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37. 화폐재무성 신설(2)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으나, 아까 전 곤욕을 치렀던 테페즈 가주를 떠올리고선 애써 화를 삭였다.
‘참아야지. 저런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돼.’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근처에 있던 테페즈 가주를 살펴보니 은근슬쩍 자신을 비웃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이 자리서 망신을 당한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내가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거짓말은 무슨. 증거라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자 록펠러는 미리 준비해 온 가짜 고블린 달러를 꺼내 보였다.
“이건 칼만 전하께서 왕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거 같으니 상황을 뒤집으려고 만들었던 위조된 고블린 달러입니다.”
그다음으로 꺼낸 것은 진짜.
“그리고 이건 저희가 만든 고블린 달러입니다.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진짜 고블린 달러엔 위조된 고블린 달러를 구별할 수 있는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진짜면 푸른빛, 가짜를 만나게 되면 붉은빛을 띠게 되죠.”
록펠러는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진짜와 가짜 고블린 달러를 서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진짜 고블린 달러가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보셨습니까? 이처럼 저희가 발행한 고블린 달러는 위조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이런 가짜가 만들어져도 충분히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손에 든 고블린 달러를 정리한 록펠러가 알현장에 있던 싱클레어 가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싱클레어 가문에서 고블린 달러를 위조하려 했다는 증거요? 증거야 산 증인이 있습니다.”
산 증인이 있다는 말에 자리에 참석해 있던 귀족들이 술렁였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 일을 지시한 칼만 전하이십니다.”
수렁이는 귀족들이 칼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왕관 전쟁에 패한 황자는 보통 죽이는 게 오랜 관례였다.
하지만 크리스찬이 싱클레어 가문과의 우호를 위해 칼만 황자를 살려두었고, 그 일은 이제 싱클레어 가문의 치욕으로 남게 되었다.
“칼만 전하께서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 자리서 한 거짓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자, 그럼 어디 깨어 있는 사람의 변명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저도 뭐라 할지 궁금합니다.”
“…….”
대답하지 못한 싱클레어 가주가 주변 눈치를 보다 이내 돼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칼만의 지시였다면 내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귀족들이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를 알면서도 철면피로 외면하는 싱클레어 가주가 뻔뻔스럽게 제 말을 이어나갔다.
“가주라 해서 가문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가문 사람의 실수가 있었다면 록펠러 합하께 사죄를 하고 싶습니다.”
영혼 없는 사과였다.
그러니 록펠러 역시 영혼 없이 받아주었다.
“가주가 무능하니 그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굉장히 도발적인 언사에 싱클레어 가주, 애스틴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으나 이내 그 화를 다스리며 좋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제 무능으로 폐를 끼쳐드렸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말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테페즈 가주가 설핏 웃어 보였다.
자신이 당할 때는 기분이 더러웠지만 저 찢어 죽여도 모자랄 싱클레어 가주가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길드에 속한 방코에서 과거 없는 금화를 담보로 차용증서를 발행했던 일이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일은 절대 아니었고, 싱클레어의 가주이신 애스틴 대공께서 말하신 대로 그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였습니다.”
록펠러가 운을 떼자 모두는 다시 한번 술렁였다.
그러다 한 귀족이 궁금증을 가지고 록펠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록펠러…… 합하.”
합하라는 호칭이 낯설었는지 록펠러를 부름에 있어 잠시 버벅거렸던 그는 곧바로 유창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정말 몰라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저희가 가진 차용증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평민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까지 모조리 길드로 돌아간다면. 저희는 문제없이 맡긴 금화를 돌려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는 정말 몰라서 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록펠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들에게 거짓을 말했다.
“물론입니다. 여러분의 차용증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저희 리옹 길드가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진행한다는 건 여기 계신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는 저희가 가진 만큼의 금화를 담보로 여러분께 차용증서를 내드린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그러자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귀족들은 무지한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안도하기 시작했다.
“하긴 제국에서 가장 많은 금화를 가진 곳인데.”
“리옹 길드야. 이번에 유니온하고 합쳐져서 더 커졌다고. 그런 곳이니 우리 금화는 안전하겠지.”
“당연한 소리야. 정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터지기 전에 발 빠르게 가서 바꾸면 돼. 아직은 이자 때문에 그럴 생각은 없지만. 나중에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하지만 모든 귀족이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다.
개중에 몇몇은 록펠러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들은 방코에서 해왔던 기만적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싱클레어의 가주, 애스틴이었다.
“하하하, 이번엔 록펠러 합하께서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는군요.”
이때다 싶었는지 씩 웃는 그가 모두를 향해 당당히 발언하기 시작했다.
“저것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당장 몇몇 방코 업자들만 불러다가 과거 그들이 벌였던 추악한 짓이나 현재 길드 사정에 대해 물어보면 전부 탄로 날 거짓말이란 소립니다!”
이에 질세라 록펠러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 부도덕한 길드원이야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과거 몇몇 방코 업자가 그리 행동했던 것도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제가 길드장이 된 뒤로부터 그런 불미스러운 과거는 천천히 지워가는 중입니다.”
