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44. 금맥전쟁 #3(2)
할 말은 잃은 그녀는 록펠러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원래 저런 남자였는데.
“당신은 그런 저의 아내가 되는 거고. 싫습니까?”
록펠러가 그녀의 표정을 보며 되묻자 그녀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원하던 결혼이 아니었으니, 싫으시다면 파혼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어렵겠지만.”
“말이라도 고맙네요.”
“아니면 평생 따로 사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야 아쉬울 게 없으니까요.”
정말 아쉬울 게 없어서 하는 말이었다.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단, 제가 이 자리서 부탁하는 걸 들어줬을 때의 일입니다.”
“부탁이라면…… 아까 전에 말하신 그 일 말인가요?”
“네. 그 일만 잘 처리해 주신다면 당신이 이후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 드리죠. 파혼이든, 평생 따로 살든, 아니면 같이 살아도 좋습니다.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십쇼. 이보다 좋은 게 있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선택의 자유를 준다는 말에 일단 동의하기로 했다.
“좋아요. 대신 제가 이후에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해 주세요.”
가볍게 웃어 보이는 록펠러는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그녀와 대화를 마친 록펠러가 떠나가려고 하자 그에게 싱클레어 가주가 찾아왔다.
“자네, 내 아이는 잘 설득했나?”
혼자 있는 걸 보니 설득하는 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그의 입장.
그런 싱클레어 가주를 향해 록펠러가 말했다.
“일단 좋게 말은 해놨습니다. 따님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조만간 움직일 테니 그러려니 해주십쇼. 전부 저와 그녀를 위한 일입니다.”
“일? 자네, 내 딸에게 무슨 일 같은 걸 시켰나?”
“좋은 아내를 둬서 뭐합니까? 필요할 땐 힘을 빌릴 수도 있는 거죠.”
“내 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텐데. 잘도 일을 시켰군.”
이후 작별인사와 함께 팔두마차에 오른 록펠러는 싱클레어 가의 대저택을 떠나갔다.
떠나가는 록펠러를 본 싱클레어 가주는 곧바로 제 딸을 찾아가 물었다.
“얘야, 왜 안 따라갔느냐?”
이때 이자벨라는 밖으로 나가려는지 꽤나 분주한 모습이었다.
“만나셨어요?”
“당연히 만났지. 널 데려가길 기대했는데, 그냥 혼자 가더구나. 네가 거절한 거냐?”
“아니요. 거절하진 않았어요. 그냥…….”
그녀 입장에선 그와의 약속에 대해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저희끼리의 일이에요. 아버지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네,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딜 가는 게냐? 무슨 일인데?”
“부탁한 일이 있어서 그 일을 해볼까 해요.”
“다른 사람도 많은데 굳이 네게 시킬 일이더냐?”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버지께서 잘 아시잖아요. 저보다 실력 좋은 마법사도 없는데, 아버지께서 이해해 주세요.”
싱클레어 가주가 돌연 표정을 구겼다.
“설마 그놈이 널 이용해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 제게 부탁한 거죠. 그리고 성공했을 때 따로 받을 것도 있고요.”
“따로 받을 게 있다고?”
“네, 제겐 좋은 거니까 그렇게 알아주세요.”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순 없는 게냐?”
“큰 건 아니에요. 다만…… 이 일은 아버지가 모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알아서 좋을 게 없거든요.”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어린 나이에 금융명가라 할 수 있는 새 가문을 창시하고 제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자.
그 속내 또한 알 수 없으며 하는 일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런 자가 자신의 딸에게 무언가를 시켰다면 분명 자신에겐 껄끄러운 일이 될 게 분명했다.
‘말은 해둬야겠지.’
“얘야, 우리 가문이 더 이상 그를 적대하지 않는 건 네가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이건 알아둬야 돼.”
가주가 하려는 말을 그녀가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멀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죠. 이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자는 적으로 둘 바에야 같은 편으로 두는 게 나아. 그리고 우리와 거리가 멀어진다면 좋아할 곳은 테페즈밖에 없을 거다.”
다 큰 딸에게 더 말을 해서 무엇하리.
“이미 다 알겠지만, 그래도 가문을 생각한다면 네가 어느 정도 희생해 줬으면 한다. 이건 아비가 아니라 가주로서 부탁이다.”
* * *
록펠러의 부탁을 받은 그녀는 왕관 전쟁 이전부터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국경지대로 향했다.
그리고 록펠러의 부탁대로 드워프로 변신하여 오크 정찰병들을 붙잡았고, 그들에게 보란 듯이 오크들의 상징인 토템을 부수며 거짓된 정보를 그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오크들은 제국과 인접한 국경 지대에서 자신들의 토템이 부서지자 그 범인을 제국으로 단정 지었고, 다짜고짜 제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빠르게 대처하는 제국에선 몬테펠트로 영지에 있던 병력 대다수를 북방에 위치한 국경지대로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이는 제국의 승리를 바라고 있던 고블린들에겐 크나큰 악재가 되었다.
“아니, 멀쩡한 토템은 왜 부수고 지랄이야!”
고블린 방크의 원탁회의에서.
격노한 골드만이 제국의 어이없는 실수에 분개했다.
“이 미련한 인간 놈들은 대체 생각이란 게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이 시국에 완전 망하려고 작정한 거야 뭐야!”
제국이 아무리 전쟁에 특화되어 있어도, 두 종족과 동시에 전면전을 벌일 정도로 여유는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오크들이 신성시하는 토템을 건드리는 행위는 오크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
제아무리 황금이 좋아도 오크들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무조건 제국군이 북방 근처로 움직여야 했다.
“빌어먹을.”
