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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공략당해 버렸다-15화 (15/153)

15화

수연은 길을 걷고 있었다.

막연한 마음으로 계속 길을 걷고 있었다.

애초에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학교에 가기도, 호텔로 가서 잠을 자기도 어중간했다. 거기다 그런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싶었다.

어두운 새벽에 밖으로 나온 수연은, 마을을 빙빙 돌며 계속 걸어 다녔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걸었던 터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걸로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 아냐. 이게 옳아.'

여태까지 계속 거부해왔다. 외면 받는 것은 익숙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평소와 다르다보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태까지 수연이 했던 거부는 '이미 다가오기 전'에 했던 거부다. 애초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 새벽, 자신이 상혁의 집을 빠져나온 것은 그런 것과 달랐다.

말하자면 '배신'이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인 윤아와 '친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곱슬이와 상혁을 버리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다가오기 전에 거부'한 것이 아닌 '다가와서 받아들인 것'을 내쳐버린 것이다.

아팠다. 솔직히 울고 싶을 정도다.

지윤이도 그랬다. 갑자기 다가와줘서 당황하긴 했지만 마음 속 깊이는 예전의 지윤을 생각나게하여 기뻐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지윤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묘소에 가게 된다면 모든게 잘 해결될 것같은 마음도 들었었다.

' 겁쟁이... 인가.'

기뻤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자신의 행복을 찾다가 지금 멀쩡히 있는 가정을 부술 것만 같아서. 애써 평행선으로 유지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기에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결국 이번에도 도망치고 말았다.

친구를 버리고, 친해진 이들을 외면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봐준 동생을 뿌리치고. 그렇게 한 것이 지금 이 꼴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좀비처럼 돌아다닐 뿐.

족히 대 여섯 시간정도는 계속 걸어 다닌 것 같았다. 아무리 월등한 체력을 가진 수연이라고 할지라도 슬슬 좀 지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쉬어볼까-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무언가 주변의 풍경에 이질적인 것이 느껴졌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시내의 한복판 이었다. 주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연의 눈에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군대 군대 돌아다니는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일반적인 회사원이나 이런 걸로 보기엔 지나치게 수상했다. 어느 회사원이 벨트에 무전기를 걸고 다닌다는 말인가. 저건 회사원이라기 보단 '경호원'의 모습이었다.

' 요 근처에서 영화촬영이라도 있는 건가.'

수연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연예인이 뭔가 촬영이라도 하고 있다면 저렇게 경호원들이 여럿 보이는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수연은 더 이상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계속해서 걸을 뿐이었다. 이 혼란스런 마음이 조금은 달래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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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은 지금까지 당당하고 건방지던 모습과는 다르게 힐끗힐끗 눈동자를 굴리며 조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달리는 자동차의 안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타고 있는 것이 뭐가 어때서?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자동차가 보통 자동차가 아니라고 하면 어떨까.

그것도 영화에서 미국 대통령이나 탈법한 자동차라면 말이다. 케딜락 리무진이던가, 그런 이름을 떠올리며 지윤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장한 자신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면역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곱슬이의 경우엔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차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투닥거리고 있었지만 딱히 긴장한 모습은 없어보였고, 윤아와 상혁은 비교적 익숙한 모양새였다.

' 대체 정체가 뭐야, 저 사람은.'

윤아가 갑자기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땐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상혁이 집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한대의 기다란 차의 모습에 깨끗하게 사라졌다. 거기다가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이 금발의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외국인이었던지라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당황해버렸다.

금발의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심 청'이며 지윤에게 직접 '안녕?'이라고 말했지만 지윤은 자신도 모르게 '헬. 헬로우.'라고 대답해버렸다. 이것은 절대로 비밀이다.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어.

지윤이 그렇게 현 상황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결심을 하는 동안 심청과 상혁, 윤아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 우선 아버지께 부탁해서 아는 경호업체의 힘을 좀 빌렸어. 그리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지만. 이정도만 해도 위치정도는 알 수 있을 거야."

" 청이 선배 고마워요. 갑작스러웠을 텐데."

" 괜찮아♪ 수연이는 우리 인당부의 마스코트이기도 하고."

금발의 여성, 심청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상혁과 윤아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정은 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한번 수연을 놓아준 후, 다시 쫓아가서 잡는다. 애니메이션이나 그런 것은 잘 알지는 못하는 심청이지만 대충 어떤 방법인지는 알 수 있었다.

