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45. 감옥 협정(2)
“뭔 제안!”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골드만에게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두 번의 투자 실패로 인해 손해가 막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맥주 버블 때 맥주를 잘못 털었고, 또 국채 투기에서도 실패하셨죠.”
생각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일이었다.
골드만이 록펠러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록펠러는 이를 무시하며 제 말을 이어나갔다.
“특히나 국채 투기가 문제였죠. 아무리 고블린 방크라 해도 제국이란 나라를 사들일 정도로 무리하게 국채를 사 모았으니, 이게 똥값이 됐을 때 그 타격은 아마 상상하기 힘든 수준일 겁니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차피 보상해 주지도 않을 놈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네놈들이 그걸 보상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아픈 데를 찌르고 지랄이야 지랄은.”
“지금 벌이고 있는 대출 사업에도 전부 빨간불이 들어왔을 겁니다. 당장 가진 돈이 있어야 대출을 해주고 거기서 이득을 취할 거 아닙니까? 그래야 이번에 본 손해도 천천히 메울 테고.”
이어 록펠러가 제안을 했다.
“하여 제가 사정이 안 좋은 당신들께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당장 운용할 자금이 부족해 보이는데, 저희가 그걸 빌려드리죠.”
“뭐?”
“들으신 그대롭니다. 가진 돈이 있어야 이자장사를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저희 말고 다른 데서 돈이나 구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찢어 죽여도 모자를 놈이 돈을 빌려준다니.
보통이라면 듣지도 않을 소리였겠지만, 제국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릴 정도로 고블린 방크의 사정이 최악이었다.
두 번의 투자 실패.
그 손실액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해오던 대출 사업이 그대로 유지되든가 아니면 더 크게 확장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필요한 게 바로 자금.
그런데 투자 실패로 그 자금이 없었다.
‘빌어먹을. 돈이야 필요하긴 한데 저놈한테 빌리기엔 좀 그런데.’
그런 골드만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록펠러가 말했다.
“돈은 필요한데 저한테 빌리기가 좀 그런 겁니까?”
말하면서 실실 웃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서 갑은 록펠러였는데.
“개놈의 새끼들. 우리가 너희 더러운 돈을…….”
“돈에 더러운 게 있었습니까? 제가 가진 돈이라도 당신 수중에 들어가면 당연히 깨끗한 돈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
“어리석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까지 쭉 해왔던 것처럼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이성만 앞세우십쇼.”
이어지는 말이 핵심이었다.
“그래야 살 거 아닙니까?”
마지막 남은 재산인 와이번 군세를 이끌고 제국까지 찾아와 무리하게 돈을 요구했던 것도 전부 다 생존의 기로에 선 고블린 방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골드만은 잠시 여러 생각을 해보다 이내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그래, 여기서 감정을 앞세우는 건 미련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결국엔 저놈 말처럼 살고 봐야 돼. 사는 게 최우선이야.’
오늘 이날까지 전 종족 최약체인 그들이 떵떵거리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망하고 나면 그 동안 자신들을 어둠 속에서 벼르고 있던 이들이 나타나 복수할 게 뻔한 상황.
상황이 이러한데 감정을 앞세워 원수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저버린다?
골드만은 그건 아니라고 봤다.
골드만이 록펠러를 곱씹어보며 생각했다.
‘저놈이 아무리 더러워도 말이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골드만이 입을 열었다.
“돈을 빌려준다고?”
이제야 대화할 생각이 있어 보이자 록펠러의 미소가 전보다 더 짙어졌다.
“네, 들으신 그대롭니다.”
“이유가 뭐야. 네놈들이 우릴 도와줄 이유가 없을 텐데?”
“도와줄 이유가 왜 없습니까? 우리도 남는 게 있으니 그러는 거지. 그럼 당신들은 왜 남에게 돈을 빌려줍니까?”
“그야…… 그럼 우릴 도와주고 너희들이 얻는 게 뭐야?”
“뭐긴 뭐겠습니까. 이자 수익이지.”
