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윤아와 수연. 특히 윤아의 시선은 눈에 불꽃이라도 뿜어지듯 매서웠다.
" 어머, 무척 즐겁게 대화하는 걸?"
" 수연이는 이 상황자체가 즐거운 것같네."
" 그러네, 올 때까지는 귀찮았는데 막상 오니 즐거운 기분이야."
담담한 얼굴에 나직하게 웃음을 띄우는 수연의 모습에 윤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알고는 있지만 수연이의 성격은 좀 악취미였다. 상혁이와 곱슬이가 있는 곳에서 좀 떨어진 벤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수연과 윤아는 무척이나 눈에 띄었지만 당사자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렇게 신경 쓰이면 평상시에 상혁이한테 좀 솔직하면 되잖니."
놀리듯이 말하는 수연의 말에 윤아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상혁이를 제외한 이들과 대화하거나 함께 행동할 때는 비교적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상혁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윤아지만 정작 본인 앞에선 절대 그런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도리어 입학식 첫날처럼 강렬한 니킥이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 저런저런, 역시 리얼 츤데레는 참 귀찮아."
" ....수연아 혹시 한대만 때려도 되?"
" 물론, 때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우아한 포즈로 고개를 숙여 보이는 수연의 모습에 윤아는 쳇,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안타깝지만 자신이 수연을 때릴 수 있을 정도의 운동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연도 그것을 알기에 그토록 여유로운 것이겠지. 참으로 얄밉기 그지없는 녀석이다.
" 근데 수연아 혹시 둘이 뭐라고 대화하는지 들려?"
" 별로 신경쓸 내용은 아니야."
좀 거리가 되기는 했지만 수연의 귀에는 둘의 대화가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어렴풋이 들리고 있었다. 참으로 고성능 귀가 아닐 수 없달 까. 도청장치 없이 이 거리의 대화를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상혁이나 곱슬이가 큼지막하게 떠들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 흐응. 그나저나 곱슬이의 말을 들어보면 예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모양인데. 그때 상혁이와 만났었던 건가?'
수연은 제법 흥미로운 그들의 대화에 눈을 살짝 반짝였다. 동시에 곱슬이에 대한 신기함이 더 커졌다. 상혁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곱슬이는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던지, 예전과 모습이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그것도 십년도 전의 이야기. 상혁이가 기억하는 쪽이 이상할 정도의 세월이다.
돌이켜 말하면 곱슬이가 그때부터 상혁이를 계속 좋아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 대략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사이...겠지?'
그 시간에는 남녀의 사랑이고 뭐고 없을 텐데. 아무리 그때 호감을 품었다고 해도 십년이 넘게 한 남자를 만날 때까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는 건가. 무슨 만화도 아니고 수연으로선 솔직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그 시절엔 남녀 구분이 없으니 더욱이 평범한 호감이었을 확률이 높은데 그게 '사랑'으로 발전했다?
' 그것도 질투를 할 정도로. 첫날에 나에게 왔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자신이 상혁이와 친해보인다고 탈의실에서 시비를 걸던 곱슬이다. 그 정도면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닐 텐데……. 거기다가 고등학교에 만난 상혁이의 모습은 십년 전과 상당히 달랐을 텐데도 한 번에 알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동안 몇 번 상혁이가 성장하는 걸 봤었다는 이야기다. 몰래 숨어서 본 걸까. 곱슬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만 조금 무서운데.
' 그렇게나 즐거운 걸까.'
상혁이와 곱슬이가 대화하는 것을 보니 상혁이는 이제 좀 익숙해진 듯 편안하게 대화하고 있었고 곱슬이는 정말 기쁜 눈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솔직히 수연으로선 그런 곱슬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성을 좋아한다. 그런 게 어떤 감정이려나. 만화에서 나오는 이성캐릭을 보고 귀여워! 예뻐! 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인가.
아직 수연이에게 좋아한다, 라는 그런 말은 조금 어려웠다. 만화로 보고 어떤 모습인지, 뜻인지 안다 해도 본인의 마음이 알지 못하면 영원히 모르는 것이기에.
" 앗, 수연아 저거, 저거!"
" 응?"
잠깐 '사랑'이나 '좋아한다.'라는 감정에 대해 수연이 고민하는 사이 곱슬이와 상혁이에게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슬슬 가려던 곱슬이와 상혁이에게, 자전거가 쿵, 하고 충돌했기 때문이다. 아마 옆으로 돌다가 벤치에서 갑자기 일어나 걸어가던 상혁이를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큰 충돌은 아니어서 자전가가 둘 사이에 끼어 함께 구르는 일은 없었지만 상혁이가 그 충격으로 중심을 잃고 곱슬이의 품에 쓰러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와, 저런 러브코미디 같은 상황이 진짜로 일어나긴 하는 구나. 새삼 대단하네.
수연이 조용하게 감탄할때 이미 윤아는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곱슬이의 품에 안겨있는 상혁이의 뒤통수를 무릎으로 찍어버리고 있었다.
" 이런, 이런. 이미 미행이 아니네."
갑작스럽게 난입한 윤아에게 당황한 곱슬이와 상혁이 급히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즐겁게 응시하던 수연은 하얀 양산을 천천히 자신의 머리 위에 펼쳤다.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것 같으니 햇빛에 노출될 자신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햇빛을 완벽하게 차단한 자신의 양산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 수연은 진심으로 분노한 윤아와 그런 그녀에게 애써 상황을 설명하는 상혁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어제 올렸던 글의 댓글을 보다가 어떤분이 수연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얀데레가 될 것같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저도 막상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잘알지 못하니 막상 그것을 가지게 되었을때 그것을 지키기위해 수연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라고 생각하니 말이죠.
물론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고 그렇다는건 아니에요. 헤헤.
나중에 외전으로 어린시절 수연이가 밝게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편이랑 완전 러브모드(공략당한 이후) 수연이 두개를 올려보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