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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공략당해 버렸다-8화 (8/153)

8화

" -라는 이유에서 데려왔어."

" 그..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곱슬파마긴머리, 계속 길게 말하면 입이 아프니 줄여서 곱슬이로 하도록 하자. 처음에는 절대 동아리로 데리고 갈 마음 따위는 없었지만, 지금 이 녀석의 의지를 보자면 굳이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올 모양새였던지라 귀찮더라도 데리고 왔다.

이런 일을 질질 끌어 봐야 좋지 않고,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단칼에 잘라 버리는게 좋다. 라이트 노벨과 같이 둔감한 누군가가 눈치 채기까지 기다리기엔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곱슬이를 인당부로 데려오자마자 그녀의 목적을 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애초에 상혁이가 좋아서 온 여자아이다. 상혁이가 단칼에 거절하면 곱슬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고 인간관계는 단번에 끊어진다.

" 에... 그러니까."

" 어머♪ 상혁이 인기 많네?"

아니나 다를까 윤아는 눈에 보일만큼 크게 동요하는게 보였고, 청이 선배는 그저 이 상황자체가 재밌다는 듯이 어머머~를 연발하고 있었다. 좀 자중했으면 좋겠는데.

" 거짓말-? 진짜, 진짜로?"

상혁이에 이르러선 지금 상황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고 몹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하다. 아마 전생의 나였어도 갑자기 이렇게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자가 오면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설마 '무슨 벌게임인가?' 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반했을 건덕지도 없고, 반에서의 이미지도 오타쿠로 극히 좋지 않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상혁이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 자체가 세계7대 불가사이 만큼이나 이해 불가의 상황인 것이다.

곱슬이는 이런 상황을 만든 나를 향해 용맹하게 노려봤지만 나는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나의 다가오지마 베리어는 이런 시선 따위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으니까. 그런 나의 담담함에 곱슬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엊그제 나에게 탈의실에서 말한 것 그모습 그대로, 고압적이게 말해 왔다.

" 그, 그래. 좋아해! 그게 뭐 어때서! 그래서 같이 부 활동이라도 하려고 찾아왔어."

너무 당당하게 고백해서 히로인으로선 빵점이다. 좀 부끄러워하는 맛이 있어야지. 적어도 윤아 정도로 안절부절 하지 않으면 재미없다. 저 양아치 녀석, 양아치라 그런 가 이상 하리 만치 자신감이 넘치잖아.

상혁은 그런 곱슬이의 직설적인 말에 답을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이러다간 제대로 상혁이가 답하기 전에 곱슬이가 부에 속해 버리고 말겠어.

저런 귀찮아 보이는 게 부에 들어와 버리면 이것저것 귀찮아진다.

나는 천천히 상혁이에게 다가가서는 녀석의 귀에 조용히 말을 속삭였다.

" 쓸데없이 시선 끌지 말고 거절해. 어차피 딱히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질질끄는 것은 저 곱슬이에게도 미안한 일이야."

라노벨이나 만화였으면 딱 러브코미디 같은 상황이지만, 현실은 만화나 라노벨처럼 재밌지 못하다. 상혁이에게 마음 쓰는 것은 윤아만으로 족하다. 저 곱슬이가 귀찮은 것도 있지만 이렇게 흐지부지 입부해 버리면 윤아도 힘들고 곱슬이도 힘들 뿐이다.

차라리 이제 시작하려는 곱슬이를 시작점에서 잘라 버리는 게 깔끔하다.

" ...그렇겠지."

상혁이도 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고백을 받은 이상 확실히 답변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우유부단하게 보이는 주제에, 그래도 똑바로 결정하잖아. 좀 다시 봤어.

상혁은 여전히 고양이같이 올라간 눈으로 이쪽을 응시해 오는 곱슬이를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굳게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미, 미안! 너의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런 걸로 부에 입부하는 것은 그만 둬줘."

조금 마을 더듬기는 했지만 상혁은 곱슬이에게 '거절'의 마음을 제대로 전했다. 이제 끝이다. 왜 곱슬이가 상혁이를 좋아한다고 이곳까지 온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당사자가 거절했으니 곱슬이로서도 무리하게 부에 입부할 목적이 사라졌을 것이다.

