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권>
갑자기 배가 출출해져서 편의점에 다녀온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한 무단 횡단이 날 단숨에 저세상으로 보내 버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쿵, 하고 몇 미터나 날아갔는지는 솔직히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전신에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과 흐려진 아스팔트 도로뿐.
마지막으로 뭘 떠올렸는지는 몰라. 기껏해야 주마등 정도겠지.
몇 초인지, 몇 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나는 어두운 길바닥에 누워 죽어 가고 있었다. 사실 막상 죽는다.-라고 생각했을 땐 '무섭다'라고 생각했다. 평상시엔 언제나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나라는 존재를 사랑한 적도 없었고 기껏해야 취미 활동이나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했으니.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무심코 무섭다, 라고 생각했다.
죽기 싫다. 가 아니다. 단지 무서웠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싶어서. '영혼'같이 비과학적인 것엔 기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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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오래전 꿈이다.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니 오래전이라는 말은 옛적에 초월했을지도 모르지만.
차에 치여 죽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해야 하려나. 다시 태어났다는 것엔 나름 안도하고 안심했다. 적어도 미지의 무언가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한 가지 의외였던 점은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
전생에 남자였으니 당연히 남자로 태어났을 것이라 생각한 자신이 조금 우스워졌다. 그렇다고 특별히 크게 놀라거나 비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성별이다.
본래의 자신이 변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다시 태어났다. 인간으로 태어나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해야 하겠지. 바퀴벌레나, 개구리로 태어났으면 태어나자마자 자살했을 자신이 있다. 거기다 만약 내가 만약 정자나 이런 것으로 있을 때 의식이 깨어났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로 태어나게 해준 정자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놓여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에 가까이 가자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칼에 가지런하게 정리 된 앞머리. 새하얀 피부에 늘씬한 몸. 두말할 나위 없는 '미인'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니 '미소녀'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만.
다시 태어나서 가장 힘쓴 게 뭐였냐면 외모였다. 뭐랄까, 새로 태어난 신체는 무서우리만치 스펙이 높아서 당황할 정도. 어렸을 적부터 장래가 기대되는 굉장한 미소녀였기에 전생에 오타쿠라고 할 만큼 그쪽 방면에 관심이 있던 나는, 마음에 큰 불을 지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갈고 닦으면 갈고 닦을수록 빛이 나는 몸이었다. 덕분에 지금 와서는 완전 내 취향. 거기다가 스펙은 외모만 치중된 것이 아니어서 운동이면 운동, 머리면 머리 수준이 달랐다.
뭐랄까, 공부가 재밌어졌다고 하면 믿기려나.
전생에도 나름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취미 생활-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하는 것 때문에 기껏해야 중간정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태어난 신체는 그 적당한 노력으로 지금껏 시험해서 만점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에 꾸준히 두세 시간, 시험기간엔 서너 시간 했을 정도인데 이미 고등학교 레벨의 공부가 끝나 있었다.
머리, 너무 좋아!
뭔가 재능의 벽을 느낀 기분이다. 나지만.
신체 능력도 대단하다. 지금까지 학교의 오래달리기에서 지쳐본 적도 없고. 단거리 경주에선 선생님들이 육상 부에 들어볼 생각이 없냐고 추천할 정도다. 체육 선생님이 '너라면 세계를 노릴 수 있다!'라고 매달렸지만 귀찮았으므로 거절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방콕족이고, 움직이는 건 상당히 싫어하니까.
그렇다고 항상 방에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쩐지 신체가 너무 좋아져서 몸매가 망가질까 싶어 하루에 한 시간, 두 시간은 늘 꾸준히 스트레칭과 운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멋진 몸매가 살이 찌거나 비상식적으로 말라 버려 망가지게 되면 울지도 모른다고.
" 아직 새벽 다섯 시네. 조깅이나 하고 올까."
어라. 생각해보니 나란 녀석 꽤나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구나. 남은 시간은 전부 취미 활동이긴 하지만 전생의 남자였던 내가 본다면 정말로 나? 할 정도로 규칙적인 삶이다.
끼익-. 철컹.
평상시와 같이 문을 열고 나와 간편한 차림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자 차가운 바람이 하나로 묶은 내 검은 머리칼을 하늘하늘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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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남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여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미인으로 태어나 버리면 말이지. 취미활동에 더 힘쓸 수 있다고 해야 하려나. 온라인 게임 같은 거 할 때 넷카마짓 하지 않아도 되고. 여자인 거 감추다가 빵 터트렸을 때 재미도 있다. 아직 해보진 않았지만 이젠 고등학생이기도 하니 코스프레 같은 것도 도전 해볼까.
