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부 이름에 대한 토론은 결국 카페에서 결정되지 못했고, 미해결 난제로서 다음날까지 미루어지게 되었다. 작명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작업일 줄은. 만화나 소설 제목 같은 것도 분명 이런 식으로 오랜 고민 끝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새삼스레 이 세상 모든 제목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 -그런데."
" 응? 왜 그래?"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는 내 앞에 쪼르륵 앉아 있는 상혁, 윤아, 청이 선배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분명 오늘의 나는 조용히 공부를 하다가 조용히 집으로 귀가하기로 정했단 말이다. 학교에 등교하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들은 뒤, 집을 가다가 청이 선배에게 붙잡혔다 싶더니 나란 존재는 이상한 곳으로 끌려와 있었다. 확실히 요새 라이트 노벨 클리셰는 자신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끌려가 부에 입부에 버렸다! 라는 식의 진행이 많지만 당사자가 나라면 전혀 재미가 없다.
" 나를 끌고 온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무감정하게, 무표정하게, 무미건조하게.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최고조로 차갑게 이야기한다.
" 그그그그그... 아, 하하하. 역시 이제 같은 부원이니까 우리의 새로운 부에 대한 이름을 토론을 해볼까 하고."
" 그렇다고 해야 하려나, 그렇다고 해야 할까. 우리끼리 결정하기보단 기왕이면 수연이의 의견도 듣고 싶어서-."
난 입부한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부원이 되어 있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 염불 외우듯이 변명하는 윤아와 상혁이의 모습에 한마디 해줄까-하다가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단번에 입부시켜 버리는 게 괘씸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들어갈 마음도 있었고 이 녀석들에게만 맡겼다간 어떤 터무니없는 부 이름 탄생할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아우터 갓 급의 미지의 존재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차가운 표정으로 둘을 노려보는데, 청이 선배는 그런 우리를 어머어머하고 바라보더니 손뼉을 크게 마주치며.
" 자! 그럼 새로운 부의 이름은 인당수로 결정♪"
" 에에에-?!"
" 아직 단 한마디도 토론하지 않았는데 결정입니까, 선배!"
" ....돌아갈까."
어지간히 청이 선배는 부의 이름을 인당수로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심청이로서의 본능인 것일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배의 마음은 꽤나 확고한 것이어서 윤아가 아무리 옆에서 설득하려 해도 이미 부의 이름을 인당수에서 바꿀 마음은 도저히 없어 보였다.
대체 부 이름에 대해서 왜 토론하자고 한거냐 그럼.
하지만 나로선 청이 선배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치고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없었기에 그저 팔짱을끼고 빤히 현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윤아는 어떻게든 부의 이름을 인당수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듯싶었지만 청이 선배는 길을 막고 있는 잠만보와 같이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피리, 포켓몬 피리가 필요해.
윤아가 절망하고 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 바로 그 순간. 인당수에서 모두를 건져 올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상혁이었다.
" 하지만 선배 인당수로 하면 우리 말고는 신입부원이 한명도 오지 않을걸요. 거기다가 저희 부 활동 목적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인 것 같다고나 할까요."
" ....으."
효과가 몹시 뛰어났다!
심청은(는) 혼란스러워 졌다!
신입부원이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오지 않는 말이 먹혔던 것인지, 부활동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라는 것이 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청이 선배는 동요하며 얼굴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그런 청이 선배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상혁이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인당수가 아니라 '인기 있는 당신을 위한 부'라는 이름으로 줄여서 '인당부'라고하는건 어떨까요?"
" 인당부라..., 인당부, 괜찮은 것 같아! 상혁이는 천재야!"
" 아하하, 뭘요 선배."
인당수나 인당부나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도리어 명사로서도 이상해져 버려 인당수보다 더욱 꺼림직 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 으에에엥~."
윤아는 이미 울고 있었다.
이수연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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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이미 포기한 것 인지 흔히 말하는 범해진 여자의 눈을 한 체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관조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무척 집에 가고 싶었다. 눈앞에서 부의 이름이 인당부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눈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까.'
적어도 인당부에 비하면 변화하는 일상 부 쪽이 좋았다. 뭐 변상부라고 하면 인당부나 오십 보 백 보이긴 하지만. 나로서도 딱히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어떤 의미론 차라리 인당부가 이 부의 본래 목적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어제 청이 선배의 말을 듣고 '변화하는 일상부'에 대해 선생님께 물어봐서 알았지만 이 부는 예상보다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본래 이 부는 지금 졸업한 3학년이 1학년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부인데 당시에 꽤나 학교에서 골치가 아프던 양아치들이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그냥 가벼운 지도로 끝내려 했지만 점차 도가 심해져서 학생 지도 선생님의 이름하에 '갱생부'라는 이름으로 그 양아치들을 싸그리 몰아넣었다.