“거짓말!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를 전부 다 금화를 바꾼다면 당신 길드에선 그걸 다 금화로 바꿔줄 수 있는 겁니까!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아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록펠러는 오히려 웃어 보였다.
“그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 의심스럽다면 저희에게 찾아와 맡겨놓은 달란트를 가져가시면 됩니다.”
싱클레어 가주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한둘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다 가야 합니다! 한둘이 가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금화를 예금한 평민들도 마찬가지고!”
그러자 피식 웃어 보이는 록펠러가 그를 향해 말했다.
“말 잘하셨군요. 고작 몇 명이 와서 금화를 교환해 봤자 의미도 없는 걸 대체 왜 걱정하고 계시는 겁니까? 설마 여기 있는 분들은 애스틴 대공이 한 말에 혹해 절 찾아와 피곤하게 금화를 교환해 가져가실 겁니까? 그럼 그 기간 동안 못 받는 이자는요? 그 이자는 애스틴 대공께서 나중에 물어주기나 한답니까?”
술렁이던 귀족들 중 한 명이 애스틴 대공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애스틴 대공. 만약 대공께서 하신 말이 틀렸다면 그 기간 동안 저희가 손해 본 이자를 물어주실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싱클레어 가주가 생각하기로.
굳이 사람들이 귀찮게 방코에 찾아가 자신들의 금화를 다 찾아올 리가 없었다.
리옹 길드는 그 어느 때보다 신용이 굳건한 상태인데, 그 누가 그들의 건전성을 의심한단 말인가?
그러니 사실 확인이 진행되어도 결국 자신만 패한 채 실험에 참가한 여러 귀족들에게 적잖은 이자를 물어줄 게 뻔했다.
“그게 아니라…… 애당초 저자가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절대 저 말에 속지 마십쇼. 저 사람은 지옥에나…….”
예전 같았으면 당연한 말이었으나.
교황과의 친분, 그리고 높아진 방코 업자들의 위상으로 인해 이제 그 말은 의미가 없어졌다.
“아무튼 이자놀이나 하며 남을 기만하는 아주 파렴치한 고리대금업자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록펠러는 그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어주었다.
“쯧쯧,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저런 머리로 어떻게 한 가문의 수장이 됐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누구한테 한 소립니까? 분명히 경고하겠는데.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애스틴 대공. 애당초 이기지도 못할 싸움은 대체 왜 거신 겁니까? 막말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당신 말을 듣고 내게 찾아와 번거롭게 금화를 가져갈 거 같습니까? 그럼 그 기간 동안 못 받은 이자는 대체 어떻게 할 건지 대책은 있습니까?”
“…….”
화를 삭이는 싱클레어 가주는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나름 귀족이란 것들이 이리도 금융이나 방코 일에 무지할 줄이야.
‘사람들이 방코의 일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저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벌고 있는지 알게 되면 아마 뒤집어질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쪽에서 어떤 식으로 일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가소로운 발언이었다.
가볍게 웃어 보이는 록펠러가 모두를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희는 항상 정직하려고 하지만.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선 저기 계신 애스틴 대공의 말처럼 대중을 향해 약간의 기만을 하는 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난데없는 말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저게 무슨 소리야?”
“기만을 하는 게 좋다니?”
“나도 모르겠는데?”
“일단 들어보자고.”
록펠러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금화가 없어지거나 이자 지급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돈은 그대로 있고, 만약 저희가 없는 금화를 담보로 고블린 달러를 발행한다면 그 돈으로 제국을 지킬 군대를 고용할 수도 있고, 또 다리를 짓거나 성당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의문을 가진 누군가가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공통으로 가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문제는 없는 겁니까?”
록펠러의 지론이 있었다.
일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금융에 대해 무지하고 모를수록 좋다고.
‘웃긴 건 이 분야에서 내가 가장 전문가라는 거지. 그러니 여기선 내 말이 곧 법이야.’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 록펠러의 말에 모두는 충격에 휩싸였다.
허공에서 돈을 찍어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니.
하지만 록펠러의 말에 바로 반박을 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해봤자 싱클레어 가주 정도 있었으나, 그도 금융에 대해선 록펠러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방면은 황제의 재정고문이자 새로 신설될 화폐재무성의 재상이 될 록펠러가 유일한 전문가였다.
‘문제가 없긴 왜 없어. 당연히 인플레이션 문제가 있겠지. 하지만 그런 부분은 너희가 몰라도 돼. 알려고도 하지 말고. 나도 알려줄 생각이 별로 없거든.’
“이 방면에서 제가 단연 독보적인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 제가 감히 말하건대. 적정한 수준에서 화폐의 양만 잘 조절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여기서 록펠러는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없는 금화를 담보로 고블린 달러를 더 찍어낸다 해도. 여러분이 가진 금화는 절대 안전할 겁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록펠러는 이 순간 황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리 사전에 그와 합의를 본 내용이었다.
“저희가 없는 금화를 담보로 고블린 달러를 찍어낼 수 있도록 제국 법으로 확실히 보장해 주십쇼. 그래야 저런 쓸데없는 소리가 안 나오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