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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공략당해 버렸다-11화 (11/153)

11화

새 학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맞는 주말이었다. 다행히도 날씨는 무척이나 쾌청했고, 바람도 선선해서 돌아다니기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 상혁이는 학교에 잘 갔겠지."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을 응시하며 윤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월요일까지 재출해야 하는 과제를 놓고 왔다고 했던가. 만약 오늘 곱슬이와 약속만 없었다면 함께 갔을 윤아였지만 이미 약속이 있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곱슬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좋은 자신의 친구. 처음 부실에서 보았을 때는 고압적인 말투나 당당한 모습. 줄여 입은 치마와 염색한 머리 같은 것 때문에 '친해질 수 있을까~.'싶었던 윤아였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수연이는 언제나 곱슬이보고 '양아치'라고 말하며 심한 취급을 하는 편이지만 윤아가 보기엔 어떨까... 그냥 그런 쪽 어울리다 보니 따라갔다고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평범한 아이였다. 학교에서 양아치란 말 그대로 주변의 아이들을 괴롭히고 선생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문제아 같은 이미지이지만. 곱슬이에게선 그런 양아치- 일진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비틀어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고압적이고, 당당했을 뿐이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길가 던 사람에게 쓸데없이 시비를 걸거나(윤아는 몰랐지만 수연이에게 한번 건 적이 있긴 하다), 돈을 갈취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윤아의 입장에선 도리어 곱슬이가 왜 양아치라고 불리며, 여자아이들을 무리로 이끌고 다니는 대장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 너무 일찍 나왔나?"

약속 시간은 열 두시였지만, 현재 시간은 열한시 반. 족히 삼십분은 먼저 나온 것이다. 곱슬이와 만나기로 한 곳은 저번에 모두가 함께 갔던 카페의 입구. 당시에는 곱슬이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이 카페의 위치를 아는 듯하여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람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서 있던 윤아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적갈색의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랬지만, 바람에 날리는 머릿결이 사자의 갈기와도 같이 몹시 용맹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달리, 화장을 하지 않은 곱슬이의 외모는 귀여운 고양이 상인지라 윤아는 그런 곱슬이의 외모를 무척 좋아했다.

" 여기야, 여기!"

팔을 크게 흔들자 자신을 발견했는지 곱슬이가 성큼성큼 다가오며 입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특유의 당당한 미소였다.

" 일찍 나왔네? 나도 꽤 빨리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 별로~. 나도 방금 나왔어."

윤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곱슬이도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곱슬이의 사복 차림은 예상보다 훨씬 단정했다. 교복을 줄여 입거나, 가끔 화장을 하고 학교에 왔기에 옷도 화려하게 입고 오지 않을까-하고 무심코 생각했지만 놀랍도록 수수하게 꾸민 여성스런 옷차림이었다. 가벼운 상의에 하의는 귀여운 스커트를 입은 곱슬이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귀여웠다. 당연히 팬티스타킹 위에 핫팬츠를 입거나 청바지 같은 것을 입고 올 줄 알았던 윤아로선 예상외의 패션이었다.

어쩌면 확실히 자신이 속한 동아리에서 가장 여자력(수연이 왈, 히로인력)이 높은 것은 곱슬이일지도 모른다고 윤아는 무심코 생각했다. 윤아 본인도 원피스를 입고 오기는 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이미지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렇지만, 곱슬이의 경우는 평상시 양아치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가 이렇게 평범하게 꾸민 모습을 보면 무심코 '귀엽다'라고 생각해 버린다.

곱슬이 무서운 아이.

" 윤아야 점심은 먹었어?"

" 응? 아니 아직 안 먹었는데."

새로 사귄 친구와의 첫 외출이니만큼 신경을 쓰다 보니 점심은 먹지 못했다. 그것은 비단 곱슬이도 마찬가지였기에 윤아의 손을 잡아끌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 그럼 내가 이 근처에 아는 맛있는 돈까스집이 있거든. 거기서 먹고 가자!"

여자 둘이서 단둘이 돈까스집이라, 어떨까 생각했던 윤아지만 확실히 배에서 공백이 느껴졌기에 곱슬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오늘 곱슬이와 윤아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다름 아닌 곱슬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금요일 날 헤어지기 직전 윤아를 부른 곱슬이는 뭔가 부끄러운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꼬다가 어떻게든 힘을 내어 힘차게 말했다.

' 그-, 혹시 이번 주말에 옷을 사는 것 도와줄 수 있어?'

