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35. 왕관 전쟁(3)
교단에서 왕관 전쟁에 참여한 2황자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하자 제국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동안 이스마일 가문을 이교도 집단으로 치부하며 그들을 암암리에 탄압하던 교단에서 갑작스레 그 태도를 바꾼 것이다.
또한 교황군까지 결성하여 2황자 지원에 나서자 왕관 전쟁에 참여한 두 황자 진영에서 난리가 났다.
이제까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2황자 진영이 갑작스레 급부상을 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 그동안 2황자를 방치하다시피 놔두었던 리옹 길드에서도 대대적인 용병 부대를 고용하여 2황자 지원에 나서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3황자 진영과 극한의 대립으로 이미 한계에 다다른 1황자는 초췌한 몰골의 참모진들을 보면서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이제 와서 입장을 바꾼 거야.”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교단이었다.
리옹 길드야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입장을 표명해 왔기에 크게 놀랄 것은 없었지만.
이스마일을 죽일 듯이 탄압하던 교단에서 갑작스레 그 태도를 바꾼 것은 1황자나 다른 사람 모두 의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러자 같이 있던 참모진 중 하나가 여기저기서 들었던 내용에 대해 알려주었다.
바로 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리옹 길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옹 대성당을 증축시킬 때 이를 지원했던 세력이 리옹 길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엔 리옹에서의 일이었기에 그저 길드 세력이 그들의 지역 교구를 지원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선출된 교황 성하를 보니 이게 다 그쪽 길드장의 큰 그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으나, 1황자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칼만과 그렇게 대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숨기에만 급급했던 2황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것은 마치 두 사냥감이 싸우다 갑자기 나타난 사냥꾼만 이득을 보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뭘 어떻게 해야.’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교황군과 용병 부대를 앞세운 2황자에게 왕관 전쟁의 승리를 내줄 판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트리니티 역시 잦은 전투로 인해 피로가 극도로 누적된 상태였다.
상대 진영에 위치한 여러 장수들과 격전을 벌인 탓도 있었지만, 며칠 전 싱클레어 출신의 마법사인 이자벨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힘을 썼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트리니티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1황자가 고개를 들어 자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참모진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들 역시 마땅한 해결책을 가진 얼굴들이 아니었다.
‘이제와 칼만과 연합을 한다고 해도 칼만이 응할지도 모르겠고.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그림이 좋지 않았다.
자신과 칼만의 싸움이 될 줄 알았던 이번 왕관 전쟁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이런 패배감을 맛볼 줄이야.
하지만 이렇게 패할 순 없었다.
여기서 패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에 1황자는 필사적으로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다.
‘상황을 뒤집으려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교단의 입장을 다시 바꿔야만 해.’
“우선 칼만과 휴전하고 내가 직접 교황 성하와 만나보겠다.”
그것이 1황자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참모진들도 동의한 모양인지 따로 목소리를 내는 자가 없었다.
전부 침묵으로 긍정한 것이다.
그러다 한 명이 목소리를 냈다.
“그게 전하의 뜻이라면 곧바로 3황자 진영에 임시 휴전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아마 그쪽에서도 갑자기 급부상한 2황자 진영이 신경 쓰여 저희의 휴전 요청을 무조건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게 돼야 돼. 그리고 교단에서 입장을 바꾼다면…….”
그래도 개판이 될 것은 뻔해 보였다.
일단 자신과 칼만 진영은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고, 거기다 2황자에겐 자금력이 풍부한 리옹 길드가 버티고 있었기에 장기전으로 간다면 분명 2황자 쪽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 대신 네가 길드장을 만나봐.”
1황자의 말에 트리니티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만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그 길드장이란 사람, 이미 만나봤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있을 거야? 만나서 뭐라도 해야지.”
“만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길드장을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었으나, 이미 이한과 이스마일의 비호를 받고 있어 그런 쪽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 길드장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녀석을 물리적으로 처리하는 건 어려워. 암살도 아마 힘들 거야.’
“죽이는 건 힘들겠지?”
대놓고 묻자 트리니티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부터 저어주었다.
“그건 힘들 거야. 알잖아? 그때도 이한을 불러냈던 거.”
“골치 아픈 녀석이군. 하지만 어떻게든 처리해야 돼. 구워삶는 게 안 되면 어떤 식으로든.”
그러자 지켜보던 참모진 중 하나가 목소리를 내주었다.
“길드장 본인이 힘들다면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인질로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근에 결혼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결혼? 길드장이 결혼도 했나?”
길드장의 혼인 소식이야 1황자의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몰랐던 내용에 대해 묻자 해당 소식을 알린 참모진이 곧바로 답해주었다.
