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34.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 #2(3)
록펠러는 품에서 고블린 달러를 꺼내 보였다.
“그것으로 제가 바라는 일은 이 고블린 달러가 제국의 달란트를 대체할 새로운 화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겁니다.”
“제국을 위해 좋다고 하셨습니까?”
“네, 왜 그런지 궁금하십니까?”
2황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록펠러의 말이 이어졌다.
“현 달란트 체제로는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죠.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을 하려면 당장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잠시 고심해 보던 2황자가 답했다.
“달란트를 더 찍어내야겠죠.”
“맞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달란트를 찍어내면 그만입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그 달란트를 찍어낼 황금이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금이 없다면…….”
짧게 생각해 보던 2황자의 표정이 굳었다.
황금이 없다면 달란트를 찍어낼 수가 없었다.
“힘들겠군요. 그나마 구리를 섞으면 되긴 하지만…….”
이미 화염전쟁의 여파로 제국 달란트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배척받는 금화가 됐다.
정상적인 통화가 아니라는 소리.
거기다 더 구리를 섞는다면 당장이야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치솟는 물가로 인해 제국 내부가 소란스러워질 것은 뻔했다.
2황자가 조용해지자 록펠러는 실비아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크리스찬 전하는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그럼 이스마일 가주께서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 같습니까?”
그 물음에 실비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제야 미소를 드러내는 록펠러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블린 달러를 보였다.
“그렇기에 이 고블린 달러가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이 고블린 달러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제국 황실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접니다.”
2황자가 의문을 표했다.
“그럼 당신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해결책이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이 고블린 달러야 필요한 만큼 찍어내면 그만이니까요.”
록펠러가 다시 물었다.
“제가 이걸 찍어내면서 황금이 필요할 거 같습니까?”
그 물음에 2황자가 고블린 달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지적했다.
“하지만 그 고블린 달러는 달란트를 담보로 유통되는 거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전하 말씀대로 이건 달란트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굳이 달란트로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건 이 고블린 달러에 대한 신용이 확고해질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겁니다.”
“그럼 그 말은 달란트가 없는데도 고블린 달러를 찍어내어 시중에 유통시키자 뭐 그런 말입니까?”
“네, 정확히 맞혔습니다.”
2황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록펠러 공께선 모두를 기만하자는 겁니까?”
“크리스찬 전하, 제 말을 그렇게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현 화폐 체제에서는 어찌 됐든 제가 말했던 위기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록펠러는 근처에 있던 실비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 그렇습니까? 이제까지 저와 함께 있었다면 제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전부 아시지 않습니까?”
다행히도 그녀는 화폐 시스템에 너무 무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간 록펠러에게 배웠던 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위기가 찾아온다면 달란트 체제보단 고블린 달러에 의한 화폐 체제가 더 효율적인 것 같기는 해요. 남을 속인다는 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2황자는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가 없다면 당신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서 오히려 그게 제국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록펠러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 제가 만든 이 고블린 달러의 신용이 무너지는 걸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하의 우려대로 제가 원하는 만큼 돈을 찍어 어떤 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것은 전부 국익을 위한 것입니다. 개인 사리사욕? 물론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 대상이 굉장히 한정적이라면 그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히 미비할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신경 쓸 테고요.”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그걸 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록펠러가 피식 웃었다.
“그 특권은 여러분도 같이 누리는 겁니다. 설마 저 혼자 돈을 찍어내서 저만 쓴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시겠죠?”
록펠러가 대번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이 나라엔 황제 폐하가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치를 제가 안 보겠습니까? 폐하께서 돈 좀 달라고 하면 저야 냉큼 찍어다 바칠 뿐입니다.”
록펠러는 아직도 말이 없는 2황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폐하가 되실 분께선 돈 걱정 없이 이 세상을 사실 텐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2황자는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건 나머지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닙니까? 적어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분명히 분노할 겁니다.”
록펠러는 보란 듯이 고개를 저어주었다.
“크리스찬 전하. 저도 전하의 심성이 올곧고, 신앙심이 독실하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군주라는 것은 때론 냉혹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록펠러의 말이 이어졌다.
“전하께서 바라고 계시는 행복한 세상. 제가 단언하건대 그런 세상은 절대 없습니다.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그 밑에서 권세를 휘두르는 귀족이 되고, 그리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나머지는 그들을 위한 훌륭한 노예가 되겠죠. 이건 세계 역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죠. 그리고 그런 사회에 가장 효과적인 화폐 체제가 바로 제가 고안한 고블린 달러입니다. 이건 합법적으로 그들의 부를 갈취해 올 수 있는 아주 획기적인 화폐 시스템입니다.”
