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34.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 #2(4)
그러다 정신을 차린 록펠러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여자였던…… 겁니까?”
그녀가 미리 정체를 밝혔음에도 록펠러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제가 여자로 안 보이셨나요?”
“그런 게 아니라…… 전 여자로 변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혹시 모르잖습니까? 리카르도란 사람이 살아 있고, 그가 여자로 연기하고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까지도 절 쭉 속여 왔는데.”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믿지 못했다니.
그녀도 나름 각오하고 한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불쾌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여자 맞습니다. 그리고 좀 불쾌하네요. 절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전혀 몰랐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이건 제가 본의 아니게 실례를 끼쳐드리고 말았군요.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지켜보던 2황자가 나섰다.
“실비아가 변장을 자주 해서 록펠러 공께서 잠시 오해하셨나 봅니다. 실비아는 여자가 맞습니다.”
“리카르도라는 사람을 너무 완벽히 연기하셔서 저도 오해를 하고 말았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제야 록펠러는 자신이 줄곧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애당초 본모습으로 날 찾아온 게 아니었군. 그래…… 생각해 보니까 나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서 그때부터 본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거야.’
“그럼…….”
록펠러가 그녀와 자신을 손으로 잇는 시늉을 했다.
“저희끼리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답해주었다.
“네, 절 아내로 맞아주신다면. 이스마일은 당신이 제국의 화폐를 통제하는 걸 허락할 생각입니다. 이것 외에는 당신을 믿을 길이 없거든요. 그리고 여기 계신 크리스찬 오라버니도 납득하실 테고요.”
그녀가 2황자에게 시선을 주자, 2황자도 이내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문과 자신을 위해 희생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게 실비아의 뜻이라면…… 저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화폐에 대한 통제권을 드리죠. 단, 록펠러 공께서 실비아를 데려가셔야 합니다.”
무언가 슬퍼 보이는 2황자에게 실비아가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너무 상심하실 필요는 없어요. 록펠러 공에 대해선 나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지켜봤거든요. 제게 있어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존중해 줘야지.”
둘의 대화야 어찌 됐든.
록펠러도 크게 불만은 없는 상태였다.
‘다행히 예쁜 데다가 이스마일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면 앞으로 엉뚱한 녀석에게 암살당할 일은 없겠군.’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의 남편이 됐으니, 좋으나 싫으나 이스마일의 가호를 받을 수 있다고.
‘설마 과부가 되고 싶겠어? 싫다면 날 필사적으로 지켜주겠지.’
“저 역시 당신과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지만.”
록펠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록펠러의 눈빛이 따스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신의 뜻이라면. 당신을 제 아내로 기꺼이 맞아들이겠습니다.”
* * *
리옹 길드장이 일하는 비서와 눈이 맞아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질 무렵.
길드의 지원 아래 시작되었던 리옹 대성당의 증축은 성공적으로 끝마쳐졌다.
또한 제국에서 거장이라 불리는 안드로라는 화가를 초빙해 예배당 천장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작업을 추진했었는데, 이 작업은 리옹 대성당의 증축이 끝남과 동시에 완성되어 곧바로 대중들에게 공개가 되었다.
예배를 마친 신도들이 신의 붓으로 그린 듯한 거대한 천장 벽화를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어주었다.
“감탄밖에 안 나오는군. 세상에 저런 벽화가 존재할 줄이야. 저기 있는 요한 님을 봐. 너무 거룩해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듣고 옆에서 같은 천장 벽화를 보고 있던 다른 신도들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천장 벽화 말이야. 안드로라는 거장이 밤낮을 새워가면서 그렸다는 모양이야.”
“안드로라…… 나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돈깨나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자기 초상화 좀 그려달라고 안달이라면서?”
“나도 그 얘기는 들었지. 하지만 부르는 게 값이라 일반 귀족들도 엄두도 못 낸다고 하던데.”
“길드 재정이 얼마나 빵빵하면 단순히 초상화도 아니고 세상에 천장 벽화를 그려놨군.”
“저 정도 그림이면 정말이지 돈을 엄청 썼겠어.”
대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천장 벽화였지만.
모두가 만족해하는 건 또 아니었다.