흑발에 긴 생머리니 꽤나 겹치는 캐릭이 많을 것 같은데.
뭐, 말하자면 여자 생활 만끽! 중이다. 가끔 심심해서 인터넷에 연재되는 TS물들을 보면 남자인 자신을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재밌게 보지만 아마 이 세계 유일한 판타지 TS권위자인 나로선 잘 모르겠달까. 물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바뀐다면 큰 문재고 저항이 없는 게 이상하지만 전생이라면 글쎄. 10년도 지난 시점에서 이미 가물가물하고.
하긴 나야 전생부터 여자로 태어나면 어떨까~~하고 침대에서 굴러다니며 망상을 너무한 탓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공감 가는 부분도 있다. 가장 큰 예시를 들면- '연애'라고 해야하려나. 당연히 남자랑 사귀는 게 정상이지만 남자를 너무 잘 알다 보니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거기다가 막상 내가 남자랑 사귄다고 생각하면 뭔가 미묘하게 생각된단 말이지.
아마 그런 점은 좀 더 천천히 받아들여야 할 듯싶다. 정 뭣하면 독신으로 살지 뭐.
조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가족들이 일어나 식사 준비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너무 조깅에 심취해 있었나. 오늘은 고등학교 입학식이니 좀 더 힘쓰고 갈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약간 촉박한 기분이다.
" 흥, 여전히 성실하네. 언니."
약간 땀이 난 몸을 씻고 나오는데 여동생이 말을 걸어왔다. 사이는 좋지 않지만.
" 응."
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뒤에선 영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생의 눈이 느껴지지만 아무래도 좋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가족들과 사이가 몹시 나쁘다. 전생부터 그렇지만 난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여동생의 경우엔 언제나 나와 동생을 비교하는 부모님과 친척들 때문이니 충분히 나를 싫어할 만도 했다.
항상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내 동생이지만, 나는 그런 거 가볍게 초월해 버리니까. 거기다가 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쉬지도 않고 공부 만하는 여동생 입장에선 속이 터질 만도 하다. 사실 비밀이지만 새벽에는 어덜트 게임도 하고 있어서 내가 뭐하는지 보기 위해 새벽에 몰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동생 때문에 모니터를 한개 부숴 버린 기억도 있다.
그땐 정말 일촉즉발이었지. 모니터를 꿰뚫어 버리는 펀치였다고 하려나. 버튼만 침착하게 눌러서 끄면 되는데 어째서 주먹부터 나갔는지는 나도 솔직히 의문이다.
" 좋아."
머리를 빗으로 쓸고 교복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자 정말 눈이 부시는 미소녀-나지만-가 서 있었다. 얼굴도 무표정해서 큥, 하다고 해야 하려나. 쿨계지, 이거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틱하게 말하자면 쿨데레. 본의는 아니지만 사교성이 영 없다 보니 얼굴도 무표정하고 말도 짧다. 후천성 쿨데레라고 하는 게 정답이다. 데레는 없지만.
덤으로 검은 생머리 미소녀와 가장 어울리는 것은 검은 팬티스타킹이니 잊지 않고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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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기 위해 거실로 가자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해 왔다.
" 일어났니? 수연아."
" 예."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답했다.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움찔거리지 않으셔도 되는데. 동생한테는 잘만 비교하면서 정작 내 앞에선 눈치를 보신다.
뭐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와의 사이는 아주 예전에 이미 꼬여버렸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져서 이제는 이렇게 어색한 모습으로 대화하는 게 전부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때의 나는 확실히 새로운 몸을 얻어서 들떴었고, 그랬기에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나와 어머니의 관계겠지.
어머니 입장에선 뭐든 잘하고 완벽한 딸은 다루기 어려운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그래도 어렸을 때에 나를 그렇게나 거부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자면, 지금은 적어도 사이가 좋진 않아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뭐 이런저런 사정도 있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쭉 무시 중이시고.
" ......."
물론 아침 식사에서도 이렇게 조용하다면 체할 것 같지만. 거기다가 여동생은 나의 얼굴을 뚫어낼 생각인지 강렬한 시선을 담아 노려보고 있다. 내가 기합을 넣어 꾸민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완전 미움 받고 있네.
더 있다가는 어머니도 식사를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일어나기로 했다. 밥을 좀 남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이대로 가다간 나뿐이 아니라 가족들 전부가 밥을 남길 것 같았다.
" 오늘 학교 입학식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 으응, 그래. 잘 다녀오렴."
아버지는 완전 무시 상태고 동생은 완전 노려보고, 그나마 어머니가 나의 말에 어색하게나마 답변해 주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꾸벅 숙여 답한 뒤에 내가 먹은 그릇을 씻어 놓아둔 다음,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왔다.