흔들고 흔들어서 생긴 마음의 빈틈을 이용해 설득을 하려는 것이겠지. 심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될까. 이건 윤아와 상혁이 때랑은 또 달랐다. 하지만 심청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수연과 만난 지 겨우 5일이 되었을 뿐인 자신들보단 계속 수연을 보아온 여동생이 제시한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 자, 그럼 슬슬 다들 준비운동이라도 하도록 해."

" ...준비운동이요?"

심청의 말에 상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상혁의 얼굴을 내심 귀엽다고 생각하며 심청은 빙그레 웃었다.

" 너희들이 말했지만 지금 수연이는 너희들에게서 도망친 거야. 그런데 갑자기 단체로 짠, 하고 나타나서 너를 다시 만나러 왔어! 라고 하면 수연이가 어떻게 할 거 같아? '나 정말 감동받았어! 이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이럴까?"

" 그게..."

심청의 말에 상혁과 윤아는 말을 잃었다. 수연이가 어떻게 할 거 같냐니. 순수하게 만나서 설득을 하려했던 두 명으로선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고민하는 둘을 바라보며 심청이 빙긋 웃고 설명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그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들려왔다.

자동차를 이리저리 메만지던 적갈색의 긴 곱슬머리를 가진 여자아이로부터.

" 도망치겠지, 뭐. 아주 전속력으로 도망갈걸."

" 어머, 곱슬이는 잘 알고 있구나?"

" 추측일 뿐이야. 하지만 그럴 것 같아. 그 녀석 점심시간에도 너희들 귀찮다고 뿌리치고 도망가는 녀석이야. 말로 설명하거나, 대화하기 싫을 땐 그냥 몸부터 빼버린다고. 오늘만 봐도 모르겠어?"

곱슬이의 말에 윤아와 상혁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으니까. 아니, 누구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만나 말을 걸어오면 분명 도망칠 것이다. 수연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 곱슬이의 말처럼 수연이가 너희들을 만나 순순히 그 자리에서 대화를 할 가능성은 낮아. 분명 도망치겠지. 그렇다면 도망치는 녀석을 따라잡아야 하잖아?"

거기까지 말한 심청은 차 안에 놓여있던 아이패드를 꺼내들었다. 화면에는 현재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지도가 표시되고 있었다.

" 너희들도 알다시피 수연이의 운동능력은 엄~청나게 뛰어나. 단체로 쫓아가면 따라잡기도 전에 이리저리 자멸해서 실패하게 될 걸?"

" 그 말은……."

" 이어달리기 알지? 수연이를 계속 몰아넣어서 순서대로 막아서는 수밖에 없어. 말하자면 퇴로를 하나씩 잘라내는 거지. 지금 경호원들에게서 들은 바로는 마침 수연이가 움직이는 방향이 우리 유연고등학교 통학로 부근이거든."

유연 고등학교의 통학로는 길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사실 거의 그 부근으로 들어서면 유연 고등학교까지 직선이다. 도망칠만한 곳이 없었다.

" 청이 선배의 말은 즉, 저희들이 한명씩 도망칠만한 곳에서 기다리다가 몰아넣어 잡자는 거죠?"

" 정확히는 순서대로 몰아 넣는게 중요하지. 물론 도중에 수연이가 포기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아무튼 그럼 누가 먼저 러닝!을 할지 생각해볼까?

"

거기까지 말한 심청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 아직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지윤을 부드럽게 불렀다.

" 지윤아?"

" 예,예쓰! 가 아니라 네?"

심청의 부름에 지윤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한 지윤의 시선에 청이 선배는 부드럽게 웃고는 마치 준비해둔 것처럼 종이와 펜을 꺼내 지윤에게 건내 주었다.

" 지윤이가 생각하기엔 어떤 순서로 수연이와 마주치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 거리를 보니 세 명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네 명중에 지윤이가 생각하는 세명을 꼽아서 순서대로 적어줄 수 있을까?"

" 순서라니……."

지윤은 긴장하여 굳어있던 머리를 휙휙 흔들어 애써 정신을 차렸다. 순서. 그래,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처음의 사람이 우선 가장 운동능력이 높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언니를 최대한 지치게 만들고 원하는 길로 몰아넣기 쉬워질 것이다.