기껏 나에게 좋아한다고 도와 달라고 한 입장에선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부에 입부할 거니까 신청서 좀 줄래?"

" ...에?"

" 신청서 달라니까 왜 그래?"

곱슬이는 시원스럽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뭐야 이 녀석. 상혁이가 좋아서 온 것 아니었어? 눈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거절당했는데 왜 이리 태연해.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맛이 가버린 게 아닐까?

즉,

" 혹시 바보가 된 건가."

" 태연하게 남에게 상처 주는 소리하지 마. 제대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있다고!"

저렇게 떠드는 것을 보니 제정신은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멀쩡한 거지. 아무리 봐도 방금 전 고백한 남자에게 차인 여자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우리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곱슬이는 살짝 붉어진 볼을 긁적이며 웅얼거리듯 이야기했다.

" 뭐...뭐어. 상혁이가 지금의 날 모르니 당연하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상혁이가 거절했다고 내가 좋아하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이제부터 제대로 좋아하게 만들 테니까 입부할 거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 작은 부실에서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릴 만한 소리였다. 상혁이는 얼굴이 붉어지며 뒤로 넘어졌고 윤아의 눈동자는 빙글빙글 돌고 있었으며, 청이 선배는 입을 가리고 '어머♬'하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큿, 뭐지. 분명 제로였을 히로인력이 계속 올라가고 있어.

1000, 4000, 10000.... 잠깐!(퍼엉)히로인력 스카우터가 버티질 못할 정도였다. 나로서도 상상치 못한 대사가 곱슬이 따위에게서 나오다니. 그나저나 '지금의 날'이라고 하다니. 뭔가 예전에 상혁이와 만나기라도 했다는 소리일까. 양아치 주제에 터무니없는 히로인력을 보유하다니. 마음에 안 들기 그지없다.

" 거절당했으면 얌전히 사라지면 좋았을 텐데."

내가 차갑게 굳힌 얼굴로 곱슬이에게 말했지만, 저번부터 그랬듯이 그녀에겐 나의 차가운 말이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 네가 남을 거절한다고 나까지 그럴 거라 생각한 거야?"

고압적인 말투로 건방지게 말해 왔다.

하지만 그 말이 순간 가슴에 와 닿아서 반문은 할 수 없었다.

" 그나저나."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청이 선배가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어깨 위로 흘러내렸던 아름다운 금발을 천천히 뒤로 넘겼다. 그리곤 더할나위 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곱슬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 그래서 이름은?"

" 곱슬이."

"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시끄러운 녀석이다.

--

부실에서 모두가 돌아간 시각은 대략 저녁 여섯시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두 시간 정도 더 부실에서 책을 읽다가 밖으로 나왔다.

저녁 여덟시-.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시간. 이라고 모 작가님이 말했었지.

" 오늘은 달이 밝네."

봄이 온지 얼마 안 되었기에 저녁 여덟시만 되도 어두운 밤이다. 내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일정하지는 않지만 항상 이런 어두운 밤이다.

일찍 집에 돌아가 봐야 어색하기만 할뿐이고.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동생에게도 이게 좋은 선택이다. 이것이 가장 올바르다.

끼익.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이 밝혀진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있는 게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는 모르지만 상관없겠지. 나는 나의 방에 들어가 계속 그곳에 있을 뿐이다.

교복을 벗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자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피곤했다. 학교가 딱히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 피곤한 걸까. 방에 있는 창문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녀석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계속 나의 시선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몇 초인지, 몇 분인지. 아니면 몇 시간인지는 모른다. 나는 계속 그것을 응시했고. 달은 계속 그곳에 있었다.

딸칵.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레 나의 방문이 열렸다. 이 집안에서 나의 방문을 여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검은 생머리에 새하얀 얼굴. 나와는 그리 닮지 않은 용모를 한 소녀. 나와 닮은 점이라곤 같은 머리 스타일이라는 것 정도이리라.

" 언니. 오늘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고 치킨하고 피자 사 왔는데 먹을 거야?"

