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방과 후, 나는 아직 청소중인 곱슬이와 상혁이를 뒤로한 체 먼저 부실로 향했다. 부실의 위치는 우리 교실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에 있었는데, 그곳은 주로 운동 계열 부서가 많은 탓에 항상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차라리 우리 교실이 있는 건물 쪽에 부실이 있었다면 좀더 조용한 환경에서 부 활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지만 뭐, 덕분에 교무실이나 학생회 실하고도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이라 좋은 점도 있긴 하지만.
드르륵.
창틀 위에 놓여 진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텅빈 부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PC와 플스 등을 몰래 공수하느라 힘들었지만 이렇게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함이 나를 반겨 온다.
자자~. 오늘은 그럼 저번에 사두고 못해 본 러브 레볼루션 ~그녀는 나의 신부~를 해볼 까나. 정발판은 아니지만 일본어를 마스터한 나에겐 한국어로 플레이하나 일본어로 플레이하나 마찬가지다.
" 흐음-."
게임 소프트의 표지를 보니 몇몇 히로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웹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었지, 지나친 H신 유도와 무리한 전개 때문에 욕을 좀 먹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름 최루계 스토리도 들어 있고 무엇보다 메인 히로인이 검은 긴 생머리의 여자아이다! 정확한 스토리나 등장인물에 관한 스토리는 전혀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다.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메인 히로인이 검은 긴 생머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입한 미연시였다.
좋아, 시작 해볼까.
게임 소프트를 플레이스테이션에 집어넣고 게임 패드를 잡는다. 욕을 많이 먹은 게임답지 않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오프닝을 지나, 게임 메뉴가 나왔다. 세이브한 파일이 없으니 CG도, 이어하기도 할 수 없으니 내가 고를 매뉴는 당연히 '처음부터 시작하기'였다.
버튼을 누르자 요즘 게임답지 않게 주인공 이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듯, '플레이어의 이름을 입력하시오.'라는 말이 나왔다.
플레이어 이름이라, 마침 좋은 이름이 하나 있지.
현실에서 직접 미연시를 찍고 있는 '유 상혁'이라는 이름을 카타카나로 적어 넣으려 했지만 이 불편한 일본어는 유 상혁이 유 산혀크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아무튼 좋아, 유 산혀크 너의 힘이라면 여자애 따윈 시작 하자마 공략되게 되어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시작버튼을 눌렀다.
「 새학기 아침 첫날, 나는 귓가에 아른 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을 둥글게 말아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누워 보려 하지만 상대는 용서 없이 내 이불을 걷어가 버렸다.
『유산혀크. 유산혀크. 어서 일어나, 아침이라고! 입학식부터 지각할 생각이야?』
감겨 있는 눈을 애써 뜨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검은 단발머리. 귀여운 인상의 소녀다. 분명 주변 사람들이 백이면 백 귀엽다고 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할 이 소녀는 나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소꿉친구인 토사카 유나다.」
...어라?
소꿉친구 CG를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상. 거기다가 귀여운 얼굴에 맞지 않게 CG에는 커다란 가슴이 강조되고 있었다.
" 어라? 수연이 먼저 와있었구나!"
CG를 심각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나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상을 한소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을 가진 윤아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이, 설마.'
검은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상. 커다란 가슴 정도야 얼마든지 겹칠 수 있지. 이름도 유나라는게 거슬리긴 하지만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을 거야. 우연의 일치겠지.
" 어? 이거 미연시던가? 그거지? 상혁이가 집에서 하는 것 몇 번 보기는 했는데."
" 그래, 메인 히로인이 흑발에 긴 생머리기에 샀어."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윤아는 게임 소프트 표지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크게 갸우뚱하고 기울였다.
" 흐음~. 그런데 이 소프트에서 나오는 여자애들 다들 누구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 닮았다니?"
게임 소프트 표지는 정중앙에 있는 검은 긴 흑발 소녀를 제외하고는 신경 쓰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윤아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익숙하게 생긴 여자애들이 보였다. 예를 들면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상을 한 소꿉친구 소녀, 토사카 유나나. 미국에서 온 귀국 자녀로,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을 한 소녀 시로아메 카구야. 거기다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정체불명의 적갈색의 긴 곱슬머리 소녀까지.
"...흐음."
" 으으음, 좀 많이 닮았네."
덤으로 말하자면 메인 히로인인 검은 긴 생머리 소녀의 이름은 야가미 유키. 날카롭고 무표정한- 무척이나 나랑 닮은 인상의 소녀였다. 이 정도면 우리를 모델로 게임을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 ...뭔가 하기 두려워졌어."
" 난 도리어 궁금해졌는데! 요새 일본어 공부를 좀 해서 대사 정도는 알 수 있어! 어서어서 플레이 해보자!"