고등학교 입학을 환영이라도 하듯, 너무나 푸르고 맑았다.
"-좋네."
살랑대는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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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게 될 고등학교는 유연 고등학교라는 이름의 고등학교다. 이 근방에서는 명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뛰어난 학교로, 인문계 중에서는 전국에서도 손꼽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뭐 나는 딱히 학교가 명문이라서 들어온 것은 아니고, 교복이 이 근방에서 가장 예뻤기에 지원한 거지만. 잘난 척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느 고등학교에 갔었어도 나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단점이라 한다면 학교가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통학로가 상당히 길다. 처음 올라가는 사람은 조금 지칠 정도로 오르막길이기도 하다.
" 앗, 저기."
" 오오, 신입생인가."
옆에서 약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기울이니 아무래도 나를 보며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통학로 구경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어느 세인가 주목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나라도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그림같이 걸어가는 여자아이를 본다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고 꾸민 거지만 나 정말 최고. 역시 흑발 미소녀가 짱이지. 앞머리는 일자.
" 우와, 진짜 이쁘긴 하다."
" 근데 분위기가 좀 도도 하달까. 그러네."
후후, 좀 더 감탄해도 좋아. 오늘은 좀 더 신경 써서 무표정이니까. 신경 안 써도 무표정이지만. 아무튼 이래서 여자들이 꾸미는 게 아닐까 싶다. 전생에 남자다 보니 특히 지금의 남자들 심리가 더욱 공감되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팬티스타킹으로 감싸인 내 각선미도 한몫하고 있겠지.
특히 누가 디자인했는지 유연 고등학교 교복은 약간 짧은 편에 속해서 특히 시선이 가게 된다. 하지만 절대 보이지 않지. 이게 바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강철치마이며 흔히 절대 영역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교복 마이 위로 가슴의 부품을 보일 수 있다면 상당한 글래머의 증명이기에 남자들의 시선이 나의 위 아래로 고속으로 왕복하는 게 느껴졌다. .....뭐 딱히 이런 것까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한거지 절대 남성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성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은 이해는 해도 불쾌하긴 하고.
통학로를 올라갈수록 노골적으로 보는 시선이 늘어났기에 나는 점차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교문을 통과해 입학식이 시작될 강당에 도착했다. 올해부터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인지. 벌써부터 시끌시끌하며 신입생으로 가득 붐비고 있었다. 보통의 신입생이라면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선생님들의 안내를 따르면 그만이지만 나는 따로 해야 할 것이 있었으므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말하자면 신입생 대표.
예상은 했지만 입학시험 성적 결과가 내가 가장 좋았던 모양이다. 입학식 당일 강당의 음향실로 들어오라고 했던가. 그곳에 담당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모양이다.
" 음향실이 어디지."
신입생들로 북적거리는 강당에서 음향실의 입구를 찾기란 영 힘들어 보였다. 앞으로 30분 정도 있으면 입학식이 시작할 텐데 서둘러 가지 않으면.
이럴 때는 역시 물어보는 게 좋겠지. 쓸데없이 헤매다가 시간에 늦기보단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이곳엔 대부분 신입생뿐이니 잘 모를 텐데……. 선생님들은 어디 계신 거지."
벽 쪽으로 가면 통솔하는 선생님이 있지 않으려나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갑작스레 누군가가 내 오른손을 콱, 잡아왔다.
그와 동시에.
-본능적이었다. 잡힌 오른손을 왼손으로 꺾으며 순식간에 뒤에 있는 남성의 발을 치고 신체의 중심을 무너트려 쓰러트리고 충격으로 풀린 오른손과 왼손을 이용하여 넘어져 있는 남성의 팔을 꺾어 제압했다.
" 으아악……?! 뭐야, 항복! 항복! 그만 손잡은 거 실수니까 잠깐만!"
이런 일이 하도 자주 일어나다 보니 실수로 선량한 학생의 팔을 꺾어 버린 모양이다. 조금 미안.
아니 애초에 갑자기 여자 손을 잡는 것도 문제라 생각한다. 뭐 내가 과잉 방어 한 것은 맞지만. 괜히 미안해져서 바닥에서 일어나 으으, 하고 팔을 스트레칭하고 풀고 있는 남학생의 옷을 손으로 털어 주자 녀석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 아, 아니 괜찮으니까 그런 건 갑자기 하면 놀란다고!"
해애, 그런가. 괜히 옷 좀 털어 준다고 부끄러워 하기는. 아무튼 그보다 이 녀석은 시간도 없는데 갑자기 내 손은 왜 잡은 거야.
" 그래서 용건은?"