여동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평상시의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목소리만은 담담했다. 아마도 나의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할 것이다. 결혼기념일이 오늘이었던가. 이번 주말이 ‘그 날’이었으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보다. 덕분에 이번 주말은 무척이나 시간이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렸다.

평상시처럼 무감정하게, 무표정하게.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그야말로 만들어진 아름다움-. 남이 다가오는 것을 거절하고,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그 자체로 나는 여동생을 응시하며 작게 입을 열었다.

"-아니."

조그만 거절의 말.

그리고 몸을 돌려 누웠다. 더 이상 전할 말은 없었다. 여동생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리 그냥 나가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이며 작게 속삭였다.

"...어렸을 적엔 그렇게 많이 웃어 줬으면서."

웃어 줬다. 웃었다.

그런 거 전부 잊어버렸어.

여동생은 내가 조금도 반응이 없자 몇 분간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갔다. 어쩐지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

" 하~암."

"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아, 무심코 하품이라도 했던 건가. 곤란하단 말이지-. 벌써 수업 시간에 몇 번이나 했는지 숫자를 세다가 까먹을 정도다. 제대로 잠을 잔 것 같은데 피곤하네. 옆에 앉아 있는 상혁이도 내가 계속 피곤해 하자 계속 힐끔힐끔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업 시간에 계속 힐끔거리는 건 참아 줬으면 하는데. 거기다가 뭔가 다른 시선도-

'...저 녀석.'

곱슬이가 눈을 빛내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이, 수업 시간엔 수업을 들으라고.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지 말고!

얼마나 강렬하게 쳐다보는지 순간 머릿속에 느껴지던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물론, 곱슬이의 시선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수업을 하던 박시윤 선생님의 강력한 교과서 스매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쉬는 시간이 되자 상혁이는 내가 계속 하품을 한 것이 걱정이라도 된 듯 물어 왔다.

"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잠을 제대로 못잔 거 같은데."

" 어머, 야하네. 여자애한테 밤의 일을 물어보다니."

" 봐주라. 그렇게 이야기하면 곤란해진다고……."

뭐 특별히 말하지 못할 것은 없다. 이 피곤에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고 봐야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학교에 온 정도랄까.

" 새벽에?"

" 아무래도 PC하고 플스같은 걸 부실로 옮기려면 아무도 오기 전에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결국... 정말로 들고 왔구나."

당연하지. 이미 나는 내 비밀 기지를 내 방에서 부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나는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좋아, 오늘은 플스를 설치한 기념으로 신작 미연시를 플레이 해보도록 하자. 워낙 어덜트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집에서는 하지 못했지만 학교에서라면 상관없겠지.

" 그런 건 학교에서 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 실례. 또 입 밖으로 말했던 걸까."

" 제발 속으로만 말해 줘."

소심하긴. 상혁이는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말해 왔다.

" 그런데-. 막상 너한테 미연시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 하는 소리지만."

" 대답하고 싶지 않아."

" 아직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뭔가 이상한 걸 질문할 것 같았는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상혁이는 손을 절래 절래 흔들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 아니, 아니. 보통 여자애들은 그런 거 안 하잖아. 무슨 재미로 하나 싶어서. 난 미연시같은 건 영 재미를 못 느끼겠더라고."

네 녀석이 삶 자체가 미연시처럼 흘러가고 있으니까 재미없겠지.

" 하지만 뭐랄까. 좋아하는 스타일의 히로인이 있으면 조금 재밌어질 때도 있지만."

" 좋아하는 스타일?"

" 머리를 묶은 여자애들이 좋더라고. 포니테일이나, 트윈 테일이나 이런 거."

포니테일이나 트윈 테일이라……. 확실히 그런 쪽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이 녀석 뭘 모르네!

자고로 히로인은 흑단같이 아름다운 긴 생머리를 지닌 여성이어야 한다. 앞머리는 일자로 단정해야만 하며. 결코 머리가 나쁘지 않고 우수해야지 빛이 난다. 덤으로 검은 팬티스타킹을 신어주면 매력이 배가 된다고! 바로 지금의 내 모습처럼. 역시 나 최고!

" 흐응-."

" 뭐..뭐야 그 시선은."

" 별로. 곱슬이에게 그 의견을 전달해주지."

