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35. 왕관 전쟁(4)
그날 밤.
절망에 빠져 있던 1황자에게 3황자의 제안이 닿았다.
답이 없는 1황자만큼이나 3황자도 답이 없었던 것이다.
모든 참모진이 모인 자리에서.
3황자가 보낸 병사가 3황자의 뜻을 1황자에게 전해주었다.
“임시 동맹을 맺자고?”
“네, 칼만 전하께서 크리스찬 전하에 맞서기 위해 임시 동맹을 제안하셨습니다.”
그 말에 같이 있던 참모진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웠는데도 칼만은 내게 동맹을 제안한 것이냐?”
정말 격렬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한때는 둘 중 하나가 왕관 전쟁에 승자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칼만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하신 제안입니다.”
교황과의 만남이 실패하고, 거기다 트리니티까지 잃은 1황자에겐 3황자의 동맹 제안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 같았다.
하지만 그게 썩었는지, 아니면 튼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 됩니다. 칼만 전하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동맹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2황자 전하가 이끄는 군대에 잡아먹히게 될 겁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하울 전투에서 칼만 전하를 거의 잡을 뻔하다가 놓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아직 앙금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모진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런 관계로 3황자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1황자의 고심도 깊어져만 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쉬운 게 없다면 분명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게 많은 지금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임시 동맹은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서 응하겠다고 해라. 지금으로선 답이 없어.”
“만약 응하신다면 내일 이른 아침. 하스만 숲의 늑대 골짜기에 최소 호위 병력만 데리고 찾아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참모진들이 거칠게 반발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거절하셔야 합니다. 분명 속임수일 게 뻔합니다.”
“속임수라면 저흰 그대로 끝입니다.”
“하지만 답이 없는 건 칼만 전하도 마찬가지인데, 설마 동맹을 제안하고 비열하게 전하를 노리겠습니까?”
칼만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1황자가 소식을 전한 병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라고 한 거지?”
“서로 간의 신뢰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 믿음이 없다면 서로 함께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1황자는 모르지 않았다.
그간 원수처럼 지내오던 사이였다.
그런 자신과 칼만이 임시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서로간의 신뢰가 없다면 언젠간 무너질 모래성 같은 동맹이었던 것이다.
‘크리스찬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한데.’
“그것 말고는 안 되는 것이냐?”
그 물음에 병사가 단호히 답해주었다.
“네, 칼만 전하께서는 그게 마지막 제안이라고 하셨습니다.”
1황자가 깊은 침음성을 흘리자 근처에 있던 참모진들이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무 무모합니다. 그러다 사로잡히거나 문제라도 생기신다면…….”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서로 간의 신뢰도 없이 어떻게 임시 동맹을 맺겠습니까? 저희가 그 정도 신뢰를 보여야만 칼만 전하께서도 저희를 믿고 힘을 합쳐 교황군을 대동한 크리스찬 전하와 맞서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 생각이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것도 동의한다.”
선택은 1황자의 몫이었다.
‘트리니티까지 붙잡힌 마당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칼만이 함정을 팠더라도 당장 득세하고 있는 크리스찬을 생각해 본다면 날 그리 쉽게 치진 못할 것이다.”
그러자 몇몇 참모진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하오나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저도 위험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손으로 제지하는 1황자가 끊었던 말을 이어주었다.
“그런다고 칼만과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내게 미래는 없다. 그저 기다리다가 크리스찬을 기다리는 꼴이 되겠지.”
1황자도 기가 찼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이 현실속에서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게 칼만의 함정일지라도 그에게 있어 선택권은 없었던 것이다.
“내일 칼만이 부른 곳으로 찾아가겠다. 가서 전하거라. 내가 거기서 기다리겠다고.”
소식을 전한 병사는 다시 칼만에게 돌아갔고, 1황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새벽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막사를 나선 1황자는 최소 병력만 데리고 칼만과 만나기로 한 하스만 숲의 늑대 골짜기까지 찾아갔다.
도착한 장소에서 1황자는 투레질하는 말을 놔두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숲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군.’
사자의 피가 흐른다는 테페즈 사람일지라도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스산한 기운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부디 내 촉이 틀려야 할 텐데.’
이곳에 오기까지 1황자는 잠도 자지 않고 칼만의 의도에 대해 계속 고민했었다.
정말 자신과 동맹을 위해 부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잡고 2황자와 대립구도로 들어갈 것인지.
‘답이 없는 건 칼만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때.
안개 저편에서 소란스러운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1황자와 그의 병력들을 포위하려는 움직임 같았다.
‘느낌이…….’
그리고 얼마 후.
1황자를 찾아온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칼만의 정예 부대였다.
그들은 오로지 1황자를 잡기 위해 하스만 숲의 늑대 골짜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말을 타고 나타난 칼만은 최소 병력과 함께하던 1황자에게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라이얀 형님.”
두꺼운 모피 코트를 걸치고 찾아온 칼만은 붉은색과 푸른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장발의 사내였다.
촉이 좋지 않았지만 1황자는 고개를 들어 말에서 내리지도 않는 3황자를 보았다.
“답이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긴 합니다.”
그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3황자와 그의 정예 병력들이 창칼을 눕히며 1황자와 그의 병사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3황자가 대동한 병력 중에 다수의 마법사도 함께하고 있었다.
이를 본 1황자는 어이가 없어 다시 칼만에게 물었다.
“이렇게 되면 크리스찬만 좋은 꼴이 될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방도가 없는 1황자와 다르게 3황자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크리스찬에겐 교황군이 붙었고, 또 제국에서 가장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는 리옹 길드가 뒤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1황자도 3황자와 싱클레어 가문의 사정에 대해 모르진 않았다.
“나와 이제까지 대치하면서 너와 싱클레어 가문도 손해를 많이 봤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나와 힘을 합치지 않고 혼자서 크리스찬에게 맞서겠다고?”
“형님과 싸우면서 손해야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타개할 방법을 찾아냈죠.”
“타개할 방법?”
“저희 외가가 마법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쇼.”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길드의 차용증서는 저희가 공급하는 종이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마법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설마 길드의 차용증서를 위조할 생각이냐?”
“못할 것도 없죠. 키우던 개가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그딴 식으로 나오고 있는데. 본래 주인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경고한 대로 싱클레어의 힘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하긴…… 너희가 작정하고 위조한다면 적어도 돈 문제는 없겠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1황자가 느끼기엔 왠지 자신의 판단 착오로 보였다.
자신만큼이나 3황자도 답이 없을 거란 생각이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이끈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구나.’
퇴로가 다 차단된 상태에서, 최측근인 트리니티도 없이 최소 병력만 가지고 저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천하의 라이얀 테페즈가 이런 식으로 갈 줄이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1황자가 내뱉은 말에 3황자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래도 형님이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형님마저 골치 아프게 행동했다면 제 입장에선 더욱 곤란해졌을 겁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1황자가 3황자를 향해 마지막 말을 던져주었다.
“부디 왕관 전쟁에서 패하길 바란다. 미리 가 있을 테니, 천천히 따라오도록.”
그 말에 3황자는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형님 뒤를 쫓아갈 동생은 제가 아닌 크리스찬이 될 겁니다. 그럼 편히 가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