그런 것은 혼자서도 상관없지 않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윤아의 모습에 곱슬이는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 ....상혁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난 잘 모르니까.'

소꿉친구인 윤아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곱슬이의 발언에 덩달아 윤아까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여 곱슬이의 말을 승낙했다.

그 정도 도와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확실히 상혁이의 취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윤아가 확실했다. 심지어 상혁이 몰래 자주 컴퓨터 하드를 뒤지는 윤아는 상혁의 성적취향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비밀이지만.

" 그 뭐랄까. 설마 진짜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 응?"

여성용 옷가게가 몰려 있는 시내로 걸어가던 중 곱슬이가 볼을 긁적이며 말해 왔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 윤아는 상혁이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내가 상혁이에게 고백했으니 영락없이 거절당할 줄 알았어."

" 거절당할 줄 알면서 부탁한 거야?"

" 그래도 궁금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행히도 정답이었던 모양이지만, 하고 곱슬이는 빙긋 웃었다. 변함없이 당당한 미소였다. 그런 곱슬이를 보며 윤아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만약 과거의 자신이 곱슬이 같이 당당하고 고압적인, 그러한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 괜찮아. 난 상혁이의 선택을 존중하니까. 그리고 곱슬이도 좋아하고."

물론 상혁이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윤아는 알고 있었다. 도리어 지금과 같이 소꿉친구로 있다는 것만으로 솔직히 감사했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굳이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윤아는 지금 상황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 으, 크으. 어째서 수연이 녀석이 너에게 힘을 못 쓰는지 알 것 같아."

청이 선배도 그렇지만 곱슬이와 수연이에겐 둘의 찬란하기 그지없는 순진한 눈망울은 아무래도 상처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간단히 설명해서 언데드에게 힐을 주면 강력한 타격을 주는 것 처럼!

그렇게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걸어가던 둘의 시선에 익숙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검고 긴 아름다운 흑발. 뒷모습뿐이었지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고 분위기였다. 옷차림도 수연이와 몹시 흡사했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 쭉 뻗은 다리를 감싸는 팬티스타킹. 뒷모습은 누가 봐도 수연이 그 자체였다.

수연이도 거리에 나온 걸까?

윤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리 생각하는데 곱슬이는 눈앞의 소녀를 수연이 인지 아닌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미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 야, 이수연... 어라-?"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수연이로 추측되는 소녀에게 곱슬이는 손을 뻗다가 멈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작 가까이에 와서 보자, 수연이라고 추측됐던 소녀는 자신보다 족히 머리 한개는 작았던 것이다.

수연이와 자신의 키가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의 소녀는 절대 이수연일 수 없었다. 하지만 곱슬이의 손은 이미 뻗은 상태였고, 급히 멈추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치여 수연이와 닮은 뒷모습을 가진 소녀의 어깨를 덥석,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곱슬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팔이 꺾이고 시야가 반전하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한번 느껴 보았던 그것. 여자 탈의실에서 수연이에게 당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저번에는 상혁이를 생각하느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꺾인 팔을 풀어내며 공중으로 넘어가던 몸의 중심을 바로잡고 한 바퀴 돌아 착지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곱슬이는 신체 능력에는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땅바닥에 구르는 것이 수순이었겠지만 곱슬이는 마치 체조 선수처럼 깔끔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오오~하고 박수를 쳐주었기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보다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수연이가 했던 기술이라면 이리 쉽게 풀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수연이보다 미숙했고, 그랬기에 곱슬이는 능숙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곱슬이와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얼굴은 그런 곱슬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찡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수연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머리 스타일만 비슷할 뿐 수연이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닮은 점도 분명 있었다.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나, 차가운 눈동자가.

" 위험하잖아, 길거리에서 그런 것을 걸면."

" 그쪽이 먼저 갑작스레 제 어깨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걸요."

당돌한 여자아이였다.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대중으로 봤을 때 대략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아이 정도로 보였다. 곱슬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고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곱슬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곱슬이와 소녀의 사이로 황급히 달려온 윤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 저기, 미안해. 친구랑 뒷모습이 닮아서 착각했거든."

" ...친구랑 착각 했다고요?"

" 으응, 우리 친구중에 이 수연이라고 있는데 너와 같이 검고 예쁜 생머리를 하고 있거든. 옷차림도 비슷해서 헷갈렸어."

윤아는 어색하지 않은 말투로 '이 수연'이라는 이름을 흘려보냈다. 외모는 닮지 않았지만 왠지 이 소녀가 수연이와 몹시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곱슬이는 곱슬이데로 이 소녀가 수연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탓에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예상하는 것은 이 소녀가 수연이의 여동생일 가능성이었다. 외모는 좀 달랐지만 그것 외에는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았다.