어째서인지 윤아가 몹시 의욕만만해진 얼굴로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 갑자기 어째서. 너 미연시 같은거 전혀 관심도 없잖아. 내가 그렇게 빤히 바라보자 윤아는 얼굴을 붉혔지만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재차 크게 소리쳤다.
" 이렇게 게임을 포기하면 히로인들이 불쌍하잖아! 아직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야. 유나도 분명 기다리고 있어!"
아침에 주인공을 깨우는 소꿉친구의 프롤로그CG 한 장만으로 이미 윤아는 감정이입이 백퍼센트 이상 진행된 모양이었다. 뭐랄까, 이 게임을 계속 진행해도 될지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나도 이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 무척이나 궁금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버튼을 눌렀다.
「 입학식에서 길을 잃은 듯한 한 소녀를 우연히 보았다. 검은 긴 생머리, 차가운 얼굴과 눈동자. 마치 남을 거부하는 것처럼,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고고하게 서있는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터무니없는 아름다움에 나는, 스스로를 자제할 세도 없이 지나가는 그 소녀의 손을 잡아챘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물론 게임에서는 유산혀크를 팔을 꺾어 제압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냉정한 태도로 그 손을 쳐낸 뒤에 유산혀크의 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그 차가운 검은 긴생머리 소녀- 유키의 모습이 놀랍도록 나랑 닮아 있어 뭔가 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 너무해! 손을 잡은 정도로 뺨을 때리다니 수연아!"
" 아니, 내가 아니지만..."
넌 그때 분명 플라잉 니킥으로 상혁이의 안면을 후려쳤던 것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뭐 아무튼.
적어도 나는 뺨을 후려치진 않았어. 팔을 꺾어 바닥에 쓰러트리긴 했어도. 그렇게 우리가 진지한 얼굴로 게임을 진행하는데 부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이렇게 들어올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 야, 이 수연. 청소 중인데 좀 기다려 주면 안 되는 거야?!"
" 어머♪ 안녕. 다들 일찍 왔네?"
상혁이는 어딘가를 갔는지 들어온 것은 곱슬이와 청이 선배였다.
" 흐응, 나는 청소 당번도 아니니 너와는 상관없잖니?"
" 그래도 같은 부원인데 좀 기다려-... 어라, 이거 뭐야 게임?"
차갑게 말하는 나의 말에 곱슬이는 성큼 성큼 다가오며 이야기하다가 나와 윤아가 집중해서 하고 있는 게임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화면에 나오는 윤아를 닮은 소녀와 나를 닮은 소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 뭐야? 일본어로 잔뜩 써 있어서 전혀 이해 못하겠어."
다만 우리의 모습을 닮은 캐릭터가 신경 쓰이는지 떨어져 있는 게임 소프트의 표지를 들여다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딱히 설명 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게임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마침 네 가지 선택지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유나의 도시락을 먹는다]
[유키의 도시락을 한번 맛봐도 되냐고 물어본다.]
[자신의 누나가 만들어 준 도시락을 먹는다.]
[세 개를 다 먹어 치운다!]
현재 상황은 건방진 유산혀크가 싫다는 유키를 끌고서 옥상으로 데려와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몹시 불쾌한 상황이었다. 소꿉친구는 평범한 도시락을 지니고 있었고, 유키는 역시 완벽하게 아름다운 도시락을 보유하고 있었다. 건방진 유산혀크 너에게 유키의 도시락은 과분해.
" 수, 수연아. 역시 이럴땐 소꿉친구의 도시락을 먹는게 좋지 않을까?"
" 거절이야. 이런 유산혀크와 같은 종마에게 윤아의 도시락을 줄 순 없어."
이 녀석에겐 상화 누나, 아니 이름도 나오지 않은 유산혀크의 누나가 싸준 도시락을 먹는 것도 황송한 일이지만 선택지가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방향키를 [자신의 누나가 싸준 도시락을 먹는다.]로 내리고 클릭을 하려는데.
" 에잇."
옆에 있던 곱슬이가 방향키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버렸다. 내가 뭐라 말릴세도 없이 화면의 유산혀크는 그야말로 걸신들린 개새끼 마냥 나와 윤아, 아니 유키와 유나의 도시락은 물론 누나의 도시락까지 먹어 치웠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런 유산혀크의 모습을 보며 유나와 유키가 얼굴을 붉혔다는 것이다.
「 『유산혀크...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었잖아...』
유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향해 이야기했고, 유키는 어째선지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나를 위해 도시락을 싸준 두명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 두개를 모두 먹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유나와 유키에게 '맛있었어'라고 말하자 어째서인지 둘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 어째서 거기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유키!"
" 수, 수연아 저기 그러니까. 힘내자?"
