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S]공략당해 버렸다-16화 (16/153)

16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첫 주말.

평소와 같이 지나가리라 생각한 주말에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렸다. 수연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자신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여동생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이젠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십 칠년간 도망쳐왔던 것을 처음으로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어 하는 소중한 여동생을 생각해서라도 도망갈 수 없었다.

언제나 뒤에서 따라오고 자신을 의지하던 여동생이 이렇게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감정이 벅차올랐다. 누군가가 도망치는 자신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에.

그것이 전혀 달리기를 못하던 자신의 여동생이었던 것이.

" 고맙다고 하지는 않아요, 선배."

수연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윤아와 상혁이는 피곤한지 골아 떨어져있었고, 곱슬이는 과자를 집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직 심청만이 그런 수연을 가만히 응시한 체 싱긋 웃었다.

" 그럼. 우리는 멋대로 너를 몰아세웠을 뿐이야."

" 지윤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정신적으로 이렇게 몰려본 것 오랜만이니까."

수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무얼 안다고 수연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되는대로 떠들고 무작정 공상하는 것을 내뱉을 뿐이다.

" 수연아. 우린 너를 아직 이해하지 못해. 만난 지 겨우 5일이 됐을 뿐이야. 너의 입장에서서 너에게 말을 꺼내기엔 우린 평범한 사람일 뿐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너의 옆에 있는 동생의 말이 너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드는 것뿐이었어."

" 그래서 곱슬이와 상혁이, 마지막에 지윤이를 만나게 한건가요."

" 그래. 곱슬이는 정말 너의 동생이 너를 잡아달라고 했기에 달렸을 뿐이고 상혁이는 자신이 아는 바를 너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했을 거야. 곱슬이나 상혁이, 너에겐 둘다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

당연하다. 애초에 수연과 이들이 만난 건 겨우 5일이 되었을 뿐이다.

" 정말 오지랖이 넓으시네요. ...어떻게 설명하려 하신다 해도 오늘 저에 대한 것에 대해선 절대 고마워할 생각도, 감사할 생각도 없어요."

" 그래."

심청의 푸른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며 수연은 애써 다시 달리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하지만……."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작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어린 인상의 소녀. 하지만 무척이나 닮은 한명의 여동생.

" 제 여동생을 도와주신 것은 감사드릴게요."

" 후후, 오지랖이 넓었을 뿐이지."

이러나저러나 해도 여동생 혼자라면 자신을 붙잡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을 것이다. 이리저리 정신적으로 내몰고, 한계에 몰려있던 그때였기에 동생은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눈앞의 이 제멋대로인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점 하나만은 수연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 ....해가 거의 지고 있네요."

오늘이라는 하루를 마무리 지으려는 듯, 태양은 점차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묘소와는 이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이미 늦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속 에는 이대로 만나지 못했으면 한다는 마음과, 이대로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 그러네. 걱정하는 거니?"

" 글쎄요……."

만약 이대로 시간이 늦어버려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렇게 자신을 붙잡은 여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나 걱정되었다.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며 심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십 칠년간 아버지에게서 외면 받았던 소녀. 가족에게서 붕 떠있는 체 외톨이로 살아온 소녀. 먼저 다가가는 게 어색한, 거절하는 것만을 철칙으로 살아온 이 작은 소녀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청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그러자 떠오르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뿐이었다. 윤아나 수연과 달리 자신의 가정은 특별한 굴곡 없이 평탄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아왔다. 만약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을까- 하고 생각해봤자 드는 생각은 그저 막연한 그런 두려움뿐이었다.

수연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온 지윤이 이렇게나 열심히 달려오지 않았는가.

심청은 그것을 믿기로 했다. 수연과 수연의 아버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 지켜본 지윤의 결정을 믿기로 했다.

" 부디, 아버지와 잘되길 바랄게."

심청이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특별한 위로의 말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에 담겨있는 상냥함은 확실히 느껴졌기에 수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하고 차가 멈췄다. 묘소 관리인이 나와 너무 오래있으시면 안된다고 말하며 가는 것이 보였다. 긴장되었다.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 도착, 한 거야?"

차가 멈추고 심청이 관리인과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지 지윤이 부스럭 거리며 일어났다. 수연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것은 지윤을 위해서라기보단 자기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있을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뿌리치기 위해서.