두번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제대로 뒤쫓아서 마지막에 있을 직선도로, 즉- 통학로로 몰아야한다. 마지막 사람은... 어떻게든 언니를 붙잡든지 해야겠지. 설득도 해야 할 것 같고.

" 제 생각엔, 처음은 곱슬이 언니. 두 번째는 윤아 언니. 마지막은 상혁 오빠가 될 것 같아요."

" 왜 그렇게 생각하지?"

" 곱슬이 언니는 저번에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꽤 운동신경이 좋구나- 하고 느껴서 처음으로 두었죠. 윤아 언니는 아무래도 설득보단 이렇게 어떻게든 몰아넣는 게 좋을 것 같고. 역시 설득은 언니와는 성별이 다른 상혁이 오빠가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리저리 공감대도 많은 것 같고."

" 흐응."

심청은 그런 지윤의 말에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조용히 웃었다. 푸른 눈동자가 지윤을 부드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몹시 따뜻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풀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지윤을 빤히 바라보던 심청은 빙긋 웃으며 지윤에게서 종이와 펜을 넘겨받았다.

" 지윤이가 생각하는 건 알겠어. 상혁이한테서 예전부터 들어서 알지만- 그거지? 지윤이가 바라는 것은 만화나 그런 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상혁이가 멋지게 설득해주길 바라는 걸까? 남자아이니까 말이야."

" 에, 그런 거야?"

상혁은 멍청하게 되물었고 지윤은 약간 얼굴이 붉어져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그래요. 언니와 최근 많이 대화한 남성이기도 하고. 취미도 비슷하다고 들었고. 뭐랄까, 이럴 때는 만화나 이런 곳에선 남자가 설득하면 반하거나 넘어오잖아요? 딱히 언니가 이 멍청이한테 반한다는 건 아니지만."

" 어이."

지윤의 말에 상혁이 급히 딴지를 걸었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이어지는 심청의 말에 가볍게 묵살되었다. 심청은 지윤이 종이에 적은 순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 이번에는 여동생의 말이 틀린 것 같네. 이건 아니야. 장르가 틀렸어. 지금 수연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란다."

심청은 그렇게 말하며 펜을 들어 지윤이가 적었던 순서를 고쳤다. 처음의 곱슬이는 그대로, 두번째를 상혁으로. 마지막을 지윤이로 했다.

" 에? 저, 전 언니를 마지막에 따라잡을 자신이 없는데요? ...할 말도 없고."

" 틀려."

심청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약간 뚱한 표정으로 있는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긋 웃어왔다.

"네가 아까 이 녀석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수연이와 만난 지는 겨우 5일밖에 되지 않았어. 혼란을 줄 수는 있어도 마음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설득은 할 수 없지. 하지만 지윤이는 다르잖니? 언니를 정말 좋아하고, 계속 지켜봐왔던 지윤이는 분명 마지막에 수연이를 설득할 수 있을 거야."

" ...언니따위 특별히 좋아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지윤은 조그맣게 투정을 부렸지만 이제 와서 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성가신 여동생의 말은 다들 못들은 척했다. 심청은 경호원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수연의 위치를 들으며 운전수에게 부탁하여 차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수연이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인도이다 보니 자동차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 자, 그럼 제일 첫 번째. 곱슬이 달릴 준비 됐니?"

" 되도록 도망가지 말고 대화를 해줬으면 하지만……. 뭐 준비됐어요."

심청의 말에 곱슬이는 크게 기지개를 한번 편 뒤에 자동차가 갓길에 세워지자 천천히 문을 열었다.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보였다.

도망가다 잡히기만 해봐라. 뺨이라도 때려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곱슬이를 뒤에서 바라보던 지윤이 이제야 생각난 것처럼 심청을 향해 물었다.

" ...그런데 이건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데요. -뭐랄까, 언니가 마치 사냥감이 되어버린듯한... 이래서야 언니가 전혀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처음 자신이 생각하던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애니메이션의 스토리와는 상당히 다른 전개였다. 길가에 매복해서 점점 몰아넣어 잡는다, 라니.

" 어머, 그러니? 하지만 지윤이 생각보단 훨씬 멋질 거야. 언니를 믿으렴."

