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37. 화폐재무성 신설(1)
왕관 전쟁에서 이긴 크리스찬 이스마일은 황제로부터 황제의 성을 이어받아 크리스찬 콘스탄틴이라는 새 이름으로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황제로 즉위하는 날.
왕관 전쟁으로 양분되었던 제국의 모든 가문과 세력들이 한자리에 모여 황도에서 열린 즉위식에서 새 황제를 축하해 주었다.
크리스찬은 록펠러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몇몇 귀족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의 누이동생인 루시아 로스메디치를 자신의 아내이자 제국의 황후로 맞이하였고, 제국의 화폐를 통제할 권한을 로스메디치 가문에 넘겨주기 위해 화폐재무성이란 곳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초대 재상 자리를 자신의 재정고문이기도 한 록펠러에게 그대로 넘겨주었다.
제국 황도에 위치한 황성.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새 황제를 대면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새 황제는 준비된 말을 모두에게 공표하며 로스메디치 가문의 위상을 다시 한번 전하였다.
“앞으로 제국의 모든 화폐는 로스메디치 가문이 발행할 것이며, 이를 통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게 될 화폐재무성의 자리는 록펠러 로스메디치에게 양도하겠다. 이어 재상이 될 그에게 그 위치에 걸맞은 합하라는 칭호를 내리니, 그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제국 번영에 이바지하며 제국에 충성할 것을 내 앞에서 서약하거라.”
모든 귀족들 앞에 서서 새 황제와 황후가 된 자신의 누이동생을 똑바로 쳐다보는 록펠러가 당당히 목소리를 내주었다.
“소인, 록펠러 로스메디치에게 제국의 모든 통화를 통제할 권한을 이양해 주신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로스메디치 가문은 제국 황실을 도와 제국 부흥에 이자비할 것을 황제 폐하께 맹세합니다.”
곧이어 술렁이는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깊고 또 그의 위상이 대단한 것은 알았으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국의 모든 화폐를 통제할 권한까지 주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여 몇몇 권위 있는 귀족들이 감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테페즈 가문의 수장이자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한 일라이저 테페즈였다.
“폐하, 저자는 저 자리에 있기 전까지 고리대금업이나 하는 일개 길드장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뭘 얼마나 안다고 제국 통화 화폐를 전반적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를 반박하고 나선 것은 다름 아닌 록펠러였다.
“일개 칼잡이 따위보단 낫지요.”
그 말에 모두는 또 한 번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제국에서 테페즈 가문의 수장이기도 한 그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정도로 배짱 좋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일라이저 본인도 당황했는지 두 눈을 깜빡이며 저 뭣도 아닌 돈벌레 인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온 것이다.
“아닙니까? 아니라면 한번 말해보시죠.”
그가 침묵하자 록펠러는 근처에 있던 다른 귀족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물었다.
“그럼 여러분께 다시 묻겠습니다. 저같이 한평생 돈놀이를 하던 사람이 제국의 통화 화폐를 잘 다스리겠습니까? 아니면 칼이나 좀 만지던 저자가 잘하겠습니까? 답은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무시도 이런 개무시는 없었다.
한평생 이런 자리에서 치욕을 맛본 적이 없었던 일라이저가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언성을 높였다.
“말이 심하시군요!”
이에 록펠러는 차분히 응수해 주었다.
“말이 심하다니요. 먼저 시비를 건 게 누군지 아십니까?”
“당신이 이 나라의 화폐 통제권을 가져간다는데, 이에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야 당연한 반발을 했을 뿐입니다.”
“반대 의견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제가 그 자리를 맡는 건 저와 제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 번영을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를 잘 알기에 제게 그 자리를 맡기신 거 아니겠습니까?”
표정을 구긴 일라이저를 대신하여 지켜보던 싱클레어 가주까지 나섰다.
“폐하, 일개 가문이 제국의 모든 화폐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가는 것은 저희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부디 그 생각을 다시 한번 재고해 주십시오.”
본래 이런 자리에서 두 명문가의 가주가 같은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서로 동의하는 게 있다면 한쪽이 침묵하면 그만이었고,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게 있다면 언제든 편을 갈라 싸우기 일수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제국 역사에 있어서도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저 앙숙 같은 두 가문이 서로 같은 의견을 내서 갑자기 벼락출세한 한 가문을 견제할 줄이야.
달리 보면 새로 등장한 로스메디치 가문의 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대체 왜 저자에게 제국의 화폐 통제권을 넘기시려는지 저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녕 제국에 대한 폐하의 지배력을 낮추고 싶으신 겁니까?”
그 말이 새 황제에게 닿자 크리스찬은 저 멀리 보이는 이스마일의 가주이자 록펠러의 아내이기도 한 실비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왕관 전쟁 이전에 그와 약속한 내용이다. 재정과 재무에 관련해서는 그가 나보다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또한 내 바람이기도 하니. 그대들은 더 이상 불만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제국 화폐의 통제권은.
겉으로 봐서는 로스메디치 가문이 가져간 것으로 보였으나.