지윤도 그런 언니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비어있는 언니의 왼손을 꽉 잡았다. 그런 지윤의 행동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져서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내었다.

" 가자. 언니."

" 응."

수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심청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뒤 차의 문을 열었다. 쌀쌀한 밤공기가 수연의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의 묘소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한 위치는 가보지 않아 모르지만 막연히 그렇게 느껴졌다.

수연은 지윤이 이끄는 데로 천천히, 두려움을 담은 발걸음을 한걸음씩 내딛었다. 무서웠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그런 수연과 지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청은 차 밖으로 나가서 특별히 배웅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곱슬이 역시 그저 차에 편히 몸을 기대고 주변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들이 지금 나아가려는 자매를 향해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지금까지 한 것도 멋대로 참견했을 뿐이다. 멋대로 참견하고, 멋대로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남은 것은 작게 응원을 하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저 '힘내.'라고 하는 것 밖에.

--

한걸음.

또 한걸음.

발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몸이 거부를 하고 있었다. 가면 안 된다고, 가봤자 좋을 것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지, 자신이 정말 가도 괜찮은지 머릿속이 계속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묘소가 가까워질 수 록 더욱 심해졌다.

자신은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 할 텐데도.

본능적이라고 해야 할지 점점 발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옆에서 자신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주는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등을 돌리고 도망갔을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을 따라 걸어간 곳에는 몇 개의 묘소가 늘어서 있었다. 늦은 시간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욱 눈에 띄었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한명의 남성이.

한 묘소앞에 가만히 서서 그것을 바로 보고 있는 익숙한 남자가.

몸이 떨렸다.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그래도 걸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묘소 앞에 가만히 서있는 남성의 바로 뒤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계속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당연히 몇 분도 되지 않아 수연과 지윤은 남성의 뒤에 서있었다. 남성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에 걸어와 멈추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터인데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묘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묘소 바로 앞에 있는 상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위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수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지금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를, 별일 없기를 기도하기에도 바빴다.

" 지윤이니."

차분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그렇게 물어왔다. 그저 아는 것을 확인만 하는 것처럼.

" 응."

지윤은 특별히 옆에 언니가 있다거나 하는 말을 덧붙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지윤의 말에 남성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발소리를 들어보니, 두 명이서 온 것 같은데. 엄마랑 온 거니?"

두근.

하고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대로 밝혀야 하는 걸까. 지윤이 어머니와 온 것이 아닌 자신과 왔다는 것을.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하는 걸까.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죽은 어머니와 닮은 자신.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묘소의 앞. 지금까지 외면하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던 둘이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 무서웠다.

" 아니. 엄마랑은 오지 않았어."

조용히 답하는 지윤의 말. 그 말에 남성은, 아니 수연의 아버지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수연은 갑작스런 지금의 적막이 너무나 무서웠다. 마치 당장이라도 터질 시한폭탄의 앞에 서있는 것처럼 겁에 질려있었다.

이번에도, 아버지에게도 외면 받는다면 정말로 살아갈 수 없을 텐데.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이 수연은 너무나 두려웠고, 지윤은 그저 기다렸다. 지금의 아버지는 언니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 아버지가 처음으로 언니의 친 어머니의 묘소를 가게 된 바로 그날부터 옆에 있던 지윤은 알고 있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그런 결심을 했는지. 어째서 재혼을 했고, 계속해서 방황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었고, 기다렸다.

아버지가 결심하고 입을 열어주기를.

" -그런가."

수연은 화들짝 놀라 아버지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져서 하늘에 떠있는 별이 조금씩 반짝이고 있었다.

" 지금 지윤의 옆에 있는 것은 수연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네. 라고 대답하면 되는 간단한 것이었음에도 수연은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수연의 반응을 이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정말로, 데려왔구나."

" 응. 몇 년이나 걸렸지만."

아버지의 말에 대답한 것은 지윤이었다. 그런 지윤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젔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무척 한심하다는 것처럼, 스스로를 비난하듯이.

"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다."

" 그런 영원은 없어."

" 차라리 나는, 그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도 있었지만……."

나직한 아버지의 말에 수연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역시 잘못된 것일까.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잘못된 걸까. 도망치고 싶다. 이대로 등을 돌려 달려가 버리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지윤의 손을 뿌리치고 갈 자신은 없었다.