인상이 딱 보기에도 헌팅이나 예쁜 여자랑 친해지는 게 익숙한 족속이 아니다. 딱 보기에도 전생의 나처럼 사교성 없고 남자로선 조금 그 뭐냐, 순해 보이는 인상이라고 해야 할까. 반에서 한명정도 있는 항상 판타지 소설을 읽는 학생이나 오타쿠 정도의 포지션의 존재 같다.
전생의 내 포지션을 말하니 뭔가 피를 토할 것 같군.
아무튼 내가 무표정하게 무감정하게 말하자 녀석은 움찔하고 약간 물러섰다가 이내 차분히 말해 왔다.
" ...아니 지나가다가 들었어. 음향실을 찾고 있는 듯해서. 자랑은 아니지만 누나 때문에 가끔 이 학교에 몇 번 왔거든 음향실 위치를 알아서 말해 줄까 하고."
" 흐응~."
역시 인상만큼 좋은 녀석이다. 전생에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됐을 거 같은데 말야. 덕분에 선생님을 찾을 수고도 덜었고.
" 고마워. 그리고 아까 팔을 꺾어서 미안해. 괜찮다면 알려줄 수 있을까?"
전생의 나와 같은 종족을 만나다 보니 무심코 표정이 조금 풀어졌나 보다. 말투가 이렇게 편하게 나오는 거 보면. 남학생은 이런 나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넋을 잃었다가 고개를 붕붕 흔들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 말로 하기엔 사람이 너무 많으니 내가 같이 가 줄게."
" 그거 고마운걸."
이 녀석 보통이 아닌데. 전생의 나랑 비슷한 거 같았는데 좀 다르네. 나라면 나 같은 미인한테 제대로 말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알려주는 것이 다였을 텐데 안내까지 해주다니. 역시 얼굴만 봐서는 잘 모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뒤를 따라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음향실'이라고 쓰여 있는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혼자 찾았으면 절대 못 찾았을 만큼 미묘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강당 구석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 옆으로 꺾어야 보인다니, 처음 온 신입생들은 절대 알지 못할 비밀의 방이다. 나는 해리 포터가 아닌데 말이지.
" 여기야, 근데 신입생이 음향실은 왜 찾-"
는 건지-라고 물어보려 했던 모양이지만 갑자기 옆에서 뭔가가 날아들어 남학생의 안면을 무릎으로 찍고 지나갔기에 미처 말을 할 수 없었다. 카우로이라고 해야 하나 뭐냐 저거. 아무리 봐도 살인기술 이잖아. 장난이라도 저런 거 맞으면 죽는다고.
" 유상혁~~! 나를 내버리고 가더니 이런 곳에서 뭘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저기 쓰러져 꿈틀거리는 시체가 아무래도 유상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매번 저 정도로 공격을 당하는 건가. 그래서 아까 나한테 팔이 꺾였는데도 겨우 그 정도 반응으로 끝난 것이었군.
유상혁이라 불린 남학생은 몇 번 더 꿈틀거리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얼굴을 감싸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은 붉게 변한 이마를 쓰다듬으며 옆에서 흥흥~, 거리고 있는 여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 아-, 그런 건 아프다니까!"
아픈 걸로 끝나는 거냐.
" 그거야~, 네가 나를 강당에서 기다리라고 한 다음에 이런 여자랑-! 어, 어라."
여학생은 날카롭게 이야기하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깜짝 놀란 듯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순식간에 유상혁의 옆으로 이동해서는.
" 뭐, 뭐야 저거.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걸 레벨이 아닌데 어떻게 된 거야."
" 그냥 음향실을 찾고 있기에 도움을 준 것 뿐이야..."
어떻게 된 걸 설명해 주기보단, 날 '저거'라고 부른 것을 먼저 지적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두 녀석들은 나를 보며 쑥덕쑥덕 수상하게 이야기하더니-물론 여자애가 일방적으로 물은 듯했지만- 이내 가만히 있는 나에게 다가와 빙긋 웃었다.
" 미안! 변변치 못한 모습을 보여줘서. 난 김윤아라고 해. 저기 있는 유상혁이라고는 하는 애의 소꿉친구라고 해야 하나."
" 소, 꿉친구?"
" 응.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이따 같은 반에서 보면 좋겠네."
김윤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학생은 아직도 이마를 만지며 툴툴거리는 상혁을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나저나 소꿉친구라니...
세상에 전설로만 존재한다는 3대 생물체. '내 여자친구', '말 잘 듣는 여동생', '사랑스런 소꿉친구'중에서 가장 만나기 힘들다는 전설의 생물인가. 나랑 비슷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종부터 다른 대단한 놈이었구나.
앞으론 얼굴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될 것 같았다.
" 아, 음향실 들어가야지."
까먹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