상대를 깔보는 듯한 록펠러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돈은 궁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얼마나 빌려줄 생각인데?”
그 물음에 록펠러가 바로 답해주었다.
“꽤 많이 빌려줄 생각도 있습니다.”
“꽤 많이?”
“고블린 방크가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닌데. 코딱지만 한 돈을 빌려줘서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빌려줘야 의미가 있는 거지.”
골드만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다시 물었다.
“이자는?”
“이자? 이자는…….”
이자를 너무 높여서 좋을 건 없었다.
이자가 세다면 그가 분명 거절할 테니까.
‘이 정도면 적절하겠지.’
“한 5퍼센트가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골드만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혹시나 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자를 제시한 것이다.
보통 대출 이자가 6퍼센트였는데, 거기서 1퍼센트나 작았으니 말이다.
‘여기서 5퍼센트로 돈을 빌리고 기존에 해왔던 것처럼 6퍼센트대의 대출을 진행한다면 결국 1퍼센트가 남는 거잖아? 그 1퍼센트는 우리들의 확정 수익이라고.’
생각보다 달콤한 제안에 골드만은 갑작스레 의문이 들었다.
저들이 이렇게나 호의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뭘까?
“대체 이유가 뭐야? 이유가 뭔데 이쁘지도 않은 우리한테 그런 선심을 쓰는 거지? 어차피 우리 사정을 알고 있다면 대출 이자로 배짱을 부려도 되는 거잖아.”
의심 가득한 골드만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5퍼센트 대출 이자면 우리가 기존에 해왔던 6퍼센트대의 대출 사업을 진행했을 때 우리야 무조건 1퍼센트 이득을 보는 거 아니야.”
“네 맞습니다. 그렇게 되겠죠. 당신들은 저희에게 돈을 빌려가도 무조건 1퍼센트대의 확정 수익을 얻게 됩니다. 거기다 대출 이자를 더 늘린다면 추가적인 수익도 노려볼 수 있겠죠. 대출 사업에 별문제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럼 크게 이득도 못 보는 걸 대체 왜 해주는 거야? 어차피 우린 경쟁자잖아. 너희가 안 빌려주면 우리가 빌려주고 이득을 취하게 되는 그런 대출 게임인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다.
경제 규모가 지금보다 더 커지지 않는 이상 돈을 빌려갈 사람은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골드만 입장에선 록펠러가 벌여도 될 대출 사업을 굳이 자신들에게 넘겨주면서 제 이익을 깎아 먹으려는 록펠러의 태도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그 물음이 이어지자 록펠러는 가볍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야 저도 바라는 게 있으니까요.”
“바라는 게 있어?”
그 바라는 게 뭘까?
골드만은 감도 잡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는데? 대체 뭘 바라는 거야?”
“당신들이 하려는 대출 사업. 저희가 다 빼앗아 와도 됩니다. 왜냐? 당신들의 자금력이 죽은 만큼 저희가 그만큼 커졌으니까요. 저희는 여력이 되죠. 하지만 그건 제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저는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죠.”
“더 높은 곳?”
“네, 일개 채권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난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는데?”
“모르셔도 됩니다. 아무튼 저 또한 바라는 게 있으니 당신께 이러한 호의를 베푸는 겁니다. 아마 제 그릇이 작았다면 당신께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겠죠. 아마 당신들을 죽이고 그 자리를 제가 다 차지했을 겁니다.”
골드만이 록펠러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알게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래도 돈은 빌려줄 모양이군. 뭔 속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어지는 록펠러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대신 저희가 빌려주는 돈은 당신들이 극혐하는 고블린 달러입니다.”
록펠러가 고블린 달러를 빌려주겠다고 하자 골드만은 바로 반감을 드러냈다.
“지금 네놈들이 찍어낸. 그 종이 쪼가리를 주겠다고?”
이어지는 골드만의 반응이야 록펠러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떽! 누굴 개 호구 새끼로 아는 거야 뭐야! 그딴 건 니들이나…….”