곱슬이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머리 스타일 따위 얼마든지 바꿀 것 같았다. 뭐 오늘 학교에서 본 바에 의하면 곱슬이 때문에 상당히 곤란해 하는 것 같았는데 더 곤란하게 만들어 버려야지.

곱슬이는 재주도 좋게 패거리로 여자애들을 끌고 다니면서도 상혁이에게 제대로 대쉬하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하긴 하지만.

" 내 이야기 하고 있었지!"

옆에서 들려오는 고압적인 음성. 양아치 특유의 줄인 치마가 시야에 들어오고 적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내 귓가를 간질인다. 쓸데없이 길어서 사람 귀찮게 하네. 양아치 주제에.

" 어머, 안녕 곱슬이."

" 그러니까 내 이름은 곱슬이가 아니라니까!"

어제 본명을 말했었던 것 같았지만 전혀 존재감 없는 이름인지라 미안하게도 까먹어 버렸다.

" 너 진짜 성격 나쁘구나."

" 실례네. 애초에 그쪽의 본명이 평범했던 게 나쁘다고 생각해."

" 내.. 내 본명이 어때서. 상혁이라면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걸! 내 신청서까지 직접 써 줬으니까!"

곱슬이는 기대감이 가득 담은 눈으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상혁이를 바라보았다. 자, 유상혁 너는 과연 곱슬이의 본명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곱슬이는 일본애니로 치면 쿈 같은 존재라고! 본명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 그게..."

상혁이의 음성은 무척 약했다. 동공은 흔들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옆에 앉은 내가 느낄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으며 입에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 상혁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 ...미안."

" 거-짓-말-이야!! 으에에엥~!"

어제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도 울지 않았던 곱슬이가. 나에게도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쳐 오던 곱슬이가 울면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말았다. 유상혁. 역시 너도 할 땐 하는 남자잖아.

그나저나 곱슬이 괜찮을까.

" 자, 그럼 여러분 57페이지를 펴세요."

수업 시작해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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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 헤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 사람이 좀 있는 옥상보다 한적해서 더 좋은걸♪"

오늘도 상혁이의 손에서 도망쳐 교정 뒤편으로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는데, 곱슬이 녀석이 교정 뒤편으로 일행들을 모조리 끌고 와 버렸다. 자기 패거리랑 먹을 것이지 왜 이 녀석들을 끌고 여기에 온 거냐. 청이 선배하고 윤아까지 온 탓에 차마 도망도 못치고 몹시 곤란하다.

" 상혁아, 너에게 주려고 도시락을 싸왔어!"

나를 향해 빙긋 웃은 곱슬이는 천천히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도시락을 꺼냈다. 호오, 그런 건가. 굳이 모두를 끌고 나에게 온 것은 애초에 이럴 작정이었다는 것 이구만.

말하자면 승부! 라는 것이다.

상혁이에게 도시락을 준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나에게 뽐내려는 모양이었다. 하, 백년은 무르구나. 너 따위 양아치의 실력 따윈 나에게 웃음도 안 나오지. 옆에서 어째선지 윤아까지 덩달아 얼굴을 굳히고 곱슬이의 도시락을 바라보는 듯싶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 후, 오늘은 TV를 보면서 만든 탓에 평소보다 좀 부족해서 조금 미안. 그래도 맛있게 먹어 주었으면 해."

귀여운 고양이 도시락 뚜껑이 열리며 그 도시락 안의 내용물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 -읏."

" 헤에~♪"

" 이.. 이럴 수가……."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정녕 양아치의 도시락이 맞단 말인가. 여자는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다더니만 딱 그 짝이다. 머리도 텅텅 비고 치마나 줄여 입고, 패거리나 데리고 다니는 양아치 소녀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다니. 세계의 불합리다.

이 정도면 나의 도시락에 전혀 꿀리지 않아. 이상은 아니지만 분명 동급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시락 요리에선 누구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벌써 나와 동급의 존재가 두 명이나 존재했다. 아니, 상혁이의 누나라는 상화 언니(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의 경우엔 나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도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건가. 내 실력이 겨우 길가의 양아치와 동급이었다니.

" 저기, 수연아? 너도 도시락 좀 보여줄래? 나만 꺼내 놓으니 부끄러워서……."