“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거 좋군. 본인이 힘들다면 그 아내를 인질로 잡으면 되겠어.”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트리니티가 반감을 드러내주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녀 입장에선 탐탁지 않은 일이었으나, 1황자 입장에서는 그런 치졸한 짓까지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
“여기서 지게 되면 난 죽은 목숨이야. 나중에 가면 그 일에 대한 비난은 받을 수 있겠지.”
길드장의 아내를 납치한다면 왕관전쟁 이후 길드장과의 관계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우선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이 왕관 전쟁에서 이기는 게 더 중요해.”
혹시나 해서 그녀는 참모진에게 길드장이 결혼했다는 여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만약 어느 유명한 가문의 처자라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문 출신하고 결혼한 거야?”
“제가 알기론…… 평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민? 평민하고 결혼했다고?”
“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길드장이 평민 출신이라지만 그렇게나 돈이 많은 사람이 굳이 귀족 처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평민인가?”
1황자도 이 부분에 대해선 의문이었는 재차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았다.
“네, 평민 출신이 맞습니다.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 정말 의외군. 그래도 자작가 정도 되는 가문 출신 하고 충분히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 이제 기억났는데 같이 일하던 비서랍니다.”
“비서?”
트리니티가 한마디 해주었다.
“일하다 서로 눈이 맞았나 보지.”
길드장이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마 이스마일은 길드장 아내까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 일은 네게 맡길게.”
치졸한 짓이었으나, 그래도 왕관전쟁의 승리를 바라는 그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내키진 않지만…….’
“알았어. 그렇게 할 게. 대신 나중을 위해서라도 죽이는 건 안 돼.”
그 말에 1황자도 동의했다.
“그냥 겁주려는 거지, 길드장과 적이 될 생각은 없어.”
“그럼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할게.”
고개를 주억이는 1황자가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교황과의 만남을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두 일만 잘 해결된다면 2황자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겠지.’
하루 뒤.
갑자기 급부상한 2황자 진영으로 인해 1황자와 3황자 진영 간에 임시 휴전이 맺어졌다.
휴전 소식이 들려오자 1황자는 급히 법황청으로 찾아가 교황과의 면담을 신청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새 교황은 1황자와의 만남을 계속 거부했고, 며칠간 법황청 근처에서 머물며 교황과의 만남을 소원했던 1황자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만나지도 않겠다는 건 이미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3황자도 직접 사람을 보내 교황과 면담을 신청했지만, 자신처럼 계속 거절을 당했단다.
‘내가 직접 찾아갔는데도 만나주지 않았는데, 밑에 있는 부하를 보낸다고 해서 퍽이나 만나줄까? 어림도 없는 얘기지.’
아무튼 성과 없이 돌아온 1황자는 마지막 카드인 길드장 아내에 대해 기대를 걸어보았다.
‘교황군이 붙는 건 골치 아픈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교단의 입장이 바뀐 것도 전부 다 그 길드장 작품이었으니까.’
교황과 만나지 못해 교단의 입장을 바꾸진 못 했지만, 길드장 아내를 납치하여 길드장을 협박할 수 있다면 그 일로 교단의 입장을 바꾸는 게 가능해보였다.
‘제발 그렇게 돼야 할 텐데.’
며칠 뒤.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가 없었다.
길드장 아내를 납치하기 위해 떠난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그녀가.
세상에 길드장 아내를 납치하다가 오히려 그쪽 인질로 잡히게 됐단다.
해당 보고를 받게 된 1황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트리니티가 붙잡혔다니.”
트리니티 테페즈.
테페즈 가문에서도 자신과 같은 피를 물려받고 칼날여왕이라는 이명까지 가진 극강의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런 누이동생이 일을 실패해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도리어 붙잡혔다니!
이스마일 가주라도 나서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게…… 길드장 아내라는 사람이…….”
1황자에게 보고하는 장수는 트리니티를 따라 길드장 아내를 납치하기 위해 리옹에 갔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스마일 사람이었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했느냐?”
“길드장 아내가 이스마일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가문의 직계인지 트리니티 황녀 전하께서 고전을 면치 못하시다가 결국 길드장 아내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평민과 결혼했다는 말에 설마하니 그의 아내가 이스마일 출신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게 사실이냐?”
“네, 그리고 길드장 아내가 절 풀어주면서 전하께 이렇게 전하라 했습니다.”
무언가를 보고하려는 장수는 죽을상이었다.
그에게 길드장 아내를 잡아와 바쳐도 모자를 판국에 오히려 협박 메시지를 전하게 될 줄이야.
“왕관 전쟁을 포기하지 않으면 트리니티 황녀 전하를 죽이겠다고…….”
“…….”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나마 돌파구라 생각했던 두 가지 일이 모두 실패하고 만 것이다.
“…….”
1황자는 리옹에서의 일을 보고하는 장수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목울대로 침을 삼키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표정을 보니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모든 걸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가면서 드는 느낌은 오로지 깊은 패배감뿐.
일생의 첫 번째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