즉, 인격지도의 장이 시작된 것이다. 놀랍게도 양아치들은 갱생부의 활동 속에서 정수기의 여과된 물처럼 깔끔하게 여과 되었고, 부의 이름도 이미지 체인지 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부는 지금 졸업하는 3학년이 물려받으며 '변화하는 일상'부가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선 인당부가 되려는 위기에 쳐 해 있었다.
' 어째서 사람의 이미지를 바꾼다,-따위의 활동으로 부가 유지되나 싶었더니만 이미지를 바꾸기 보단 사람을 갱생하는 부였던 거지.'
그 뒤로 선생님들도 혹시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을 까 봐 싶어 계속 유지 시켜 두고 있는 듯 싶었다. 덤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이 부의 고문 선생님은 학생 지도 선생님이다.
뭐어, 줄여서 말하지 않고 '인기 있는 당신을 위한 부'라고 한다면 못 들어줄 정도의 이름은 아니니까, 부의 이름 정도는 넘어가 주도록 할까.
" 그럼 선배, 부 이름은 대충 결정된 것 같으니 부 홍보 같은 것은 어떻게 할까요?"
과연 인당부라는 부의 이름을 듣고 입부할 마음이 생길지는 의문이 다만.
" 아, 그건 걱정 마. 내가 생각 해둔 게 있어♪"
푸른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청이 선배. 그 환한 얼굴에 차마 반박할 마음 따윈 생기지 않았지만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홍보 포스터라도 만든 건가? 아니면 보통 팜플렛 같은 것을 들고 지나가는 신입생을 붙잡거나 하지 않던가.
활짝 웃고 있는 선배의 얼굴을 보자면 분명 뭔가 방법이 있는 듯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일지 두려워져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뭐 그렇다 해도 굳이 새로운 부원이 필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어차피 부원이 네 명이면 부가 사라지지 않는다. 최소 인원에 딱 들어맞으니 굳이 힘써서 부원을 입부시킬 필요성은 없었다. 나로서도 부에 사람이 많아져 봐야 귀찮을 뿐이니까.
아 그렇지.
기왕 이렇게 부에 입부 한 것 집에 있는 게임 소프트나 PC도 가져와서 여기서 할까. 집에 계속 있어 봐야 아버지나 어머니 눈에 띄고 동생도 공부에 방해된다고 하니까... 마침 부실 위치도 꽤나 외딴 곳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청이 선배. 혹시 집에서 PC 같은 거 가져와도 괜찮나요."
" 물론~. 편할 데로 이용해. 어차피 이 부실은 우리의 왕국이니까 ♪ 아예 게임기나 이런 것이라도 가져와서 꾸며 볼까?"
사실 게임기 같은 것을 학교에 반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청이 선배 말처럼만 되면 나도 플레이스테이션이나 그런 것을 몰래 들고 올 생각이었으므로 조용히 하기로 했다.
" 에에~? 그래도 괜찮아요, 선배?!"
" 전혀 상관없어. 윤아도 뭔가 심심하면 가지고 와. 우리 부는 특별히 하는 것도 없고~."
자신의 부가 전혀 하는 것도 없다고 단정 지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말에 상혁이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말해 왔다.
" 하지만 게임기나 그런 것들을 들고 왔다가 선생님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 괜찮아♪ 이사장님한테도 허락 맡은 개인 사유지나 마찬가지니까 이곳은."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청이 선배였지만 정말 괜찮은 겁니까. 대체 이사장님과는 또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건지 정말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청이 선배에게서 느껴지는 오오라는 나의 마음을 약화 시켜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 뭐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청이 선배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마음 놓고 편하게 물건을 공수해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마음 불편한 집보단 학교에 있는 게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그것 나름대로 입부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했다.
주로 생활하는 곳의 위치만 조금 달라질 뿐. 지금 내가 하는 생활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결정했다.
그랬기에, 이제부터 있을 이변에 대해 나는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이 학교에 입학하고 5일 만에 바뀔 변화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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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학교에 오자마자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이변'을 눈치 챘다.
' ...흐음.'
학교 교문 앞에 자신의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는 한 장의 커다란 포스터. 아마도 학교 동아리를 홍보하는 포스터 인 듯싶었는데. 그 홍보하는 동아리의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차마 말을 하지는 않겠다. 부의 이름도 부의 이름이고 포스터의 그림체는 어째서인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닮아 있었다.
'...청이 선배.'
믿으라고 하더니만 겨우 이런 포스터였다니. 아니 그걸 떠나서 떡하니 교문에 붙어있는데도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는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눈치 채고 때주면 좋겠지만 아무도 이 수상한 포스터에 대해서 태클을 걸지 않는다.
모른 척하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거냐.