푸른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심청의 말에 지윤은 재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자동차에서 지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곱슬이를 발견하고 도망가기 시작한 언니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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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점점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는 곳곳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계속 마주치니 이상했다.

마치 감시라도 받는 기분이랄까.

설령 이 근처에 누군가가 촬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넓은 지역에 걸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명백히 수상했다.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던 경호원들이 순간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제 갈길을 가듯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지만 그 이동경로가 계속 수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하지만 대체 누가...'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시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던 수연은 시야에 어째 많이 보던 익숙한 것이 보이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적갈색의 긴 곱슬머리. 고양이 같은 눈동자에 고압적인 표정.

저 녀석이 왜 여기?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 순간, 곱슬이도 수연이 자신을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평상시와 같은 모습. 평상시와 똑같은 표정.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왜?

어째서?

수연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분명 그들의 호감을 거부하고 도망쳤다. 관계 따윈 깨져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마주친다면 조금 힘들겠지만 그런대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들을 버렸듯이 그들도 이젠 자신을 외면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적갈색의 긴 머리칼의 소녀는. 자신이 '곱슬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그녀는 변함없는 얼굴로, 도리어 미소까지 띄우며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인사라도 하듯 팔을 흔들었다.

수연은 그것이 점차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걸까. 자신은 이렇게 거부하고 도망쳤는데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어 인사할 수 있는 거지?

자신은 저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지?

생각은 빨랐다. 다가오는 곱슬이를 바라보던 수연은 점차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그녀가 다가오는 게,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졌다. 설마 아직도 수연 자신을 어머니의 묘소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그곳에 데려간다고 그녀에게 무슨 이득이 있기에!

곱슬이의 모습이 수연과 채 몇 미터 안 되는 곳까지 가까워졌을 때, 수연은 결국 곱슬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세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렇게 달려서 도망간다면 뒤쫓지 않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수연은 좀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야! 왜 도망치는 거야!"

빨라?!

수연은 자신이 전력을 다해 도망가고 있는데도 떨쳐지지 않고 뒤에서 쫓아오는 곱슬이의 외침에 몹시 놀랐다. 모든 운동이 그랬지만 달리기도 수연은 언제나 발군의 실력을 냈다. 육상부에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선생님이나 수많은 운동부의 학생들이 권했을 정도다. 자신의 다리는 여자뿐이 아닌, 남자들도 감히 쫓아올 생각을 못했는데.

" 그러는 너는, 왜 이곳에 온 건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길이었지만 그래도 몇몇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하지 않듯, 수연이 외쳤다. 달리면서 말하다보니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조금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 당연한 걸 왜 물어! 네 녀석 찾으러온 거 아니겠어!"

" 대체 왜, 전혀 그럴 필요 없잖아!"

그럴 필요 없다. 그녀가 자신을 쫓아 이곳에 올 이유 따윈 없었다. 수연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비난하고 원망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쫓아올 줄은 몰랐다.

이제 겨우 5일이 되었을 뿐이다. 오랜 인연으로 얽혀있던 것도 아니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우연히 말을 트고 함께 동아리에 들어간 그런 사이일 뿐이다.

이렇게 자신을 쫓아 달려올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 네가-! 먼저 나를 도와줬잖아! 동아리까지 안내해주고, 상혁이를 만나게 해주고! 그러니까 단지 도울 뿐이야!"

" 이런 건 도움이 아니야. 나를 어머니의 묘소로 데려갈 생각이야? 아버지와 만나게 할 생각인거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서! 멋대로 쫓아와서는 멋대로 하려하다니. 대체, 왜. 네 녀석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내가 어머니의 묘소에 가건 말건. 아버지와 대화를 하건 말건.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텐데.

" 몰라! 그딴 거. 나는 단지 너를 붙잡을 뿐이야. 네 동생이 부탁했다고!"

" 알고 있었지만 넌 정말 바보네. 양아치야! 구제할 도리 없을 정도로!"

" 그래, 난 양아치고, 바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할거다. 너를 잡아서 멋대로 끌고 갈거라고!"

수연은 그런 그녀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곱슬이는 빨랐다.

