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31. 다른 길(3)
2황자를 자기 동생과 혼인시킨다는 말에 그녀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말대로 한다면 나중에 2황자가 약속한 것과 달리 다른 소리를 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2황자는 신앙이 독실하고 성실하여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간 1황자와 3황자에 가려져 조용히 묻혀 지낸 느낌이 짙었으나, 그녀가 얼핏 아는 그를 떠올려봤을 때도 그녀가 가정했던 일은 일어나기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전부 계획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교단의 존재였다.
‘그럼 교단 쪽도 나름 생각에 둔 게 있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2황자가 왕관 전쟁에 참전하여 강력한 후보로 여겨지는 두 황자를 꺾고 황위를 계승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교단의 태도가 지금과 사뭇 달라진다면 말이다.
‘모르겠어. 물어본다고 여기까지 알려줄 것 같지는 않고.’
“다 계획이 있으신 거 같은데. 정작 중요한 교단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록펠러는 여전히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것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습니다. 하여 저희는 노선을 확실히 정했으니 앞으로 싱클레어 가문과 함께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해서 이거 너무 죄송하게 됐군요.”
건방져도 너무 건방졌다.
참다못한 제이슨이 나섰다.
“이스마일만 두렵고, 우리는 안 두려운가 보지?”
그러자 록펠러는 바로 받아쳐주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그쪽에선 저흴 안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지금 제국의 두 가문을 제외하고서 가장 강력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입니다. 그런 저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이번에 있을 왕관 전쟁의 승패가 갈릴 지도 모르는데.”
이어지는 미소는 나름 도발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저희가 우습게 보이십니까?”
겁을 주려다 오히려 한 방 먹게 된 제이슨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시선을 흘렸다.
저자를 어떻게 하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거칠게 나가려는 제이슨과 다르게 록펠러란 사람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애당초 여기서 말썽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승산이란 게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러기엔 저자가 믿고 있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다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여기 오는 것까지.’
“마법사를 상대로 당돌한 일반인은 처음 봤네요. 보통은 벌벌 떨기 바쁜데.”
이자벨라의 말에 록펠러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드리운 채 그녀의 말을 건성으로 공감해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럴 겁니다. 마법사라 하면 껌뻑 죽겠죠. 저 같이 믿는 구석이 전혀 없다면요.”
“저희가 지금 이런 평화로운 대화 말고 다른 식으로 나온다면 엄청 곤란하실 텐데요?”
“자신 있다면 한번 해보시죠. 일이 어떻게 될지 저도 궁금합니다. 단,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선 나름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만약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긴다면 적어도 이스마일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정체를 드러낼 터.
‘애당초 여기에 이한 외에 대적할 사람이 별로 없는 이스마일의 가주가 버티고 있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그리고 저 역시 위협을 받았으니 응당 되갚아드릴 생각입니다. 기대하십쇼. 곧 있을 왕관 전쟁에서 저희 길드가 어떤 식으로 나오게 될지.”
그녀가 불쾌했는지 그를 잠시간 노려보았다.
‘너무 당돌해. 뭘 믿고 저러는지 전혀 모르겠어.’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상대는 나이트로드라 불리는 싱클레어 가문의 수재였다.
“그건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그녀가 생각했을 때 록펠러란 사람은 이곳에 이스마일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배짱은 절대 부릴 수 없을 터.
제이슨도 칼날 같은 공기를 맡으며 은근히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주변 공기가 너무 가시 같았다.
‘은근히 거슬리는 곳이군. 나름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던 거야.’
어쩌면 두 마법사에게 있어 이곳은 하나의 트랩과도 같은 곳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 먹잇감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그게 미끼라는 것을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록펠러를 찾아온 둘은 잠시간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제이슨은 이내 수긍한 듯 조용해졌다.
한동안 록펠러를 곱씹어보던 이자벨라가 마지막 경고를 위해 입을 열었다.
“저희가 여기서 조용히 물러난다 해도 길드 입장에선 나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 역시 테페즈만큼이나 자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싱클레어 가문에서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특수한 종이를 가지고 하는 협박이라면. 그 협박 제게 의미가 없을 거란 걸 분명히 알려드리고 싶군요.”
그 말에 제이슨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한낱 돈놀이나 하는 방코 업자가 허세란 허세는 너무 부리는군.’
마법은 사실상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싱클레어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세상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를 확신하는 제이슨이 나섰다.
“싱클레어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우리의 도움 없이는 그대들은 곧 파국을 맞이하게 되겠지. 당장 시중에 돌고 있는 차용증서만 위조할 수 있다면.”