그야 누구든 이런 수상한 게 교문에 붙어 있다면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보기만 해도 풍기가 문란해지는 것을 학교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교문에 떡하니 붙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다지 정의롭거나 한 성격은 아니지만, 막상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문에 이런 것이 붙어 있으니 당장 처분해 버리고 싶었다. 저런 걸 다른 타 학교 학생들이 본다면 분명 이상한 소문이 나돌 것이다.
좋아. 당장 뜯어버리자.
자신의 부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없었지만, 저런 짓을 벌인 부의 부원이라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며 포스터에 손을 가져가는 바로 그때.
" 자, 잠깐!"
교문에서 아이들의 복장을 단속하던 학생 지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 왜 그러시죠."
" 아-, 그러니까 수연...이었지. 그래 이번 신입생.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저 포스터를 뜯어내려 한 것 같은데 맞니?"
정확히 보셨습니다.
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방금 그 말을 긍정한다는 걸 알았는지 선생님은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말해 왔다.
" 음...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 포스터를 뜯어내거나 손상시키지 말라는 이사장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대체 어째서. 가장 학교의 이미지를 신경 써야 할 이사장이 저런 말도 안 되는 포스터를 허용해주었단 말인가. 나의 머리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당부-인기 있는 당신을 위한 부♪'
'부장 심청'
포스터에 적혀 있는 말은 그게 전부다. 전체적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림 기법은 피카소 특유의 기법이 놀랍도록 생동감 넘치게 펼쳐져 있다. 쓸데없을 정도로.
" ...참고로 저 그림은 인당수에 뛰어내린 심청이가 왕비가 되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라더군..."
어째서?! 아니 왜! 이젠 이유를 모르겠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심청전에 집착하는 거야 그 선배는.
그것에 대해선 선생님도 할 말이 없는 듯, 딱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다오.'
선생님도 정말 힘드시겠구나. 나로선 저 포스터를 뜯어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저런 것을 뜯어내는 것에 집착해 봤자 내 정신만 피곤해질 뿐이고.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다.
그나저나 이사장님이라니. 어제 청이 선배의 말을 듣고 계속 생각했지만 대체 이사장님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윤아 말로는 청이 선배가 엄청난 부자라고 했으니 사업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 인걸까? 아니면 이사장님의 딸이 청이 선배라던지.
'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만화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가 아른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청이 선배가 보였다. 어쩐지, 무척이나 불안해졌다. 이 학교, 괜찮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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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은 그 뿐이 아니었다.
때는 점심시간.
함께 밥을 먹으려고 하는 상혁이를 뿌리치고-윤아가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으니- 재빨리 교정 뒤편으로 도망친 나는 간만에 느긋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멍하니 아직은 좀 쌀쌀한 바람에 몸을 맡기며 파란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 이봐."
익숙한 목소리였다. 약간 높은, 고압적인 여성의 목소리. 고개를 뒤로 젖히자, 나의 흑발이 목 뒤로 바람에 흩날렸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 목소리이며 익숙한 얼굴이었다. 적갈색의 염색한 머리칼. 약간 파마를 했는지 물결치듯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와 굳게 다물어진 입.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화장기가 그다지 없는 맨얼굴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저번에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보다 이쪽의 맨얼굴이 괜찮아 보였다. 귀여운 인상이라고 할까. 아마 그게 싫어서 화장을 한 것이겠지. 약간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 어머, 무슨 일일까?"
눈을 가늘게 좁힌다.
옅은 미소를 짓는다.
고혹적이게. 우아하게.
보통의 사람은 내가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기가 죽는다. 만들어진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거부감인지, 아니면 나의 차가운 눈동자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체로 내가 이렇게 물으면 뒤로 물러서곤 했다.
저번에 그렇게 크게 데인 이 녀석이라면 아마 충분히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저기."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리어 녀석은 나를 향해 한걸음 다가왔다. 무슨 일일까. 눈을 가늘게 좁힌다. 이 녀석이 나에게 다가올 만한 이유가 있던가?
저번과 같이 해코지하기 위해 왔다면 좀 더 패거리를 끌고 왔어야 했다. 이렇게 혼자 당당하게 왔을 턱이 없다. 나는 분명 두 번은 없다고 경고했고, 이 녀석도 분명 이해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 그-, 뭐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곱슬파마긴머리는 이런 나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곱슬머리를 하얀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있었다. 마치, 부끄러울 때 여자애들이 하는 행동처럼.
" 서둘러 말하는 게 좋아. 나, 인내심이 그다지 없거든."
" 아, 아. 그게!"
차갑게 말하는 나의 말에 녀석은 시끄럽게 소리치더니 이내 뭔가 크게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크게 숙였다.
" 도, 도와줘!"
" 하아?"