소녀의 변화는 무척이나 알기 쉬웠다.

윤아가 '친구인 이수연'이라고 말하자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자신과 비슷한 머리와 옷차림이라고 하자 입가가 살짝 벌어졌다. 말하자면 '크게 놀란'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소녀는 아까 전보다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 거짓말."

날카롭게 부정해 왔다. 하지만 윤아와 곱슬이로선 거짓말이 아니었으니 재차 거짓말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소녀의 입에서 무척이나 당연한 걸 이야기하는 듯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 언니에게 친구라는 게 있을 턱이 없잖아요."

저런 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수연이의 여동생인 것 같다고 곱슬이와 윤아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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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짱 커.

나는 무심코 눈앞에 있는 저택을 보며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어쩌다 보니 주말의 행복한 부실 라이프는 물 건너 가 버렸지만 이러저러해서 상혁이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크으, 이 녀석 말빨이 능숙해. 완벽하게 설득 당하고 말았다. 토요일엔 집에 들어가기는 싫었으니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달 까. 일요일은 평상시엔 돌아갈 때도 있고 주말 내내 쭈욱 밖에 있던 적도 있긴 했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특히 이번 일요일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뭐, 평상시의 다른 일요일이라면 돌아갈 때도 있고 기분에 따라 밖에 있을 때가 있지만.

사실 토요일만 지나면 아무래도 좋다.

그나저나 상혁이 이 녀석 의외로 잘살잖아. 집도 아파트가 아니라 저택이다. 그것도 2층 구조의. 집 크기도 상당히 크고, 상혁이가 이 정도인데 청이 선배는 얼마나 잘사는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런 부르주아들.

" 혹시 들어가면 너와 나 뿐 인건 아니겠지?"

내가 날카롭게 물어보자 상혁이는 고개를 급히 흔들었다.

" 설마, 우리 부모님은 해외로 출장 중이시긴 하지만, 윤아의 아버지가 계실 거야."

정말로 윤아하고 같이 사는 건가. 하기야 이렇게 큰 집이면 두 가족이 살만큼 크기는 하다. 하지만 어째서? 혹시 윤아는 상혁이의 집에 세 들어서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상혁은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상아빛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아무렇게나 정리된 우리 집 현관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이게 평범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호화로운 저택에 사는 사람과의 차이인걸까. 갑작스런 빈부격차가 나의 어깨를 눌렀다.

괜시리 조심스러워져서 조심조심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깔끔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TV와 맞은편에 놓인 소파. 벽에 장식된 그림 등으로 집안이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런 집에서 살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혼할래?"

" 무…….무무무슨?!"

" 농담이야."

"....너 말이야."

아무튼 가슴 설렐 정도로 멋진 집인 것은 사실이다. 집안을 보는 것만으로 가풍이 나타난다는데 확실히 그런 모양이다.

어째서 이런 집에 상혁이같은 녀석이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 그러니까 그런 말은 속으로만 해 달라고."

실례.

내가 그렇게 집안을 두리번거리고 상혁이는 그런 나의 옆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옆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느리지만 묵직한 걸음 소리는 성인 남성의 그것이었다.

" 숙제는 제대로 가지고 왔니 상혁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군. 이건 또 예쁜 여학생이네. 상혁이는 우리 윤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거실로 천천히 걸어 들어온 사람은 머리가 약간 하얗게 센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상혁이를 바라보며 마치 놀리는 것처럼 짓궂게 말해 왔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나는 그런 그의 말투보단 다른 것이 신경 쓰여 제대로 그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그 '윤아의 아버지'로 추측되는 남성은 오른팔이 있어야 할 곳에 이질 적인 무언가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백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팔이 아닌 금속으로 이루어진 이질 적인 것.

" 음? 아아, 이것이 신경 쓰이는 건가."

윤아의 아버지는 자신의 왼팔로 오른팔에 있는 그것을 들어 보이며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곤 몹시 진지한 얼굴로.

" 이게 말이지 사실 비밀인데."

진지한 얼굴로,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는 그 차가운 금속을 쓰다듬으며 나에게 말해왔다. 마치 말해서는 안 될 비밀을 말하는 사람과 같이.

고요한 눈으로 나의 눈을 마주쳐 오며.

" '오토메일'이라 하는 물건이다."

