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46. 대륙 공용화폐(3)
늦은 밤.
자신의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던 록펠러는 고개를 들어 열린 창가를 보았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록펠러는 창가로 다가갔다가 우연히 하늘에 떠진 달을 보게 됐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이 크고 밝았다.
“…….”
잠시간 하늘에 걸린 달을 쳐다보다 이내 창가를 닫고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땐. 전혀 예기치 못한 손님과 마주하게 됐다.
“…….”
로브 후드에서 흘러내린 머리칼을 보니 록펠러는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지? 그것도 이 시간에.’
“이자벨라?”
자신을 맞추자 그녀는 로브 후드를 벗고 새하얀 얼굴을 드러내주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찾아왔음에도 록펠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긴 무슨 일로.”
쌀쌀맞게 대하는 록펠러가 제자리로 돌아와 앉자.
그녀는 그런 록펠러와 마주하기 위해 그의 책상 앞으로 가 섰다.
“약속한 게 있었잖아요. 그 약속을 확인받기 위해 찾아왔어요.”
약속이라…….
록펠러가 그녀와 한 약속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그의 입장에선 정말 시답잖은 약속 중 하나였다.
“아, 그때 그런 약속을 했었지. 그 일만 해결해 준다면 당신에게 자유를 주기로. 그래서 결정은 한 겁니까?”
“여전히 쌀쌀맞으시네요.”
그 말에 록펠러는 팔을 벌려 손바닥까지 내비쳐주었다.
“아니면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잠깐 동안 세상을 둘러보고 왔어요. 짧지만 그래도 나름 즐거운 여행이었죠.”
록펠러는 그녀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크게 변한 건 없었는데……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더라구요.”
잠시간 뜸을 들이던 그녀가 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해주었다.
“축하드려요. 당신이 원하던 세상이 드디어 찾아왔네요.”
그 말에 록펠러가 의문을 표했다.
“제가 원하던 세상이요? 무슨 세상이 말입니까?”
“고블린 달러요. 이젠 제국뿐만 아니라 엘프들도 그 고블린 달러를 쓰고 있던 걸요.”
“아…….”
록펠러 입장에선 조금 된 이야기였다.
고블린 방크에서 고블린 달러를 취급하기 시작하자 어느샌가 엘프들도 고블린 달러를 자유롭게 쓰기 시작한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는지 제 앞의 서류를 만지기 시작하는 록펠러가 찾아온 그녀에게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다.
“뭐 뻔한 얘기죠. 애당초 그리 될 줄 알았으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돈을 찍어내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찾아왔는데, 그래도 그게 대단한 게 아닌가요?”
들었던 펜을 멈춘 록펠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요. 어차피 그 돈으로 못 하는 것도 있는데. 그걸 그리 대단하다고 하시면 제 입장에선 조금 난감하군요.”
“어떤 걸 못 한다는 거죠? 돈만 있으면 다 가능한 세상 아닌가요?”
“가령…… 예를 들어서 제멋대로 구는 당신이라든가.”
이어 고개를 내리고 제 일에 집중하는 록펠러가 건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제멋대로 찾아온 당신이라든가. 이런 건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죠.”
“…….”
잠시간 말이 없던 그녀가 일이 바쁜 록펠러를 다시 찾았다.
“원하시는 게 뭔가요?”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나요?”
록펠러 입장에선 싱클레어 가문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록펠러는 그녀가 하는 물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당신이 더 이상 싸돌아다니지 말고 조용히 집구석에 들어와 집안일에만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저한테도 좋고, 당신 아버지한테도 좋고, 그리고…….”
이 말을 굳이 해야 할까?
뭐 상관없겠지.
“당신 자신한테도 좋을 거 같군요.”
“그게 저한테도 좋다고요? 그건 왜죠?”
“왜긴 왜겠습니까.”
서류에 집중하는 록펠러가 보통의 여자라면 무조건 좋아할 그 말을 해주었다.
“남편이 돈이 썩어날 정도로 부자인데. 보통이라면 좋아 죽는 겁니다. 하긴 이제껏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아왔으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소 무덤덤하신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보통이라면 좋아 죽는 게 맞습니다.”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록펠러는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시 제 서류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진 않겠죠. 이런 거야 말 그대로 제 바람이니. 저와 약속한 내용을 강제하고 싶다면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죠.”
“제가 볼 때 당신이란 사람은 감정에 상당히 무딘 것 같네요.”
록펠러가 고개를 들고 반문했다.
“감정이라…… 그런 게 중요합니까?”
“…….”
“전 모르겠군요. 그런 게 중요한 건지. 그걸 팔아 밥 먹을 것도 아니고, 그저 순간 느끼다 사라지는 것들인데. 사실상 제게 중요한 건 삶 그 자체죠. 그것도 풍족한 삶이 제게 있어 그런 감정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잠시간 말을 아끼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던져보았다.
“만약, 당신 곁에 남는다면 저한테 좋은 일이 있을까요?”
그 물음에 록펠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돈, 명예, 그리고 내면의 평화 정도가 있겠군요.”
이자벨라가 의문을 표했다.
“내면의 평화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더 이상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그리고 세상 걱정 없이 편히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면의 평화입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럼 당신은요?”
“저요? 저는 왜?”
“당신이란 사람은 제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가요?”
그 물음에 록펠러는 들었던 펜을 놓고 오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설마…… 저한테 사랑 같은 걸 원하시는 겁니까?”
“제가 당신과 결혼하고도 따로 살았던 건 제가 느끼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랬어요. 당신과 살아도 느끼는 게 없는데 왜 제가 당신하고 같이 살아야 하죠?”