이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노려보자 곰슬파마긴머리는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뭔가 붉어진 얼굴로 나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그.. 그게, 그때 너는 알아차렸으니까 괜찮을까 싶어서. 그다지 마음도 없는 거 같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 전혀 지금 너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있으니까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한데.
" 알아차리다니. 내가?"
" ? 네가 어제 그저께 탈의실에서 나한테 말했잖아. 그...그, 상혁이를 질투 하냐고."
……어라?
" 사, 사실 그때 네가 체육 시간에 상혁이랑 같이 있는 거보고 울컥해서 말했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서 말해 버렸잖아. 부끄러워서 덤벼들었다가 제압당했지만……. 그날 울었다고."
" 잠깐, 잠깐. 나, 전혀 이해가 안 되고 있어."
그때 탈의실에서 어땠더라. 갑자기 이 녀석이 나한테 얼굴 예쁜 걸로 나댄다고 시비 걸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오타쿠랑 사귀냐고 뭐라 하고. 그래서 내가 너 질투하니? 이랬었지 아마. 그러니까 말하자면.
" -진짜 질투?"
" 으, 으. 그렇지. 사실 그때 열이 올라서 그랬지만."
뭐 이씨. 잠깐, 이게 말이 되냐. 이런 전개는 난생처음인데. 너 분명 악역역활 아니야? 여자애들 패거리를 끌고 다니고.
전형적인 양아치 주제에.
" ...그런 말은 속으로 하는 게 어떨까 싶지만. 나 양아치 아니거든? 단지 주변에 애들이 몰려들고. 가끔 가다 이상하게 덤벼 오는 애들이 있으면 좀 때려 주고. 교복 좀 예쁘게 입고, 머리 좀 염색하고. 그럴 뿐인데?"
세간에는 그런 것을 양아치라고 한다. 애초에 누군가를 때린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건가.
" 때린다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 탈의실에서는 엉망으로 내 머리카락이나 잡으려 하지 않았어?"
" 질투 때문에 주먹질하는 것도 웃기잖아."
머리카락을 잡는 것은 괜찮고?
아니 그걸 떠나서 이 녀석 왜 이렇게 시원해. 그때 바닥에 나뒹굴었으면서 이렇게 태연하게 말을 해도 괜찮은 거냐. 요즘 들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한 박자 쉬고.
" 정리하자면 너는 내가 탈의실에서 한말로 볼 때 상혁이 한테 마음이 없고, 너의 마음은 알고 있으니 도와줬으면 한다.-라고 하는 걸까?"
" 응, 응! 아무래도 상혁이는 이미지가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한테 도와 달라고 하기엔……."
그럴 거면 애초에 좋아하질 말던가. 쓸데없이 귀찮은 것까지 생각하는 양아치다. 아무래도 더 이상 얽히면 몹시 피곤할 것 같아 무시하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 크..크게 도움을 바라는 건 아냐! 단지 아침에 교문 앞에 붙어 있던 포스터에서 상혁이랑 같은 부에 속한 것 같아서 나도 입부시켜 달라고 부탁하려고……."
" 무슨 소리인 걸까? 아침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어디에도 나와 상혁이가 같은 부라는 것이 써있지 않았는데?"
포스터에 써있던 글자는 인당부-인기 있는 당신을 위한 부♪-와 부장 심청. 이라고 써 있는 글자 정도다. 그 다음 그림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피카소였고.
" ? 무슨 소리야, 그림으로 부원들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었는데."
?!
그 그림 속에 내가 있었다고! 아니 그런 걸 어떻게 알아본 거냐. 선생님도 분명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왕비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했는데, 그 그림 속에서 부원 얼굴들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었다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인지부조화인가.
" 다른 것 바라지 않을게 동아리에 안내만 해줘!"
" ......."
곱슬파마긴머리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평범한 악역소녀A정도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데.
뭔가 달라질 것 없던 일상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참 내 이름이 뭔지 알아?"
" 곱슬파마긴머리."
" -그런 건 이름이 아니잖아?!"
시끄럽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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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우선 가벼운 파트하고 좀 무거운 파트로 나뉩니다. 뭐 현재로선 거의 가벼운 파트구요. 주인공 가정사정이나, 몇가지 인물들의 이야기가 좀 무거운 파트에 속하겠죠.
물론 가벼운 파트도 너무 오버하는것은 좋아하지 않기에 비교적 편안하게 풀어갈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다고 생각하는 캐릭은 곱슬파마긴머리양이지만요.
제목은 공략되었습니다이지만 정작 수연이가 언제 그렇게 될지는 모르죠. 제 생각에는 한참한참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의 이름은 대충 정하고 넘어갔습니다. 사실 소소한 일상부로 하려했는데. 너무 소소해서 그냥 인당수, 아니 인당부로했습니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더이상 부서이름으로 질질끌기도 귀찮아서요. 마침 부장도 심청이이니 인당수로 하는게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