애써 자신을 붙잡아준 여동생에게서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수연은,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젠 정말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내쳐질지도 모른다.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했기에, 수연은 조금이나마 용기를 내고.

말을 할 수 있었다.

" ……저도, 그래요."

수연은 천천히 이야기했다. 방금 전 아버지가 말했듯이 자신도 '영원히 아버지와 만나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라고 분명 생각하고 있었다.

" 계속 도망쳤어요.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아버지에게 해가 될까봐. 그렇게 계속 도망쳤어요."

" ……."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수연은 조금 더 힘을 내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 하지만, 이런 제가 달라지길 바라는 동생이 있으니까. 아버지와 마주보길 바라는 동생이 있으니까, 저는 이렇게 왔어요."

이렇게 왔다. 수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무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십 칠년간 태어나서 한 번도 대화하지 않은 상대다.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쪽이 이상했다.

"……그래. 그러 했겠지."

수연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등을 돌려 수연을 향해 마주보았다. 검은 머리칼에 수연과 닮은 눈을 한 중년의 남성.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보는 것은 수연으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것도, 대화를 한 것도. 똑바로 서있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명 도망치고 싶고 뒤돌아버리고 싶을 거라 생각한 상황이지만 막상 아버지를 정면에서 마주보게 된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나왔다.

왜 그런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처음으로 마주본 아버지의 모습에. 아버지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에 눈물이 나왔다.

그런 자신을 보며 아버지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 영원히 오지 않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네가 어렸을 적 외면해버리고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가 너와 다시 마주볼 수 있을까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 ……네?"

아버지의 말은 너무나 의외인 것이어서 수연은 눈물이 흐르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처음에는 내가 너를 낳고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여 너를 미워할 것만 같아 멀리했다. 말을 걸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너를 내가 증오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이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오직 아버지 본인만이 속으로 감추고 있었던 이야기다. 자신이 어째서 재혼을 한 것인지, 왜 계속 다가가지 못했던 것인지.

아마 수연을 안내한 지윤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도 그것을 고쳐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의 아내를 잊는다면 조금이라도 이 죄책감이 덜할까 싶어 재혼을 결심했다. 자신의 딸이 '그 날'에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 '가족들이 함께' 있는 것을 바랐기에 재혼은 '그날'과 멀지 않은 곳에 결정했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멀어진 것 같았다. 자신은 수연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고, 수연도 성장함에 따라 아버지를 외면했다.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딸을 증오할까봐, 미워할까봐 외면했던 자신이 이제 와서 딸의 시선을 받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그는 도망쳤다.

마치 수연과 같이 등을 돌리고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수연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그는 아내의 기일을 떠올렸다. 아내가 죽었기에 그것을 애써 외면했던 게 아니다. 물론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것은 변하지 않지만 '기일'이라는 게 공교롭게도 날이 겹쳐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지윤이의 말도 있었고 해서 그는 십 삼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의 묘소에 갔다. 아내가 본다면 매정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지고 싶었다.

잊고 있었던 것을 되찾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이 묘소에 가던 날. 옆에 따라 붙은 것은 지윤이었다. 이젠 웃음마저 잃은 언니를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는 장한 딸이었다. 자신과는 달리-.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데도 지윤은 자신의 아내의 묘소에서 슬퍼해줬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 언젠간 이곳에 언니를 데리고 올 테니 그때는 도망치지 말아주세요.'

이런 것은 당사자가 없으면 안 되니까요. 하고 지윤은 말했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 어린 아이인 지윤의 말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하겠다. 라고 말했다.

큰 기대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생각한 장한 딸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년.

계속 한 해 한 해 지나갈 수록 이 묘소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자신이 돌아보고 마주볼 용기가 없었기에 그런 작은 딸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졌다.

참으로 못난 아버지다.

바보같은 인간이다.

부모로서 자격도 없는 그런 인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수연과 마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와서 수연을 본다 하더라도 더이상 미워한다거나 증오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쓸데없는 핑계를 한 외면이었을 뿐이다.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터인 수연에게 무슨 얼굴로 말을 걸고 마주볼 수 있을까. 수연도 이런 아버지의 얼굴은 영영 보고 싶지 않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대화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도망치고 있었다.