일부 신도들은 어울리지도 않게 요한 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그려진 한 인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그림에서 말이야. 길드장 위치가 저게 맞는 거야?”
“나도 저건 불만인데 뭐 어쩌겠어? 저걸 그려달라고 돈을 준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인데.”
“세상에 교회에서 가장 싫어하는 고리대금업자가 요한 님과 저렇게 가까이 그려질 줄이야. 요한 님은 이걸 아시나 모르겠어.”
방코 업자는 신에게 버림받아 지옥에나 떨어질 자들이라고 하여 교회에서 천대받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방코 업자가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그려졌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만 것이다.
“요즘은 돈이 많으면 지옥도 안 가는 모양이야. 저런 그림을 보고서 누가 방코 업자들이 지옥에 간다고 하겠어?”
“나도 그 생각을 했어.”
“아니, 교회에선 방코 업자들을 싫어하는 게 맞는 거야?”
“나도 모르겠는데. 예전이야 그랬지만…… 지금은 뭐 베르키스 주교 각하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리옹 길드장이잖아? 교회도 증축해 줬겠다, 또 천장 벽화까지 그려줬잖아.”
“그러고 보니 여기 증축하는 데 드는 비용도 전부 리옹 길드에서 내줬다면서?”
모두가 그 말을 한 신도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것까지 전부 대준 거야?”
“그렇다니까. 천장 벽화나 증축하는 비용까지 전부 대줬다는 소문이야.”
“진짜 돈이 억수로 많은 모양이군. 나는 그래도 교회 증축 비용은 교회 재정으로 해결한 줄 알았어.”
“교회에서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도 리옹 교구면 돈은 좀 있겠지.”
“그보다 리옹 길드가 블랙라벨 유니온과 통합되고 나서 힘이 너무 강해졌어. 그놈의 고블린 달러인지 뭔지는 이제 달란트보다 더 자주 보이고 말이야.”
한 신도가 가지고 있던 고블린 달러를 꺼내 보였다.
“지금 이걸 말하는 거지?”
“그래, 그거 말하는 거야. 요즘은 그게 돈이잖아.”
“그런데 그 고블린 달러라는 거 전혀 문제가 없는 거야? 나도 별생각 없이 쓰고 있기는 한데…… 뭔가 영 찝찝하단 말이야.”
“문제가 있다고 한들 뭐 어쩌겠어? 방코에 가면 알아서 달란트로 바꿔주는데.”
“그렇기야 하지.”
“그래도 아직까지 달란트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야.”
“그런 사람이 있다고?”
“어, 있다고 하나 봐.”
“아니, 왜 쓰기 좋은 고블린 달러를 두고 달란트를 쓴다는 거야? 그거 불편하잖아.”
모두의 이목이 쏠리자 그가 그 이유에 대해 답해주었다.
“나도 잘은 모르는데, 아마 방코 업자를 못 믿는 모양이던데?”
길드 혹은 방코 업자들에 대한 불신.
몇몇은 공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 고블린 달러를 황실에서 인정해 준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일개 길드에서 내준 한낱 차용증서에 불과하잖아? 이건 엄연히 말해서 돈이 아니라고. 진짜 돈은 달란트지.”
“그래도 받아주는 곳이 많으니까 쓸 때 편리하긴 하지. 종이라서 휴대하기도 편하고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아직 고블린 달러가 완벽한 건 아니야. 길드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달란트만 고집하고 있으니까. 그 있잖아. 몇몇 가게 주인들이 무조건 달란트만 받는 거. 고블린 달러는 아예 치를 떨더군.”
“아, 그런 데가 몇 군데 있긴 하지. 거긴 무조건 달란트만 달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들 중 몇몇은 고블린 달러를 절대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 길드가 작정하면 그걸 무한대로 찍어낼 수 있다나 뭐라나.”
“무한대로?”
그 말에 누군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솔직히 누가 알겠어? 길드에서 작정하고 찍어내면 길드장이나 길드원이 아닌 이상 그걸 누가 알겠냐고.”
“에이, 그래도 그 고블린 달러를 쓰는 사람들이 전부 다 찾아가서 금화로 바꾸면 바로 문제가 될 텐데. 길드에서 과연 그런 멍청한 짓을 할까? 난 아니라고 봐.”