아무래도 계속 아침부터 걸어 다녔던 게 체력에 문제를 준 모양이었다. 계속 이렇게 달리기만하면 곱슬이에게 잡힐지도 몰랐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자 몇 가지 길이 보였다. 하지만 가까운 길들은 그 수상한 경호원들에 의해 막혀 있는 곳이 많아서 기각하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할까. 수연은 다리 위를 달려가다가 문득 아래쪽을 봤다. 그래, 저쪽이면 쫓아오지 못하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수연은 지체할 것 없이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주 높지는 않아도 6미터는 되는 높이다. 쉽게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마치 바람처럼 몸을 날려 근처의 나뭇가지를 잡아 한 바퀴를 회전한 뒤에 착지해서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다.

그런 수연의 모습을 뒤에서 따라오며 바라본 곱슬이는 발을 멈추고 아래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곱슬이 입장으로선 갑자기 수연이 자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 ……우와, 인간이냐."

저것은 차마 곱슬이도 시도해볼 수 없었다. 할 수 있고 하지 못하고를 떠나서 아무 장비없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무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저기로 가려면 다리를 삥 돌아 내려가야 하니 이미 수연을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검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곱슬이는 뭐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 어차피 저쪽으로 보내려 했으니 잘 된 건가? 계집애 겁나 빠르네, 진짜."

그렇게 중얼거린 곱슬이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간만에 달리기를 하니 몹시 배가고파졌다.

" 하아……."

반면 곱슬이를 어떻게든 따돌린 수연은 애써 한숨 돌리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곱슬이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건지는 몰라도 찾고 있는 게 곱슬이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윤이나 윤아, 상혁이까지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던 수연은 문득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만 상혁이가 수연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자신을 데려가려는 것일까.

" 너도 나를 데리러 온 걸까?"

" 응."

수연은 점차 다가오는 상혁의 모습에 뒷걸음질 치며 점점 거리를 벌렸다.

" 나를 묘소로 데려갈 생각인 것이겠지?"

" 그래."

" 최악이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너의 바보같은 머리로도 이해가 될 텐데?"

그래.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윤아나 곱슬이라면 수연 자신을 무작정 어머니의 묘소로 끌고 가 아버지와 만나게 하려고 한다하더라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하고 넘어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혁은 달랐다. 분명 어제 자신이 아버지와 무슨 관계인지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자신을 위해 이렇게 쫓아와 주었다고 한다 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 알아."

" 남의 가정이라고 멋대로 굴면 안 되지. 아버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랑했어. 내가 너에게 이야기했듯이 그런 '버릇'을 만들 정도로. 그런데 이제 와서 어머니의 묘소로 만나러 가면, 부드럽게 진행이 될까? 그럴 거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니?"

" 그렇다면 너는 계속 도망칠 거잖아. 언제까지나, 계속 영원히!"

" 설득하려하지 마. 네 말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일 뿐이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말을 하는 수연의 눈에 처음으로 분노가 맺혔다.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덮친 스트레스가 점점 밀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차갑고, 고요한 사람이라도 인간인 이상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 수연이와 같이.

오히려 계속해서 억누른 만큼 그 분노는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 무엇으로 나를 설득하려하는 것일까. 언제나 말하던 것처럼 중학교 때 조금 외톨이 취급받은 것으로? 그건 그래봐야 3년이야. 대체 너에게 뭐가 있어서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거지? 무엇으로 나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걸까. 겨우 5일쯤 이야기한 정도로 나의 뭘 알지?"

" ……몰라."

차가운 분노로 가득한 수연의 말에 상혁은 답했다. 그래, 모른다. 전혀 모른다. 수연이 어떤 아픔을 가진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자신들이 수연을 이끌고 묘소로 가는 게 맞는 일인지도! 상혁은 무엇 하나 모른다.

" 몰라. 아무 것도 모른다고! 그래, 아무것도 모르지. 겨우 5일 됐을 뿐이고. 윤아와 달리 난 너랑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그저 너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학생에 불과하겠지."

" 잘 알고 있네. 그래서 나에게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나?"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모습에 상혁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자신의 말은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설득이라, 애초에 설득할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심청이 자신을 이곳에 내려주며 말했었다. 처음의 곱슬이는 수연의 몸을 지치게 할 거라고. 그리고 두 번째인 자신은 마음을 지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세 번째인 지윤이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피곤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설득'은 자신이 아닌, 수연을 가장 오래 알아온 지윤이가 할 것이다.