표정이 좋지 못하던 2황자에게 록펠러가 물었다.
“설마 제가 말한 것들을 전부 부정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전하, 결국 세상은 잔인한 겁니다. 그걸 충분히 아실 분이 오히려 장점밖에 없는 고블린 달러 체제를 거부하시려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 반박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제껏 록펠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실비아였다.
“저희와 함께하려는 당신의 마음이야 믿고 있지만, 잇속만 밝은 당신 자체는 믿을 수 없거든요. 오히려 저는 당신이 두려워요. 그런 특권 같은 걸 함부로 줬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차라리 록펠러 입장에선 그녀처럼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편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 말했어야지. 무슨 황자라는 사람이 그 흔한 특권의식도 없어서야. 예전에 만났던 1황자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저를 못 믿는다는 겁니까?”
2황자도 불편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화폐를 지배할 권리는 오직 황실만 갖는 겁니다. 그걸 일개 가문에서 가질 순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요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뭐하러 승산도 없는 전하를 밀어드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록펠러의 시선이 실비아에게 머물렀다.
“누가 말한 것처럼 제 잇속만 밝은 사람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2황자나 실비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록펠러가 한 말은 동의할 수 있으나, 록펠러란 사람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실비아는 그가 보기보다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2황자에게 강조하듯 말했었다.
그렇기에 몇 번을 고심해 보던 2황자는 결국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화폐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은……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록펠러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럼 전하께서도 제 도움을 바랄 수 없을 겁니다. 그 정도 대가도 없는데 제가 그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하를 도와드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록펠러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한을 부를까 말까로 고민하던 사이.
여러 생각들을 해보던 실비아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어렵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건가요?”
록펠러의 생각과 다르게 2황자를 이 자리까지 부른 건 그녀 자신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이스마일의 부활을 바라는 자.
그렇기에 그녀는 이 만남이 꼭 의미가 있어야만 했다.
그녀가 간절하게 나오는 듯하자.
록펠러도 이대로 포기하긴 싫었는지 목소리를 내주었다.
“그 정도는 들어주셔야 저도 필사적으로 크리스찬 전하를 밀어주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고작 누이동생을 황자 전하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왕관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할지도 모르는데?”
“…….”
“전 제 누이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크리스찬 전하께 제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을 보내려는 것 또한 제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자리서 필요한 건 서로 간의 신뢰였다.
하지만 그 신뢰는 록펠러의 누이동생과 2황자의 혼인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계속 고심하던 그녀도 결국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좋아요. 대신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설마 자신에게 조건을 내걸 줄이야.
록펠러가 흥미롭게 생각하다 이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게 뭡니까? 들어나 보죠.”
자신은 돈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대체 무슨 조건을 걸려고?
하지만 그 조건이 무엇인지 2황자는 어렴풋이 눈치챈 것으로 보였다.
“실비아…… 그건.”
“괜찮아요, 오라버니. 어떻게 보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하지만…….”
“전 괜찮다니까요.”
뭐가 괜찮다는 건지.
록펠러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뭐지? 뭔 조건이길래 저러는 거야?’
“그런데 그 조건이란 게 뭡니까? 저야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사람인데.”
록펠러는 그녀가 내걸 조건에 대해서는 감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이내 마음을 굳혔는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까 이렇게 말하셨죠? 서로 간의 신뢰를 위해서 당신의 누이동생을 크리스찬 오라버니와 혼인시켜야 한다고.”
“네, 그게 확실하니까요. 구두 약속이라는 것도 결국 나중에 말을 바꾸면 그만인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저희도 당신에게 이 조건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누이동생뿐만 아니라 당신도 저희 가문 사람과 혼인을 하셔야 합니다.”
무얼 요구하나 했더니, 서로 간의 신뢰 구축을 위한 록펠러 본인의 혼인 문제였다.
‘나보고 이스마일 처자와 혼인을 하라고?’
다행히도 록펠러에겐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혼인이야 하면 그만.
‘한 나라의 화폐 통제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 대신 너무 못생기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조건이라면 저도 거부할 수는 없겠군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게 저에 대한 불신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납득해야죠.”
말을 하면서 록펠러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랑 혼인하라는 겁니까? 이스마일 가문에 적당한 분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예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록펠러는 두 눈만 죽어라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