" 그냥 의수잖습니까 아저씨! 그런 걸로 계속 장난치면 윤아한테 이를 겁니다?"

" 네, 네 녀석 너무 비겁하잖아! 딸아이를 빌미로 협박하다니! 그냥 장난이라고 장난!"

어이. 순간 진지해졌던 내 마음에게 빨리 사과해.

" 그럼 편히 쉬고 있도록 하렴."

뭐 아무튼 윤아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유쾌한 분이셨다. 한쪽 팔을 잃기는 했지만 마음까지 잃은 것은 아닌 듯 아저씨는 나에게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 뒤에 간식이라도 내올 생각이신지 부엌 쪽으로 사라지셨다.

" 저기 말이지."

" 응?"

가만히 소파에 앉은 나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벽을 기대고 앉아 있던 상혁을 향해 조금 주저하며 물었다.

" 윤아는 이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있는 거야?"

" ...뭐어 그렇지.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서, 집을 살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집 2층에서 세들 어 살기로 하셨거든. 우리 아버지와 윤아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기에 친구의 어려움을 두고 볼 수 없으셨달 까- 그런 거지."

이런 저런 사정이라. 그건 아마 윤아의 아버지의 팔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뭐 됐어, 어차피 남의 집안 사정이다. 이제 제대로 만난 지 5일밖에 안된 시점에서 그런 것을 참견하기엔 그야말로 민폐다.

상혁이도 그런 점을 헤아려 줘서 부실에서 자고 있던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았을 테고.

분명 궁금했을 터인데도 묻지 않았다. 아마 내 가정 사정이라는 것을 물어 상처라도 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일까. 오타쿠 주제에 눈치도 빠르고 다정한 구석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녀석이 왜 친구가 없는 것인지는 그야말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중학교때 사교성이 핵폐기물급 이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는걸.

" 너 근데 집에라도 연락은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밖에서 묵고 가는 거면."

아무래도 상혁이는 계속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같았다. 바보네 정말. 그런 걸 걱정해 봐야 자기만 궁금할 뿐인데. 하지만 내 주변에서 나를 이렇게 쓸데없이 걱정해 주는 사람은 처음인지라 그렇게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 별로. 동생에게 연락은 해 두었으니 집에서도 걱정은 하지 않을 거야. 아버지는 이유도 알고 있을 테고."

특히 이번 일요일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 그렇다면 뭐. 다행이긴 한데……."

무언가 떨떠름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상혁이지만 그 말처럼 납득을 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넘어가 준다.'라는 반응이랄까. 내가 우리 집에서 연락을 하는 사람은 내 동생뿐이다. 틱틱 거리며 제대로 된 반응은 돌아오지 않지만 여동생의 경우엔 그래도 아직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는 편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텐데도 말이지.

" 그러다 동생이 너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남자 집에서 묵는 것을 들키면 이래저래 말이 많아질 텐데."

확실히 여동생에게는 '오늘도 밖에서 자도록 할 게'라고 보내기는 했으니 내가 남자의 집에서 머문다고는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그래 봤자 부모님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여동생도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것이다.

"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그렇게 단정 지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우리 집의 딱딱한 소파와는 달리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 몸이 나른해 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의 동생이 그녀들과 마주쳤다는 것을.

============================ 작품 후기 ============================

수연이에 대해 떡밥을 던지실 여동생양이 등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동생도 수연이가 왜 변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죠!

사실 주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큰 이유는 아니지만 예전 친구가 격었던 일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있습니다. 그때가 중 2인가 중3인가 그랬는데 지금 수연이와 비슷한 이유로 토요일이면 집에 안들어가곤 했었지욤.

이유는 다음편에 나오고!

이번편은 내용이 내용이다보니 만담이나 개그분이 부족하네요. 어파지 조금있으면 다시 원상복귀 되겠지만요. 1권 마지막 챕터 같은 것이니 수연이가 조금이나마 주변인물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2권 분량에서는 윤아이야기가 좀 나올 것같고... 3권 분량에선 곱슬이가 주 인물로 등장하겠지만 여름방학편! 으로 염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게가 취약하다보니 메인스토리말고 기타 스토리를 쥐어짜다가 멘붕할 지경이에요. 새삼 나친적이나 내여귀같은게 존경스러워졌습니다.

아, 그리고 백합을 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읽은 것은 싫어하진 않아요. 다만 백합은 뭐랄까, 그 커플의 미래를 상상했을때 좀 힘들다고나 할까. 세간의 시선도 있고 나이가들면 언제까지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노말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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