" 너의 아픔은 몰라. 하지만 너와 비슷한 눈을 한 녀석은 알고 있어."

비슷한 눈?

그것은 차갑다는 뜻일까, 아니면 무감정하다는 걸까. 수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만큼은 상혁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 ...너는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윤아가 그러했어."

윤아가? 수연은 뜻밖의 이름에 당황했다.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식을 정도로.

" 처음부터 외면 받았던 너와는 다르지만. 윤아도 그런 때가 있었어. 정말 좋아하던 것을 모조리 부정당하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나락 끝에서 허우적거리며 절망하는 모습에 윤아의 마음은 분명 한번 부서졌었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현실이 단번에 산산조각 나버렸으니 그럴 만도 해."

마치 너처럼.

상혁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계속 외면했어. 윤아도 너처럼 계속 도망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며 이렇게 있어도 좋은지 계속 고민했지."

거기까지 말한 상혁은 똑바른 시선으로 수연을 직시했다. 그 시선에 수연은 재차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윤아는 어떻게든 극복했어. 그래서 지금의 윤아가 있는 거야. 나는 그래서 생각해. 옆에서 윤아를 계속 봐온 나이기 때문에 단지 '생각'할 뿐이야. 너도 윤아처럼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지 않을까하고."

거기까지 말한 상혁은 앞으로 걸어갔다. 수연은 점점 뒷걸음질 쳤다. 극복한다, 극복한다고. 그런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윤아는 윤아고 자신은 자신이다.

윤아가 했다고 수연 본인도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 몰라, 너는 몰라. 아무 것도 모르잖아."

" 아아 몰라. 너의 아픔도 윤아의 아픔도 몰라. 난 계속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니까."

상혁은 계속 수연을 향해 다가갔다. 수연이 차갑게 말을 해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상혁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수연은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상혁의 의도가 이것이라면 분명 성공한 것이다.

수연이 봤을 때 윤아는 상혁이에겐 조금 솔직하진 못해도 착한 아이였다. 자신과 같은 '공포'나 '거절'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더이상 이곳에서 상혁과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수연은 아까처럼, 그저 도망쳤다.

상혁에게서 등을 돌리고 달렸다. 어디로 갈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그런 수연의 뒤를 상혁도 아무 말 없이 쫓았다. 그런 상혁을 수연은 알고 있었다. 곱슬이와는 다르게 상혁은 그리 달리기가 빠르지는 않았기에 점점 멀어져갔지만 수연은 그가 따라오려고 했었다는 것은 알았다.

왜, 무엇 때문에 따라오려고 한 것일까.

자신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박수라도 칠만큼 큰 성과였다.

평상시라면 이리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어제부터 계속 고민하고 방황한 탓에 이정도로 정신이 무너져버린 것 같았다.

이젠 정말 쉬고 싶었다.

등뒤에서 따라오던 상혁은 보이지 않았다. 수연도 달리던 속도를 점점 늦추고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세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유연 고등학교의 통학로였다.

이 길을 걸어 다니기 시작한 것도 5일밖에 되지 않았지.

수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5일이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겨우 5일이다. 십 칠년간 모아온 인내를 이렇게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데에 걸린 시간이 5일인 것이다.

터무니없이 짧았다.

겨우 5일, 과거와 조금 다른 생활을 한 것만으로 이렇게 흔들렸다는 건가. 수연은 멍한 눈으로 조금 멀리보이는 유연 고등학교를 응시했다.

그렇게 유연 고등학교를 응시하기를 체 몇 분.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상혁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가볍고 윤아나 곱슬이의 것이라 하기에도 너무 작은 발소리였다. 일부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다가오는 게 아님에도 그 발소리는 조용조용하고 차분했다.

고개를 뒤로 천천히 돌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어깨위로 너울거렸다. 수연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자신과 닮은 흑발을 지닌, 아직 어려보이는 작은 소녀였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은 소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닮은 소녀.

" 너도 언니를 잡으러 온 거니?"

" 그래, 정답이야 언니. 상이라도 줘야하나?"

밉살스런 말투다. 수연은 내심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일까 하고 생각하니 속으로 실소가 나왔다.

" 넌 나를 못 잡아."

" 알아. 하지만 내가 언니를 잡을 수 있다면-."