실상 다르게 보면 이스마일 가문과 나눠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비아의 정체는 계속 숨기는 게 좋겠군. 만약 실비아가 이스마일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소문이 돌게 되면 저 두 가문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건 로스메디치 가문이 아니라 우리 이스마일의 힘이 강해지는 일이니까.’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황제가 한 말에 두 가문의 주인들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로스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 정도로 밀어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납득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테페즈 가주인 일라이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설마 꼭두각시인 건가?’
2황자의 자질이 모자라 이를 전적으로 보완한 게 로스메디치 가문이라면.
지금 일어난 일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었으니까.
‘아니야. 2황자가 그렇게 모자라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어. 물론 이스마일이 몰락하는 바람에 크게 신경도 안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바보처럼 굴 이유가 없는데?’
“다시 한번 그 생각을 재고해 주십쇼. 저와 테페즈 가문은 제국과 황제 폐하께 누를 끼치기 싫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테페즈 가문의 수장이었기에 감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가 한 말은 그 생각을 재고하지 않았을 시 제국과 등을 지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술렁이는 귀족들 사이로.
감히 할 수 없는 말이 록펠러란 자에게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무리 테페즈 사람이라도 자리에 따라 할 말과 못 할 말이 있기 마련인데. 너무 건방지게 입방정을 떠신 건 아닙니까?”
“뭐? 입방정이라고?”
화가 난 일라이저가 힘을 보이려 하자 알현장 전체가 흔들리며 근처에 있던 몇몇 귀족들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하였다.
만약 자제력을 잃었다면 큰일이 났어도 정말 큰일이 났을 터.
하지만 마법 보호구로 자신을 지키고 있던 록펠러는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이한과 근처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믿고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입방정을 입방정이라 하는 게 뭐가 잘못됐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이 자리에서 감히 그 발언을 한 것은 제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시겠다는 겁니까?”
“그대가 그따위로 나를 욕보이는데 못 할 게 뭔가!”
“당신이야 말로 주제를 알아야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그딴 망발을 지껄인단 말입니까!”
오히려 주눅 들지 않고 맞서는 록펠러를 보고서 일라이저는 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 두려울 게 없는 로스메디치 가문의 수장인지라 저렇게 행동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으나, 당장 이 자리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저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고리대금업자 주제에 감히 저 따위로 날 욕보인다고?’
하지만 그도 한 가문의 수장이었다.
그러니 쉽사리 이성의 끈을 놓진 못했고, 더군다나 이 자리엔 자신의 몰락을 그렇게나 바라는 능구렁이 같은 싱클레어 가주도 있었다.
록펠러보다는 싱클레어 가주를 더 의식하는 일라이저가 근처에 있던 싱클레어 가주를 살펴보았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 꼬락서니를 보니, 아마도 여기서 자신이 개판을 치는 걸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망할 싱클레어 같으니라고. 같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저기 숨어서 웃고 있는 꼴이라니. 내가 저 입꼬리부터 다 찢어놔야 했었는데.’
차가운 이성이 필요한 상황.
그는 흥분되는 감정을 빠르게 잡아내기 시작했다.
“크흠! 폐하, 제가 순간 자제력을 잃어 너무 경솔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부디 방금 전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희 테페즈는 항상 제국과 폐하의 편입니다.”
테페즈의 가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하자 이를 지켜보던 황제는 나름 이해했다는 듯이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반발이야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좀 심하긴 하군.’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봐주는 건 이번뿐이다.”
일라이저가 답했다.
“네, 폐하.”
테페즈 가문이 수그리자 이번엔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싱클레어 가문이 나섰다.
“한 나라의 통화 화폐를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록펠러…… 합하께서는 길드에서 발행되는 고블린 달러를 시중에 유통시켜 사람들에게 가치도 없는 고블린 달러를 쓰게 하려는 게 아닙니까?”
록펠러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치가 없다니요. 저희가 발행한 고블린 달러는 언제든 가치 있는 달란트로 교환이 가능합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러자 가소롭다는 듯이 싱클레어 가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하하, 저를 바보로 아시는군요. 그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드에서는 없는 금화를 담보로 고블린 달러를 발행한다고 하죠?”
그 말에 몇몇 귀족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코에서 없는 금화를 담보로 고블린 달러를 찍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방코에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건 명백한 범죄입니다. 록펠러 합하께선 사람들이 전부 바보로 보이십니까? 그들을 기만하고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저희 같이 깨어 있는 사람들은 당신이 저지른 그 추악한 행태를 절대 모르지 않습니다.”
이어 그가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께선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저자가 기만으로 저희 모두를 우롱하려 했다는 것을요. 만약 그 사실이 제국 사회에 퍼져 나가게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부디 이 점을 깊이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록펠러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렇게나 깨어 있는 분께서 같잖게 저희 고블린 달러를 위조하려 하셨습니까?”
또다시 술렁이는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에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그러했다.
그 말에 표정을 구긴 싱클레어 가주가 아주 뻔뻔하게 답해주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입이 잘못 달리셨는지 거짓말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하시는군요. 확실히 깨어 있는 분이라 그런지 거짓말도 아주 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