너는 또 뭘 힘내자는 건데.
걸신들인 개새끼마냥 도시락을 먹어 치운 유산혀크의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두 명의 호감도가 동시에 올라간 것만 같았다. 이게 다 곱슬이 때문이야. 고개를 휙 돌려 곱슬이를 노려봤지만 정말 건방지게도 곱슬이에겐 나의 차가운 시선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곱슬이는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고압적인 음성으로 그다지 크지 않은 가슴을 내보이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 방금 청이 선배에게 설명 들었어. 이거 그거지? 미소녀 연애... 뭐시기 아무튼 그거. 연애 게임이라고 들었어. 여기 표지를 보니 이 적갈색 머리칼에 아름다운 곱슬머리를 한 여자애와 이루어지는 게 거기의 주인공에게도 행복한 일이겠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히로인과 이어지면 분명 불행해질 것이라 장담한다.
하지만 곱슬이는 일본어도 전혀 모르는 주제에 의욕만만인지 바로 내 옆에 붙어 앉았다. 왼쪽에는 윤아, 오른쪽에는 곱슬이가 앉은 탓에 몹시 불편해지고 말았다. 젠장, 나는 오늘 느긋하게 미연시나 즐기면서 방과후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 참고로 곱슬양의 통역은 내가 할 게♪ 나도 조금 흥미가 있고."
아니 청이 선배. 그럴 필요까진... 하고 말하려 했지만 맑게 빛나는 청이 선배의 푸른 눈을 보자 결국 나는 다시 게임 화면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유산혀크들은 카구야 선배를 돕기 위해 동아리, 영원정에 입부했고. 다음날 유키가 곱슬머리의 히로인을 부서에 데리고 오며 파란이 일어났다.
갑자기 등장하자마자 유산혀크를 향해 당당하게 고백한 것!
" 너, 진짜 개연성 따윈 아무것도 없구나?"
" 이, 이유가 있다니까. 아니 그보다 저건 내가 아니잖아!"
" 변명하지 마."
" 진지하게 노려보지 말고!"
아무튼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산혀크는 2D곱슬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2D곱슬이도 곱슬이는 곱슬이 인지 뻔뻔하게 철판을 깔며 부에 입부해 버리고 말았다. 정말 게임이나 현실이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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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부의 활동이랍시고 단체로 놀러 갔다가 뜬금없이 사람들을 구해 주고 영웅이 되거나. 여름방학이라고 단체로 바다로 놀러 가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체 이 부는 하는 일이 뭐야? 계속 노는 것밖에 안 나오는데.
"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청이 선배."
" 글쌔♪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폐부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튼 바다에 가니 나름 CG에 힘쓴 듯 히로인들의 적나라한 수영복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노출도가 높아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특히-
" 윤아는 고등학생이 맞는 걸까."
" 수, 수연아 저기 저렇게 까지 크진 않아!"
카구야 선배는 심지어 유나보다 더 대단했다. 유키도 나름 힘썼지만 두 명의 가슴 괴물에 의해 조금 침울해진 얼굴이 시야에 들어와서 덩달아 나까지 침울해졌다. 그리고 곱슬이는-.
" 나, 나도 반에서 작은 건 아닌데……. 이제 보니 이상해 이 동아리. 하나같이 가슴이 전부 한국인이 아니야……."
힘내라 곱슬아.
「우리들은 모랫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푸른 바다를 응시하며-.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아아!!』
고개를 돌린 나의 시선엔 갑작스레 일어난 엄청난 해일이 시선이 들어왔다. 그위력은 족히 이 근방 해수욕장을 모두 휩쓸어 버릴 정도. 나는 어떻게든 일행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까이에 있던 유키와 유나를 강하게 껴안았고-, 정신을 잃었다.」
뭐냐 갑자기. 바다에서 평화롭게 비치발리볼하며 놀고 있었는데 해일에 다 휩쓸려 내려가 버렸다. 러브코미디에서 단 한 컷 만에 재난대피 영화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체 이 게임 개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면을 넣은 것일까.
아무튼 해일에 휩쓸려 내려간 유키와 유나, 그리고 유산혀크는 어딘지 모를 외딴 섬에서 정신을 차렸다. 추위에 몸을 떠는 나와 윤아-가 아니라 유키와 유나를 위해 유산혀크는 베어그릴스 뺨치는 생존 능력으로 나뭇가지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 바다에서 생선을 잡아와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대체 평범한 남학생인 유산혀크가 어떻게 나뭇가지로 불을 붙이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은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주인공의 숨겨진 능력이라 생각하며 애써 넘어가기로 했다.