어차피 남의 일이지만 고블린들이 분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국이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그들이 사놨던 국채 가격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제국 놈들이 뻘짓을 하는 바람에 국채 가격이 30%나 떨어졌어.”
“아니, 토템은 왜 건드린 거야? 진짜 어떤 대가리에 총 맞은 녀석이 그딴 짓거리를 했냐고.”
“그야 나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벌써 30%나 떨어졌다고?”
단순히 드워프와의 전쟁만으로는 국채 가격이 그렇게 떨어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드워프가 원하는 건 제국의 멸망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옛 땅을 찾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크들은 달랐다.
이미 그들의 역린을 건드렸기에 무조건 제국과 죽기 살기로 붙을 것이다.
만약 전세가 오크 쪽으로 기울게 된다면 제국 황실이 발행한 국채는 그 의미를 잃을 게 뻔했다.
그러니 어제까지만 해도 좋았던 제국의 국채 가격이 갑자기 곤두박질친 것이다.
“이거 상황이 심각해지면 여기서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몰라. 이러다 제국이 골로 가버리면 놈들이 발행한 국채 가격이 똥값이 될 수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설마 망하기야 하겠어?”
“망하진 않겠지. 제국 놈들이 그래도 싸움은 잘하는데.”
“하…… 이런 젠장할.”
원탁회의에 모인 셋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되면 몬테펠트로 영지도 위험해지는 거잖아?”
오크들의 남하만 없었더라도 금맥전쟁은 제국이 이길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태였다.
제국에서 발 빠르게 대처한 것도 있었지만, 원래 원수지간이던 세 왕국의 드워프들끼리도 나름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교황군의 철군과 오크들의 남하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젠장 이거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국채를 내다 팔까? 손해야 보겠지만, 그렇다고 이리 놔둘 수는 없잖아.”
“아니 지금 들어간 돈이 한두 푼이 아닌데. 여기서 우리가 빼면 안 그래도 빠지는 국채 가격이 더 가속화될지도 모른다고.”
이미 맥주 버블로 쓴맛을 맛본 고블린들은 이전처럼 미련하게 대량의 국채를 시장에 내던질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랬다간 국채 가격이 한순간에 폭락하여 막심한 손해를 볼 게 뻔했으니까.
“안 돼. 이미 한 번 쓴맛을 맛봤잖아. 맥주처럼 그렇게 무식하게 던지게 되면 완전 똥값이 될 거라고.”
“그럼 어떻게 해?”
“일단 제국 쪽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자고.”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생각해봐. 오크들을 막아도 금맥전쟁에서 져버리면 그것도 문제라고.”
“이런 썅.”
“무슨 좋은 수가 없는 거야?”
머리를 맞대고 좋은 수를 찾아보려 해봤지만.
딱히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반영 된 게 제국의 국채 가격이 아니던가?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겠어.’
“내가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일단 제국 황제를 찾아가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군대를 빌려주겠다고 말이라도 해봐야겠어.”
그런 골드만의 말에 두 고블린이 반응을 보였다.
“설마 공짜로 빌려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골드만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공짜는 무슨! 매달 나가는 와이번 먹잇값만 해도 토가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공짜로 빌려줘! 떽! 어림도 없는 소리.”
“그럼 그렇지. 절대 공짜는 없지.”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는 거야. 좋아 그렇게 하자고. 지들도 망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 군대를 쓰겠지.”
이어지는 말이 중요했다.
“유료로 말이야.”
그렇게 원탁회의가 끝나자.
고블린 방크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골드만이 특사 자격으로 제국을 찾아갔다.
수십의 와이번 기수들을 대동하고 제국 황제를 알현하러 간 골드만은 소식을 듣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제국 황제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간 귀족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없어 보이는 천한 것들이었다.
‘이런 미련한 인간 놈들. 지들이 싸놓은 똥도 못 치워 가지고 저리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쯧쯧쯧.’
제국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감히 고개를 빳빳이 세운 고블린 방크의 수장이 황제를 향해 건방지게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어떤 미련한 놈이 삽질도 개삽질을 하는 바람에 그쪽 사정이 많이 안 좋다고 하던데.”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골드만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째 세워둔 대책은 있습니까?”
전 종족을 통틀어 인간보다 유일하게 육체적으로 나약한 종족.
하지만 대륙의 거의 모든 부를 독식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돈을 안 꿔간 종족이 없었다.
하여 그들은 대륙에서 가장 증오스럽고, 또한 무서운 존재였다.
그리고 이는 제국 황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져간 국채를 믿고 저러는 건가?’
저 꼴을 보기 싫어 그동안 제국에선 돈이 궁해도 국채를 절대 발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국채를 발행했고, 지금 찾아온 고블린은 제국 입장에선 머리를 조아려야 할 무서운 채권자였다.
“별문제 없으니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뭐? 문제가 없어? 문제가 없긴 왜 없어. 당장 오크들이 눈깔이 뒤집혀서 내려오고 있는데.”
오히려 이 상황에서 화가 난 건 다름 아닌 고블린 방크의 수장, 골드만이었다.
“당신들 망하면 우리도 같이 망하는 거야! 그러니까 잘하라고!”
감히 그들의 황제 앞에서 건방을 떠는 고블린이었지만.
귀족 그 어느 하나 자리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미 황성엔 그가 데려온 와이번들이 거친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고, 만약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고블린 방크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는 이가 있었으니.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재정고문이자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자였다.
“한 나라의 주인 앞에서 너무 건방지게 입방정을 떠시는군요. 누가 보면 여기가 당신 안방인 줄 알겠습니다.”
“뭐? 뭐야 넌.”
록펠러가 가볍게 웃으며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록펠러 로스메디치. 황제 폐하의 유일한 재정고문이자 제국의 화폐재무성을 총괄하고 있는 재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