" 그런데 이렇게 나의 앞에 올 줄은……. 몰랐단다."

수연은 그런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자신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걸까.

그저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 싶지 않기에 외면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닮았기에 그것을 증오하고 바라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던 것이다.

잘못 생각해왔던 것이다.

분명 아버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을 '외면하지 않기'위해서 잠시간 도망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잠시의 도망이 아버지와 자신을 계속해서 외면하게 만들었고 오해를 부풀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에 비친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이 가정을 헤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영원히 내쳐져버릴 것이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큰 착각을 했던 것이다.

자신은 한번 죽었다.

부모에게 내쳐지고 모두에게 버려져 그렇게 한번 죽었다.

그랬기에 이번 생도 그렇게 내쳐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전생처럼 그렇게 외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면이라는 것은, 양쪽이 모두 같이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외면한다고 느꼈듯이, 아버지도 자신을 외면한다고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서로 누가 먼저 다가갈 것 없이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서로 도망쳤으니 평행선을 이루고 있던 마음이라도 계속해서 멀어져만 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버지도 자신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 저는, 그럴-생각...으로 한 게……."

눈물이 나왔다. 바보 같았다. 눈앞의 있는 남자는 '남'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였다. 계속해서 외면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상처받지 않도록 한다는 자신의 생각은 그저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쳤을 뿐인 죄악이었다.

" 아버,..지가... 슬퍼 할까봐. 그저, 저는 그러니까……."

제대로 설명할 수없었다. 평상시처럼 냉정하게 도도하고 아름답게 그런 수연으로서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나왔다 울고 있었다.

" 어머니...의 기일도, 가지 않으셨고. 저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묘소에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연은 더더욱 아버지와 마주치길 거부했다. 아버지의 술버릇을 안 것도 그즈음이었고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제야 어머니를 잊기 시작했다고. 자신이 이런 때에 아버지의 앞에 선다면 혼란스러워질 뿐이라고.

" 수연아."

아버지가 불렀다. 십 칠년 만에 처음으로 수연의 이름을 불렀다.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연은 그저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사이로 아버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가 자신이 이름을 불렀지만 수연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멈춰있었다.

그저 아버지를 바라보고 바보같이 울뿐이었다. 그런 수연을 도운 것은 자신의 뒤에 있던 지윤이었다. 지윤은 소중한 언니를. 이제야 아버지 앞에 마주 보는 것을 결심한 착한 언니의 등을 밀었다. 앞으로, 앞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 언니. 가자."

한걸음

한걸음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의 묘소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바라본 어머니의 묘소는 수연에게 있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멍하니,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 어머니의 묘소는 다른 묘소와 특별히 다를 것 없었다. 평범하게 잔디가 자라있고 잡초도 있는 그런 묘소였다. 다만 이질적 인건, 묘소 앞의 상에 올려져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절대 이런 묘소에 있을 리가 없는, 딸기 케이크의 모습에.

" ...케,이크?"

수연은 눈물을 닦아내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지만 분명 케이크였다. 그것도 예쁘게 딸기로 장식된 딸기케이크. 자신이 좋아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 언니."

그런 케이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지윤이 조용히 말해왔다. 그녀는 케이크를 응시하며 싱긋 웃었다.

"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수연은 잠긴 목을 애써 가다듬고 천천히 대답했다.

" ……어머니의 기일."

" 바-보."

마치 틀렸다는 것처럼 지윤은 수연을 타박했다. 그리고 케이크의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한번 살짝 찍은 뒤, 그 크림을 수연의 코에 콕 찍으며 부드럽게, 다정하게 말해왔다.

" 오늘은 언니의 생일이잖아?"

생일.

수연 자신의 생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 잊고 있었던 것.

" 아버지가 왜 계속 어머니의 기일을 안 갔던 거라 생각해."

어머니가 죽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 언니는 정말로 바보야. 그날이 언니의 친어머니의 기일이기보단. 소중한 딸의 탄생일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거야."

아버지는 언제나 혼자서 언니의 생일을 축하했다. 아니, 지윤도 함께 축하하기는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언니가 없었다. 아버지가 언니를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의 생일은 '가족'이 함께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안타깝게도 지윤 자신의 어머니는 수연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기에 결정한 것은 네 명이었다. 언니를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 마지막으로 언니까지 모여 생일 축하를 하는 것이 지윤의 생각이었다.