“전부 두카트로 교환이 가능합니다.”
잠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그게 두카트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네, 당신들의 금화인 두카트로 교환이 가능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원래 고블린 달러는…….”
그가 알고 있기론 고블린 달러는 달란트에 기반한 제국의 신종 화폐였다.
“너네 달란트에 기반하는 거였잖아.”
“맞습니다. 지금까진 그랬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 당신과 이 감옥 협상이 잘 마무리된다면. 달란트 외에 두카트로도 교환이 가능하도록 할 겁니다.”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저희야 달란트만큼이나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당신들의 화폐인 두카트니까요.”
두 번의 투자 실패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고블린 방크의 두카트는 현재 로스메디치 가문의 금고에 저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록펠러가 저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고, 골드만 또한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하긴 우리가 잃은 두카트가 어디로 갔겠어. 다 저놈 손아귀에 가 있겠지.’
“그럼…… 그 고블린 달러를 두카트로 교환해 주겠다고?”
록펠러가 사람 좋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물론 그 속내는 달랐지만.
‘어차피 너희들에게 선택권 따윈 없지. 애당초 선택권을 가지려면 망하질 말든가.’
“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고블린 달러를 가져오시면 그에 해당하는 양만큼의 두카트를 바로 내주겠습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야 확실히 있었다.
일단 고블린 방크에선 이제까지 두카트로만 장사를 해왔었다.
그런데 여기서 고블린 달러를 빌려오게 된다면 앞으로 그들 장사는 고블린 달러로 하란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이제 알겠군. 놈이 우리한테 선심 쓰는 이유가 다 있었어.’
“그래, 네놈이 만들었다던 그 고블린 달러를 우리가 쓰는 걸 원하고 있었군. 그 종이 쪼가리를 말이야.”
그 말에 록펠러는 부정하지 않았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게 제가 당신께 선심 쓰는 이유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는 해줘야 당신들도 고블린 달러를 가져가 장사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신뢰도 없는 고블린 달러를 굳이 가져가 장사하지도 않겠죠.”
다 좋았다.
다만 골드만이 걱정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그 고블린 달러, 두카트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반신반의하며 묻자 록펠러는 자신 있게 답해주었다.
“네, 가능합니다. 앞으론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다 나중에 말을 바꾸면 우리만 좆되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이야 구두 협상이지만. 이 내용은 나중에 계약서로 작성되어 대륙 전체에 공표될 테니까요.”
록펠러가 이어 말했다.
“저희도 당신들만큼이나 신뢰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실상 서로 간 신뢰가 없다면 당신이나 저나 한순간 거지가 되겠죠. 믿음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저희와 거래를 하겠습니까?”
“…….”
신뢰를 먹고 산다는 말에는 골드만도 부정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들이 벌이는 사업은 전부 다 신뢰에 기반하는 것이었으니까.
“계약서까지 쓰고 공표한다면…….”
사실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골드만은 이게 의문이었다.
“아니, 우리가 굴리는 돈이 작지도 않을 텐데. 아무리 두카트가 많아도 그렇지. 나중에 우리가 가져온 고블린 달러를 다 두카트로 교환해 주겠다고?”
그가 끝까지 의심하자.
록펠러는 황제에게 말했던 것을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아, 이건 모르시겠군요. 만약 이번 협상이 잘 끝난다면 저희 제국 내에서 달란트는 아마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겁니다.”
“뭐? 달란트를 없애?”
“아시다시피 달란트엔 구리가 섞여 모두의 신뢰가 떨어진 상태입니다. 저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금화면 금화답게 순금만 있어야지 무슨 구리 같은 게 섞이는 겁니까. 이런 건 사기죠.”
“…….”
“그래서 제국 달란트는 전부 두카트로 바꾸어 유통시킬 생각입니다. 두카트마냥 순금 100%로 말입니다.”
이어 록펠러가 골드만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이 걱정하는 일도 없겠죠. 두카트가 부족해 고블린 달러를 교환 못 해주는 그런 불상사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