빙긋 웃으면서 말하는 곱슬이. 쓸데없이 당당한 곱슬이지만 지금의 당당함은 평소의 배는 되어 보였기에 콧대는 꺾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동급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윤아는 어째서인지 나까지 도시락을 꺼내자 갑자기 자신의 도시락을 뚜껑을 꾹 누른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크. 설마 곱슬이에게 도시락을 꺼내면서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될 줄이야. 오늘은 제법 자신작 이었으니 당당하게 내보이도록 하자.

조금의 그림도 없는 나의 도시락 뚜껑이 열리자 재차 감탄성이 주변에서 들렸다. 저번에 상화 언니의 도시락을 본 뒤에 고심해서 만든 맛과 영양을 절묘하게 버무린 자신작 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곱슬이와 동급일 뿐이다.

곱슬이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 이럴 수가. 평소보다 배는 기합을 넣어 만든 도시락이었는데..."

아니 아까는 TV를 보며 대충 만든 거라며.

" 어머~♪ 다들 그렇게 요리를 잘할 줄은 몰랐어요. 괜히 제 도시락이 부끄러워지네요."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는 청이 선배였지만 청이 선배의 도시락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나와 곱슬이에 비하면 부족한 도시락이었지만 깔끔하게 서양식으로 꾸며진 청이 선배의 도시락은 절로 입에 침이 고이는 모양새였다. 새삼 도시락 메뉴로 청이 선배가 미국인과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 아하하-, 그렇지만 나 상화 누나가 도시락을 오늘 좀 많이 싸 줘서 곱슬이 것까지 먹을 수 없는데."

" 상혁아 그보다 난 곱슬이가 아니야...!"

슬슬 포기하지, 곱슬아.

뭐 아무튼 상혁이의 도시락은 저번에 나에게 컬쳐쇼크를 먹여 준 상화 언니의 도시락이었던 만큼 나와 곱슬이의 것보다 뛰어났다. 상화 언니의 도시락에 곱슬이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래, 힘내라. 힘내서 더욱 대단한 도시락을 만드는 거야. 상화 언니는 넘어야 할 벽이지만 적어도 도시락에 있어서 너는 나의 라이벌이라 인정해 주지. 영광으로 생각해.

내가 울고 있는 곱슬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문득 뭔가 이상한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아. 윤아는 자신의 도시락 뚜껑을 열 생각도 못한체 자리에 앉아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어머♪ 윤아도 어서 도시락 먹어. 이러다간 점심시간 끝나 버린다?"

청이 선배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윤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 도시락 뚜껑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알아챈 다른 일행들 또한 윤아에게 도시락을 먹을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힌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왜 그래, 도시락 안 먹으면 오후 수업 때 힘들어."

보다 못한 상혁이가 한마디 했지만 윤아는 고개를 푹 떨구며 귀까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 하, 하지만 여기서 내 도시락 뚜껑을 열면 여자로서의 프라이드가. 소꿉친구로서의 위엄이... 보통 이런 건 소꿉친구 쪽이 가장 뛰어나야 하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우리의 도시락 배틀에 윤아가 겁을 집어먹은 듯싶었다. 하지만 윤아의 도시락 실력을 저번에 봤고, 도리어 여고생치곤 무척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나나 곱슬이가 이상하리만치 요리를 잘하는 것뿐이지. 곱슬이 녀석 쓸데없이 요리를 이렇게 잘하다니. 우리가 그러게 위로해졌지만 아무래도 윤아는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입은 듯싶었다. 난 윤아의 평범한 계란말이 도시락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우리는 윤아의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소모하였고, 기껏 맛있게 싸온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어 치운 뒤, 수업을 듣기 위해 뛰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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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저도 바케모노가타리를 참 좋아해요. 흑흑 하지만 제가 아직 일상물이랄까 러브코미디 같은 쪽을 잘쓰지 못해서 힘드네요. 흑흑. 캐릭터 성도 확실히 잘 살려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쉽게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 1인칭 시점인지라 더더욱 주변 인물들에 대한 심리를 묘사하기가 쉽지 않죠.

노력해서 재밌게 쓰도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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