“흠…….”
생각도 못 했던 일.
보기보다 감정적인 그녀와 다르게 테페즈 가문에서 온 트리니티 테페즈는 둘째 아내로서 별 탈 없이 록펠러와 잘 지내고 있었다.
‘트리니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군. 하긴 그 여자야 나한테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럼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당신은 저와 같이 살 의향이 있습니까?”
그 물음에 그녀는 바로 답해주었다.
“네, 그게 진심이라면요.”
“그럼 다행이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록펠러가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표현이 좀 서툴러서 그렇지. 사실 당신을 제 마음속에 계속 두고 있었습니다.”
선하게 웃고 있지만, 록펠러는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상태였다.
“진심입니다.”
“진심이란 사람이…… 결혼하고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
“그거야 일이 바빠서 그랬던 거죠.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일 때문에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못한다는 거.”
어느샌가 그녀에게 다가간 록펠러는 그녀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일이 바빠 그랬던 거니. 그만 노여움을 푸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알아 다행입니다.”
과연 저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마음이 이곳에 있으니,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도 일단은 속아줄 수밖에.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과 함께 말이다.
* * *
며칠 뒤.
같은 장소에서 록펠러는 며칠 전과 똑같은 분위기에 알 수 없는 데자뷰를 느끼게 됐다.
“…….”
그날 밤도 창가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달빛이 찼다.
책상에 앉아 가볍게 서류들을 정리하던 록펠러는 저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일이야 잘 마무리됐지만.’
왠지 모르게 저 창가를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면 그때 일이 또다시 반복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자리에서 일어난 록펠러는 창가로 가 창문을 닫고 다시 제자리로 와 앉았다.
그러곤 다시 서류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러다.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게 됐다.
이스마일의 가호를 받아 그 누구도 자신을 암살할 수 없다는 건 잘 알았지만.
며칠 전에 있었던 이자벨라 일로 인해 그것도 많이 의심이 가는 상태였다.
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웬 사내가 떡하니 자신을 보며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를 본 록펠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 록펠러.”
자신을 감히 존대하지 않고 부를 수 있는 이는 이 대륙에서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한 어서 오고.’
“언제 오신 겁니까? 말이라도 하고 오시지.”
그 말에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아 있던 이한이 씩 웃어보였다.
“내가 언제 온다고 말하고 왔었나? 그냥 내 꼴리는 대로 찾아오는 거지.”
“그보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온다는 말도 없이.”
“딱히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그냥 신기해서.”
“신기하다고요?”
이한은 제국을 포함한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바가 많았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원 없이 찍어낼 수 있는 고블린 달러를 쓰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당신이 만든 그 고블린 달러가 말이야.”
“아, 그걸 물어보시려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나는 그게 이 제국에서만 쓰이는 줄 알았는데…… 이제와 보니 고블린들하고 엘프들도 쓰고 있더군.”
그 말에 록펠러가 진하게 웃어 보였다.
“좋은 일 아닙니까?”
“좋은 일이라…….”
“설마 부정하시는 건 아니겠죠? 원하는 만큼 고블린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분께서 말입니다.”
역시나 이한은 록펠러가 아는 사람이었다.
가볍게 웃어 보이는 이한이 말했다.
“당연히 좋긴 하지. 다만 신기할 뿐이지. 그게 그렇게까지 될 줄은 전혀 몰랐거든.”
“좋으면 좋은 겁니다. 그저 즐기시길.”
록펠러가 제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한은 제 앞에서도 제 일을 할 수 있는 그가 신기해졌다.
보통 남이라면 제 눈치를 보기 바빠 쩔쩔 매는 게 기본인데.
아마 이 대륙에서 자신을 이리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이는 록펠러가 유일해 보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이한에게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 몰랐던 록펠러가 고개를 들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 지금 뭐라고…….”
“고맙다고. 내가 표현이 좀 서툴어서 그런데.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 당신 때문에 제국에서의 일도 잘 풀리는 것 같고. 또 밖에서 일어나는 자잘하고 귀찮은 일들이.”
이한이 품에서 고블린 달러를 꺼내 보였다.
“이런 걸로 거의 다 해결됐거든. 나야 이걸 찍어서 해결하면 그만인데, 굳이 귀찮게 움직일 필요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거야…… 그렇긴 하죠.”
“나도 이 일에 일조한 게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신기하긴 해.”
할 말을 마친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당분간 못 볼지도 몰라.”
그 말의 의미를 록펠러는 모르지 않았다.
이한의 마지막.
그것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에 있었다.
‘벌써 소설 속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어디 가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이한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갈 데가 있거든. 여기보다 더 아득히 높은 곳이야. 그곳에 가면 어쩌면…… 내가 찾고자 했던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괜한 소리를 했군. 아무튼 고마웠어.”
말을 마친 이한이 홀연히 사라졌다.
주변엔 마나 잔향이 짙게 남았지만 록펠러는 이를 느끼지 못했다.
일반인이었기 때문이다.
‘갔나…….’
이한의 퇴장.
좀 시원섭섭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다르게 보면 록펠러에겐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완전 내 세상인가?’
소설 속 주인공은 떠나가고, 그 소설엔 한 명의 독자가 남게 됐다.
그리고 그는 대륙 최고의 금융명가를 창시한 거부가 되었다.
‘솔직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건.’
록펠러가 생각하는 진리.
‘바로 돈이지.’
그리고 그것을 무한대로 찍어내도 되는 세상.
그 세상의 주인은 바로 록펠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