언니는 어머니의 묘소에 가야 될 거야.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야 되겠지. 지윤의 말은 수연에게 그렇게 들려왔다. 아마 모두가 이렇게 자신을 잡기위해 달리고, 동분서주한 것도 지윤의 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곱슬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윤의 부탁이라서 자신을 붙잡는다고.

" 넌 아직 어려. 내가 그곳에 간다면 어떻게 될지 아는 걸까? 아버지가 얼마나 나에게서 어머니를 투영하고.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르잖니?"

" 알아."

수연의 말에 지윤은 담담히 답했다. 감정의 고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감정한 음성이었다.

" 언니가 금요일부터 토요일 저녁, 또는 일요일까지 왜 들어오지 않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그리고 아버지가 얼마나 언니의 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지도 잘 알아."

" ...어떻게."

예상치 못한 말이었을까, 수연의 눈이 조금이나마 크게 떠졌다. 그런 수연을 가만히 바라보며 지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언니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계속해서 외면했어. 그에 반면에 나는 계속 가까이서 지켜봤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언니의 친어머니의 묘소에 가게 됐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것도 나였어."

거기까지 말한 지윤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수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차갑게 이야기했다.

" 외면하고 도망쳤을 뿐인 언니가 나보다 아버지를 잘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

무서웠다.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향해 차갑게 이야기하는 동생의 말이 난생처음으로 너무나 무섭게 들려왔다. 지윤은 그런 수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무릎을 굽혀서 자세를 잡았다.

전형적인 달리기 자세였다. 수연은 그런 지윤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응시했다. 그런 수연의 시선을 알았던 것일까, 지윤은 차분하게 말했다.

" 지금부터 언니를 잡을거야. 언니는 보나마나 도망치려 할 테니까 내가 따라잡아서 잡아낼 거야. 나에게서 도망치면 오늘은 그냥 돌아갈게. 하지만 내가 잡는다면 언니는 나와 함께 묘소, 즉-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

지윤의 눈이 도전적으로 빛났다. 수연은 그런 동생의 시선에 애써 등을 돌렸다. 도망친다. 그래, 여태까지처럼 나는 도망친다. 지윤이 자신을 따라잡을 턱이 없었다. 애초에 신체의 스펙부터가 달랐다.

오늘 하루종일 걷고, 달려서 지치긴 했지만 따라잡힐 정도는 아니다. 지윤의 운동신경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적에 제대로 달리지 못해 늘상 넘어지고. 울기만 하던 어린 아이.

" 갈거야, 언니. 도망칠테면 도망쳐봐."

" 그래, 하지만 그 말 후회할 걸."

애써 태연한척 가장해서 수연은 이야기했다.

" 후회하는 건 언니겠지."

하지만 그런 수연의 말을 지윤은 가볍게 코웃음치고 받아넘겼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그 잠시의 정적 속에서 지윤과 수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발을 힘껏 박찼다.

빨랐다.

지윤은 이를 꽉 깨물었다. 역시 언니는 빨랐다. 어린시절과 같이 지윤은 언니의 등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계속해서 걸어 다녔을 텐데.

잡히지 않기 위해 계속 뛰어 다녔을 텐데.

정신이 한계까지 몰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수연과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멀어지지 않은 것 만해도 다행이었다. 언니는 앞서 달려가고 자신은 뒤를 쫓는다.

마치 어린 시절의 모습과 같았다.

다만 그때 바라보았던 언니의 등은 무척이나 든든하고 당당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언니의 뒷모습은 애처로움과 나약함만이 느껴졌다.

그것이 못내 슬펐다.

어린 시절의 언니는 지윤의 우상이었다. 아버지와 외면한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언니는 무얼 하든 완벽하게 해냈고 자신만만한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챙겨주던 상냥한 언니이기도 했다.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운동회에서 가족간의 달리기가 있었다. 언니와 자신이 발을 맞춰 달려가는 그런 경기였다. 언니는 달리기를 무척 잘했기에 지윤은 짐이 되지 않도록 그날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운동회에서 연습한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도 못하고 넘어져 발을 접질렸다. 억울하고 자신이 한심해서 울고 있던 지윤에게 수연은 어떻게든 달래고 기다리며 업어서라도 결국 결승점에 골인했다.

결과는 당연히 꼴찌였다.