그러면 예전의 언니로 돌아와 줄지도 몰라, 하고 지윤은 어린 마음에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지금 언니의 웃음이 다른 것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알기에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으로서 언니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 언니가 묘소에 오기를 바란 건, 아버지와 만나주길 바란 것도 있어. 하지만 이렇게 언니를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언니가 함께 생일을 함께하기를 바랐던 거야."

생일은, 사람이 태어난 날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이 태어난 것에 감사하는 날이다. 지윤은 아버지와 언니의 친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서 그 기일에, 언니의 생일에 함께 하기를 바란 것이다.

수연은 그런 지윤의 말에 이틀 전 상혁의 집에서 자신이 지윤에게 물었던 말에 그녀가 한 대답이 기억났다.

[이래서 좋은 것은 없어. 이런 확실치 않은 방법으로 네가 나에게서 얻고 싶은 게 뭐지?]

차갑고 매정하게 물었던 자신의 질문에 지윤은 이렇게 답했다.

[ 몰라도 상관없잖아, 그런 건.]

평상시의 지윤이라면 단호하게 아버지와 만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제 서야 알아차리다니.

자신은 정말 구제할 도리 없는 바보였다.

" 수연아."

케이크를 멍하니 바라보는 자신에게 아버지는 애써, 어색하지만 어떻게든 말하려는 것처럼. 크게 용기를 내어 이야기해왔다.

" 너무 늦었고, 아버지를 원망할지 모르지만……."

옅지만 분명히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 ……생일, 축하한다."

눈가가 떨렷다.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나왔다.

아니, 아까처럼 복받쳐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다는 것에 놀랄 정도로 마구 흘러나왔다.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지윤이가 초등학교 6학년. 수연이 중학교 1학년이던 그때부터 아버지는 매년 기다린 것이다. 지윤이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다고 아버지와 내기를 했을 때부터 매년 이곳에서 케이크를 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연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서.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서.

바보 같다.

자신은 무엇에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일까.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수연은 울면서 계속해서 울면서 애써 입을 열었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할 것은 잘못을 비는 것도 사과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준 아버지에게. 이끌어준 동생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것에.

이 세상에 눈을 뜨고 새로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를.

고마움을 말해야만 했다.

" 감……."

수연은 어물거리며 말했다.

흐르는 눈물에.

복받치는 슬픔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 ...감사...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담아, 어떻게든 소리쳤다.

" ...감,사해요. 정말로, 정말로 감사해요. 저를, 낳아주셔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로서... 태어난걸, 그러니까. 흑. 흐윽. 아아, 아아아……!"

그렇게 나는 울었다.

도망쳤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바보 같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계속해서 울었다.

지윤이에게 떠밀린 아버지가 나를 품에 안아줄 때까지.

나는 계속 그렇게 울었다.

_______________

에필로그

_______________

그 뒤로 나는 아버지의 차로 함께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차안에서는 지윤이가 내가 운 것에 대해서 놀렸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현생에 이렇게나 크게 울어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고 해야 하나.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땐 곱슬이나 윤아, 상혁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딱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청이 선배의 맑은 눈에 무심코 줄줄 이야기해버릴 뻔했지만 그저 '잘해결됐어.'라고 짧게 이야기해줬을 뿐이다.

그때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선 아직 조금 앙금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지만, 나머지 멤버들도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는 듯. 그저 다행이라는 듯이 옅게 웃어왔다. 참 오지랖도 넓은 녀석들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 달라진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나나 아버지나 도망치는 것에만 익숙해서 그다지 크게 달라진 것은 느낄 수 없었지만 분명 '조금'은 달라졌다.

바로 지금처럼 TV를 시청하고 계신 아버지의 옆에 내가 태연한 모습으로 앉을 정도로. 아버지는 조금 놀란 것처럼 살짝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무심코 조금은 재밌게 느껴졌다.

어색한 듯 몸을 굳히고 있는 아버지를 슬며시 바라본 나는 그저 가만히 TV를 시청하는 척 하다가 마치 흘려 말하듯 아버지를 향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 아버지."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리셨다. 아직도 나와 대화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 술버릇, 고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뒤.

나는 토요일 아침까지 느긋하게 집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다.

<終>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