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37. 화폐재무성 신설(4)
돈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돈이 많다면 많은 아군을 둘 수 있을 것이고, 테페즈가 좋아하는 전장에서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니까.
‘그럼…… 그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게 좋겠군.’
일반적인 제국 관례에선 왕관 전쟁 이후 세 명문가가 하는 일은 그들의 가문 출신 여자를 새로운 황제에게 시집보내는 일이었다.
새 황제 역시 왕관 전쟁으로 인해 갈라졌던 제국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세 가문의 여자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는 게 제국의 오랜 전통이자 줄곧 지켜져 왔던 관례였다.
하여 일라이저는 테페즈 가문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면모를 갖춘 황녀 트리니티를 기존의 관습대로 새 황제에게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서 록펠러란 자를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황제에게 힘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황후가 저자의 여동생인 데다가 교황과도 좋은 관계라면 앞으로 제국의 실세는 아마 황제가 아닌 저자가 되겠지. 황제도 교황 눈치를 봐야 하는데, 저자는 그런 것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기 가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에게 주는 게 맞겠는가?
별로 영양가도 없어 보이는 황제에게 주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제국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저 젊은 청년에게 주는 게 맞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황제도 기존에 있던 관례를 깨고 세 명문가의 처자가 아닌 다른 귀족 가문 처자를 황후로 앉혔으니, 이어지는 관례들도 이미 깨졌다고 보는 게 맞겠지. 굳이 지킬 필요까지야.’
생각을 마친 일라이저는 알현장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나가려는 록펠러를 불러 세웠다.
“제가 초반에 큰 무례를 범했군요. 저희 가문 사람들이 본래 처음 본 사람에게 그리 살갑지 않습니다. 부디 이 자리가 끝나기 전에 록펠러 합하께 용서를 구하고 싶군요.”
능구렁이처럼 찾아온 그를 록펠러가 모를 리 없었다.
‘상황을 보니 안 되겠다 싶어 나에 대한 생각을 바꾼 모양이군. 하기사 나야 돈줄인데 테페즈 사람이 날 멀리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했지. 내칠 이유가 전혀 없지. 정말 악감만 차 있다면 모를까.’
먼저 저자세로 나온 테페즈의 가주를 록펠러가 내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제국 굴지의 명문가였고, 예로부터 테페즈를 적으로 두는 가문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곧 있으면 찾아오는 게 바로 금맥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테페즈와 싱클레어 가문 사람들이었으니 록펠러도 미소로 환대해 주었다.
“아, 초반에 제게 뭐라 하셨던 일라이저 대공 전하가 아니십니까? 하하, 아까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언쟁은 벌써 잊고 있었습니다. 테페즈야말로 명실상부한 제국의 검인데, 나라를 지키는 검을 누가 싫어하고 또 적으로 두겠습니까? 방금 전 일은 잊었으니 편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속이 시커먼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필요에 의해 아군이 되기도 하고, 또 적이 되기도 하는 세상.
이런 일이야 늘상 있던 일이니 일라이저도 이전에 있었던 악감을 지우고 미소를 드리웠다.
“저희가 제국을 지키는 검이라면 로스메디치 가문은 제국을 움직이는 돈줄이 되겠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저희 둘 다 제국에 필요한 건 분명해 보이는군요. 앞으로 대공과 좋게 지내고 싶습니다.”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이로군요. 저희야말로 로스메디치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둘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던 사이.
그런 둘을 멀리서 유심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록펠러를 곱씹어보던 싱클레어의 가주, 애스틴 대공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저런 근본도 없는 녀석하고 좋게 지내려는 건가?’
그도 방금 전까지 록펠러와 언쟁을 벌였기에 록펠러와 그의 가문에 대해선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기 저 능구렁이 같은 테페즈 가주가 금융 쪽으로 밝은 로스메디치라는 이상한 가문에 손을 내밀자 그도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테페즈 녀석들은 항상 돈이 문제였지. 가진 게 많아도 워낙 깨부수는 게 많았으니까.’
아무리 봐도 저 둘의 관계는 싱클레어 가주 입장에선 상당히 불편한 것이었다.
‘저렇게 붙어버리면 결국 우리 입지만 줄어들 텐데.’
로스메디치 가문과 친해져 기고만장해질 테페즈 가문을 떠올리니.
이거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 꼴은 못 보지.’
그렇다면 그걸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적어도 이제 실세라 할 수 있는 저 가문하고 적이 되진 않아야겠지. 그냥 적당히 친분 관계만 유지한다면 테페즈 혼자 기고만장해서 망나니처럼 날뛰는 경우는 아마 없을 거야.’
그 친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두 가문 간의 혼인이었다.
본래 테페즈나 싱클레어 모두 가문의 피를 극단적으로 지켰기에 그들의 피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걸 가문의 법으로 엄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테페즈와 싱클레어의 피를 다 가진 이가 새 가문을 창시하여 제국의 패권 가문으로 자리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스메디치 가문은 너무 일반인이라 가문의 피를 지킴에 있어서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내키진 않지만. 저리 놔두면 나중에 화근이 될 테니. 싫어도 어느 정도 관계는 유지하는 게 좋겠어.’
하여 생각을 마친 그가 가문 내에 있던 처자들 중 적당한 여자를 골라보았다.
‘당장 생각나는 건 내 딸밖에 없군.’
소중한 딸을 저 청년에게 주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하지만 황제에게 주는 것보단 제국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저자에게 주는 게 더 맞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자는 차라리 같은 편으로 놔두는 게 좋겠지. 그게 힘들다면 적어도 중립은 유지할 수 있게.’