하지만 수연은 끝까지 해냈다면서 지윤을 다독이고 안아주었다. 칭찬해주었다. 수연은 그런 언니였다.

지금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그런 언니가 아니었다.

달렸다.

폐에 숨이 한계까지 차올랐다. 언니와의 거리는 좁혀지는 것같지 않았다. 하지만 달렸다. 계속해서 달렸다.

언제나 언니의 등을 뒤쫓기만 했다. 계속, 줄곧 쫓아왔다. 그곳은 너무나도 멀고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지윤의 앞에 있는 것은 영원히 멀 것으로만 느껴졌던 수연의 등이었다.

하아, 하아, 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자신의 것인가 했다. 아니, 자신의 것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언니의 것도 섟여 있었다. 숨이 차고 몸이 한계에 몰려 언니의 몸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지윤의 다리도 한계였다. 이제 그만달리고 싶다고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달릴 수 없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따라잡지 못했던 등이 눈앞에 있었다.

영원할거라 생각했다.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근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게 단정 짓고 살아왔다. 언제나 인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완벽했기에 다가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앞의 수연은 지쳐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 난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역시 언니도 인간이었다.

영원할리가 없었다.

자신이 무심코 그리 단정 지었을 뿐이다.

지윤은 뛰었다. 두 다리를 힘껏 힘을 주고 달리는 게 아닌 '뛰었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등을 꽉 껴안았다. 지윤이 등 뒤에서 매달린 충격으로 넘어진 수연은 지윤과 함께 데굴데굴 굴러 쓰러졌다.

일어날 기력 따윈 없었다.

" 잡...혔네."

수연은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뒤를 따라오던 동생이었다. 특히 달리기를 못하고 울기 일 수 였던 착하고 여린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자신을 따라잡아 이렇게 바닥에 함께 굴렀다. 아아, 이젠 정말 끝이네. 도망칠 수 없구나.

수연은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푸르던 하늘은 점점 어둑어둑해져가고 있었다. 묘소에 가는 것은 이미 늦어버린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던 수연은 자신의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서인지 흙투성이에 상처도 이곳저곳 있었다.

언제까지나 뒤에 따라오던 여동생. 지금은 자신을 따라잡은 그런 당당한 여동생이 자신을 바라봤다.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애써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 바-보."

지윤은 어물거리는 음성으로 수연을 향해 말했다.

" 것봐 따라잡혔잖아. 잘난 척하기는……."

수연은 그런 여동생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저 울고 있는 자신의 동생을 조심스레 껴안아 줄 뿐이었다.

" 그러네. 바보같이 잘난 척하다 져버렸어."

" 언제까지나 안 따라잡힐 것 같더니만."

" 그러게. 많이 나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라."

특히 정신적으로. 그런 수연의 말에 지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바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나 당당하던 그 언니는 어디 간 건데.

" 언제나, 언제나 그랬잖아. 어렸을 때는 그렇게나 자신만만했으면서, 뭘 하든 가장 잘하고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먼 곳에 서서 나에게 '언니 정말 최고지!'라고 자랑이나 하고."

" 응."

" 그런데 왜. 언제나 자신만만했으면서 그렇게나 멋졌으면서 왜 그리 쉽게 무너진 거야! 왜 도망치기만 하는거야! 왜 옛날처럼 당당하게 자신이 최고라고 말하지 못하는 거냐고!"

지윤의 말에 수연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내가 자신만만하고 오만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완전히 실패해서 산산조각나 무너져버릴 만큼.

" 미안."

수연이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그 정도였다. 그런 수연의 대답에 지윤은 엉엉 울던 눈물을 훌쩍이며 애써 참으며 이야기했다.

" 나, 봐주는 거 없어. 정말로 지금부터 묘소에 갈 거야. 언니랑 아버지랑 대화하게 만들 거야."

" ……그래."

또다시 두려워졌지만 수연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지윤과의 내기에서 졌다. 그리고 지윤의 말처럼 자신은 지금의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말처럼 가장 잘 아는 것은 지윤이 자신일 것이다.

수연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선 지금은, 자신의 품속에서 울고 있는 연약한 동생을 보듬어 주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손가락 부러질 것같습니다. 오타수정은 좀 쉬었다 할게요...

오타나 문법오류 발견하신거는 꼭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편은 1권 분량 에필로그네요.

으악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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