「 어느 덧 세상은 어둑어둑해져 빛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닥불에 따스함을 의지하며 우리는 근처 나뭇잎으로 덮고 애써 잠을 청하려 했다. 어두운 밤. 조용히 밝게 빛나는 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덮고 있는 나뭇잎을 밀어내며 차가운, 하지만 따스함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것이 나의 팔에 감겨 왔다. 화들짝 놀라 시야를 내리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나의 소중한 소꿉친구가 그곳에 있었다. 」
호오호오호오. 대, 대담 하구나 윤아야. 아니 유나야. 슬쩍 시선을 돌려 윤아를 보니 붉어진 얼굴로 한없이 화면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 『유산혀크... 나 무서워.』
유나는 몸을 떨며 나에게 안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특히 가슴에서 느껴지는 커다랗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점차 나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나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작게 미소 지으며.
『이런 나의 두려움이 없어지도록 안아주면 안 될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자제할 수도 없이. 소중한 소꿉친구의 입술에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뭐시라.
" 아, 안되 상혁아 나는 아직-!"
무인도로 추측되는 곳에 조난당한 주제에 뜬금없이 성관계를 가지고 있는 풍기문란한 두 고등학생을 바라보며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것을 지켜봤지만 윤아는 그렇지 않은지 얼굴을 붉히며 '오, 히야. 우우.'라는 등의 의미 불명 감탄사를 내며 보고 있었다.
" 유..윤아 대담하잖아, 나도 저렇게는..."
" 아..아니 저건 내가 아니니까, 곱슬아!"
" 나도 곱슬이라는 이름이 아니지만……."
좀 갑작스럽긴 해도 평범한 H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버튼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유키의 반응이 이상했다.
「 유나에게 몸을 맞기고 열락에 잠겨 있는 흐릿한 나의 시선에, 당혹스런 유키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평상시의 무표정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유키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 그녀는 나와 유나의 모습을 보며 몸을 꿈틀거렸다. 떨리는 그녀의 손이 점차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이동하고 있었다.」
유,유유유유유유유유키. 너,너너너너 지금! 머,멈춰 뭐하는 짓이야 유키! 소소소소, 소소, 손이 어디로 가는 건데!
" 수연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어."
" 헤에~. 수연이도 은근히 밝히는 구나? 윤아와 상혁이가 하는 것을 보며 자-..."
자-라는 말이 나온 순간 나의 오른 손이 빛살과 같이 움직였다. 그 속도는 태어나서 여태껏 내보지 못한 나의 전력이었으며 곱슬이 따위가 반항할 여지없이 완벽하게 입을 잡아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두 번 다시없을 정도로 차갑게. 또한 냉정하게. 나조차도 놀랄 만큼 시린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 나왔다.
" 두..번은 없다고 경고했는데."
곱슬이의 고개가 엄청난 속도로 끄덕여졌다. 눈에 눈물이 맺혀 있고, 어째서인지 나의 손에 잡혀 있는 곱슬이의 턱에서 삐걱삐걱 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좋아 반성을 한 것 같으니 놔주도록 하자.
" 곱슬이하고 수연아 그리고 저건 나하고 상혁이가 아닌걸..."
윤아가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해 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아, 안되겠어. 이 게임은 오늘 여기까지만 해야지. 더 이상 했다가는 멘탈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필 유키의 그... 에 아무튼 그런 장면만 나오지 않았어도!
게임 화면은 마침 애처롭게 허벅지 사이로 손을 가져가는 유키의 모습이 클로즈업된 상태였다. 여기서 저장하고 끄기는 찜찜하지만 더이상 텍스트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저장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드르륵!
" 아, 미안. 박시윤 선생님을 도와드리다 보니 조금 늦었……."
고개를 돌렸다.
부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상혁이의 시선은 내가 플레이하는 러브 레볼루션~그녀는 나의 신부~로 고정되어 있었다. 즉, 한창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뭐시기를 하려는 나와 몹시 닮은 유키의 모습에.
상혁이의 얼굴은 붉어졌고, 어째서인지 나의 얼굴도 붉어졌다. 이, 이녀석 대체 어디를..., 아니 뭘 보는 거야!
" 아, 그. 미안해!"
뭐가 미안한 건데! 저, 저건 내가 아니라니까!
하지만 나도 그렇게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나는 주변에 손에 잡히는 것을 들어 아무렇게나 상혁이에게 던졌다. 딱히 의미 없는 행위였음에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곱슬이는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고 윤아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으며 청이 선배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내가 진정한 것은 보다 못한 윤아가 게임을 저장하고 화면을 끈 이후였다.
...흑, 언젠가 저거 만든 개발자 얼굴을 보고 말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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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다른 내용없이 게임플레이 하나로 한화가 지나가 버렸네요. 다음편은 주말편입니다.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거나 건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코멘트로 꼭 남겨주세요.
전 코멘트 읽는걸 매우 좋아해서 에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