“나도 마찬가지야. 길드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래 맞아. 길드도 나름 생각이 있겠지. 안 그래도 요즘 덩치가 커져서 믿음이 가고 있는데 말이야. 예전 같았으면 블랙라벨 유니온도 있어서 리옹 길드에서 나오는 고블린 달러를 선뜻 선택하기가 힘들었는데, 요즘은 뭐 그런 것도 없잖아.”
“맞아. 그렇지.”
천장 벽화와 고블린 달러에 대해 신나게 떠들던 신도들이 떠나가고.
얼마 뒤, 베르키스 주교의 부름을 받게 된 록펠러가 리옹 대성당에 찾아왔다.
베르키스 주교와 만나기 전.
록펠러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그려진 대형 벽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벽화에서 요한 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훌륭하군.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려진 위치도 예술이야.’
지옥에나 떨어져야 할 자신이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그려졌다는 것은 그것대로 상징하는 바가 컸다.
록펠러가 만족감에 고개를 주억이고 있을 때.
그에게 찾아오는 이가 있었으니.
그를 불러낸 베르키스 주교였다.
“자네 왔군.”
베르키스 주교는 혼자 오지 않았다.
록펠러의 동생이자 자신의 비서인 레오 로스메디치를 데리고 나타났다.
“주교 각하, 부르셨습니까? 레오도 왔구나.”
이제 앳된 모습이 많아 사라진 레오는 어엿한 사제의 모습으로 베르키스 주교의 옆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레오는 주교의 부름으로 찾아온 록펠러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록펠러 큰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잘 지내고 있지?”
“네, 큰형님과 주교 각하의 배려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레오 걱정은 하지 말게. 내가 옆에서 밀착 감시를 하고 있으니까. 내가 항상 챙기니까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네.”
“감사합니다 주교 각하.”
록펠러가 그에게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호출을 하셨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자네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 이렇게 부르게 됐네. 우선 자리를 옮기지.”
“네.”
그렇게 둘은 따로 자리하게 됐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베르키스 주교가 운을 뗐다.
“자네 덕분에 교단 내에서 내 입지가 아주 빠르게 올라가는 중이라네. 이야기야 대충 들었지만, 그런 발상을 할 줄이야. 세상에 그 콧대 높던 콜만 대주교가 나한테 찾아와 사정을 하더군.”
“하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자네가 그랬다면서? 나를 지지해야 이자를 올려주겠다고.”
“네, 그게 주교 각하께 좋은 일이 될 것 같아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 말에 베르키스 주교가 만족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네.”
“아닙니다. 주교 각하가 잘되셔야 저도 잘되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고. 이번에 법황청에 불려가게 됐어. 아마도…… 교황 성하께서 새 궁무처장을 임명하실 모양이야.”
궁무처장.
교황의 비서라 불리는 그 자리는 교단에선 교황 다음으로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그 자리,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요하지. 예로부터 그 자리는 차기 교황 성하가 맡는 자리였으니까.”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주교 각하께서 그 자리를 맡으시는 겁니까?”
“그건 알 수 없네. 다만 교황 성하께서 날 부르시는 걸 보니 아마도 내가 필요하신 모양이야. 그게 비어 있는 궁무처장의 자리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 들어 늘어난 성금 때문에 부르신 건지는 알 수 없네. 그건 가 봐야 알게 되겠지.”
“그렇군요.”
“한데 만에 하나 성금에 대한 일로 부르신 거라면. 그땐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분명 이번에 리옹 대성당을 증축시킨 일로 자극을 받으신 거겠지. 어쩌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건지도 몰라.”
“만약 성하께서 무언가를 요구하신다면 주교 각하께서도 그에 합당한 걸 요구해 보십쇼. 어쩌면 그 비어 있다는 궁무처장의 자리를 주교 각하께서 앉으실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록펠러의 제안에 이미 그런 생각을 해봤던 베르키스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나도 이미 그런 생각을 했었네. 다만 그렇게 하려면 나도 힘이 있어야지.”
그 말에 록펠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돈이야 충분한데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가서 원하는 걸 얻으십쇼. 그리고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제게 요청하시면 됩니다.”
이어지는 말은 베르키스 주교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저야 가진 게 돈밖에 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