생각을 마친 싱클레어 가주이자 애스틴 대공은 자리에서 조용히 떠나갔다.
일단 나중에 기회를 봐서 록펠러와 따로 만나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록펠러와 테페즈 가주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공께서는 아직 젊으신데,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와의 관계증진을 위해 저희 가문의 처자를 안사람으로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허락하신다면 제가 고르고 선별하여 합하께 가장 합당한 처자를 드리겠습니다.”
“큼!”
록펠러가 근처에 있던 아내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하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표정이란 게 없어 보였다.
“제안이야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안사람이 있는 몸입니다.”
일라이저가 록펠러의 아내를 보았다.
전형적인 이스마일 사람으로 보였으나, 설마 그녀가 이스마일의 가주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제국에선 혼인만큼 두 가문을 잇는 훌륭한 수단이 없습니다. 부디 저희 두 가문의 우호증진을 위해서라도 저희 가문의 처자를 록펠러 공께서 데려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건 왕관 전쟁 이후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저도 이 자리에 올라오면서 결혼을 무려 네 번이나 했습니다. 전부 제국과 저희 가문을 위한 일이었죠. 본래 저희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 번 결혼하는 게 맞습니다.”
명문가의 사람이 가문과 얽힌 여러 이해관계로 여러 번 결혼을 하는 일이야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제국에선 아내의 수가 곧 남자의 권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제가 무슨 폐하도 아닌데, 굳이 결혼을 여러 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서 여러 생각을 해보던 록펠러의 아내가 거절을 하려는 록펠러를 말리기 시작했다.
“당신이나 가문을 위해서라면 분명 좋은 일이 될 거예요. 단순히 저 때문에 거절하는 건 좋아보이진 않네요.”
그 말에 활짝 웃는 건 오히려 테페즈 가주였다.
“이런 일이야 제국 귀족 사회에선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안사람이 허락했다면 부디 록펠러 합하께서 저희 가문의 처자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게 두 가문과 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겁니다.”
“일단 대공의 제안을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이 자리서 바로 결정을 내리기엔 좀 그래서요.”
“안사람 눈치가 보여 그러시는 거라면. 이미 허락했으니 큰 문제는 없겠군요.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또 뵙겠습니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그렇게 테페즈의 가주가 떠나가자.
록펠러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자신의 아내이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괜찮은 거야? 당신 말고 딴 부인이 생긴다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귀족 출신의 여자였다.
“저는 상관없어요. 오히려 저 제안을 거절한다면 나중에 테페즈 가문 때문에 골치가 아파질 거예요. 그럴 바엔 그냥 납득하고 제가 희생하는 게 낫겠죠. 모두를 위해서라도.”
과거 이스마일의 몰락 당시.
어렵게 살아남은 기억이 있던 그녀는 몇몇 가문과 척을 지고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어렸을 때 있었던 악몽은 한 번이면 족해요. 대신 첫 번째 부인은 저예요. 그 사실만 잘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테페즈 가문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선 그쪽 처자를 받아들이는 게 좋긴 하지.”
“그게 당신이나 나나, 그리고 가문과 제국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일 거예요. 저야 말리지 않을 생각이니 저쪽 가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얼마 후.
황성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마차로 이동하던 록펠러와 그의 아내는 뜻하지 않은 사람과 마주하게 됐다.
아까 전 록펠러와 알현장에서 크게 언쟁을 벌였던 싱클레어 가문의 수장, 애스틴 대공이었다.
애스틴 대공은 아직도 록펠러란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것은 그의 감정과는 별개로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잠시 대화가 되겠습니까? 나쁜 일은 아니니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록펠러는 자신의 아내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눈치껏 자리를 피해 먼저 마차에 올랐다.
그사이 록펠러와 마주한 싱클레어의 가주가 입을 열었다.
“우선 아까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선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과랄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대공께 누를 끼친 제가 죄송할 따름이죠.”
아직도 이 자리가 내키지 않았지만, 애스틴 대공은 모든 걸 잊고 오직 이성과 현실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진짜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앞서 일라이저 대공과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시던데.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가 자신을 왜 불러 세웠을까?
이유야 대략 짐작이 갔지만.
이를 모른 체하는 록펠러가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
“큰일은 아닙니다. 그냥 가문의 처자를 제게 주신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테페즈 사람들이야 돈깨나 만지는 저희들과 나쁜 관계를 가져봤자 좋을 게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서로 간 우호증진을 위해 뭐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렇군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약 그쪽 처자를 데려가신다면 저희 쪽 처자도 함께 데려가시는 게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루에 두 가문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을 줄이야.
“저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고, 또 이런 제안을 받으니 당혹스럽군요.”
“이미 결혼을 하셨는데도 테페즈 가문의 처자만 데려가신다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될 겁니다. 이왕 데려가실 거면 다 데려가시는 게 서로에게 좋은 거겠죠.”
말을 하면서도 애스틴 대공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당신이란 사람이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러십니까?”
“앞서 언쟁한 것도 있고, 리옹 길드는 예로부터 저희 아래에 있던 방코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관계가 당신이나 나나 서로에게 좋게 다가갈 것 같지는 않군요. 하여 제 딸을 드릴 생각인데, 부디 거절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딸이라…….”
“심사숙고하여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싫습니다만. 다르게 보면 당신과 그 가문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법명가답게 화려하게 사라지려는 그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엔 서로 웃는 얼굴로 봤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