제이슨이 보란 듯이 고개를 저어주었다.
“그대들은 끝이다.”
그러자 록펠러가 품에서 고블린 달러를 꺼내 보였다.
그가 말한 그 차용증서였다.
“아, 설마 이걸 말하시는 겁니까?”
록펠러가 꺼낸 차용증서를 둘은 곧 알아보았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이상한 종이 화폐였다.
“그건…….”
“이건 말입니다. 고블린 달러라고 하는 겁니다. 앞으로 이 제국의 새로운 화폐가 될 예정이죠.”
고블린 달러를 보이는 록펠러를 두고 이자벨라는 다시금 제이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둘의 미묘한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고, 잠시 후 그 시선을 치운 이자벨라가 록펠러를 향해 말했다.
“저희가 가진 힘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꿈은 이룰 수 없을 겁니다.”
이어지는 말이 중요했다.
“마법이란 걸 너무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이를 받아치는 록펠러 역시 대단하긴 마찬가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오히려 이자벨라 아가씨께서 해주시는군요. 맞습니다. 마법을 너무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이어 록펠러가 둘에게 작별의 인사를 날려주었다.
“이걸로 서로 간 이야기는 대충 끝난 것 같은데. 그럼 잘 살펴 가시길. 부디 다음에 만났을 땐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두 마법사 입장에선 불쾌하고도 기분 나쁜 만남이었다.
그간 충견처럼 자신들을 따르던 길드라는 세력이 새 우두머리를 맞이하고 나서 이렇게 변할 줄이야.
이젠 따르는 개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신들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이자벨라가 제이슨과 다르게 자리에 서서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록펠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더 하실 말이 있습니까?”
록펠러가 묻자 미묘한 시선만 날리던 그녀가 이내 등을 보였다.
그러곤 앞서간 제이슨을 따라 가게에서 떠나갔다.
떠나는 둘을 본 록펠러는 조용한 가게 안에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생각보다 조용히 떠나갔군. 아마도 이스마일 때문에 신경이 쓰였겠지.’
곧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록펠러는 두 가문의 피 튀기는 전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곧 두 황자를 내세운 테페즈 가문과 싱클레어 가문이 전면전을 벌이겠군. 그리고…….’
왕관 전쟁 속에 피어난 두 가문의 싸움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자금이 부족해진 싱클레어 가문에서는 차용증서의 위조라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록펠러가 모르지 않았다.
‘꼴에 마법사 가문이라고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해도 결국 그들도 사람인 이상 사정이 궁해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간 방코에서 쓰이는 차용증서는 모두 싱클레어 가문에서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어떤 특수한 종이로만 발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자금이 궁해진 싱클레어 가문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바로 차용증서의 위조였다.
‘미안하지만 저들이 바라는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거야. 그전에 이 고블린 달러는.’
이한에 의해 만들어질 그것.
‘위조가 불가능한 절대 화폐가 될 테니까.’
한편 가게에서 나온 두 마법사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둘은 마차에 오른 직후 방금 전 만났던 길드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태도가 바뀐 길드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길드장이란 사람이 그때 그 소년일 줄이야…… 역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이슨이 말하자 고심하던 이자벨라도 공감해 주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길드에서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어차피 결정이야 가주님께서 하시는 거지만. 길드 정도라면 아가씨 선에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이스마일이 나설 거야.”
암살명가 이스마일.
사실상 팔다리가 다 잘려 은퇴 수순을 밟고 있는 몰락한 가문이었으나, 한때 그 위상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위세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니 쉽게만 생각할 순 없었다.
“곧 있으면 왕관 전쟁인데 여기서 이스마일까지 건드리는 건 좋지 않아. 당장 테페즈 쪽 신경 쓰기도 벅찬데.”
“하지만 길드를 저런 식으로 놔두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
그들이 길드의 태도를 고깝게 여기면서도 확실하게 나서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왜 이스마일일까? 나라면 테페즈 아니면 우릴 골랐을 텐데.”
그녀의 말에 제이슨도 공감하는 눈치였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말로는 자기가 고른 사람이 황좌에 오른다고 떠들고 있지만. 이건 실상을 전혀 모르는 소리입니다.”
제이슨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름 확신하고 있었다.
“한때 제국 굴지의 명문가였던 이스마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세웠던 게 바로 교단입니다. 그 교단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데 한낱 길드 수장이 무슨 수로 자신이 미는 황자를 황좌에 앉힌다는 것인지.”
제이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로는 뭘 못 하겠습니까?”
“그래도 하는 말만 들어보면 지지세력도 없는 2황자가 왕관 전쟁에서 이길 것 같지 않아?”
“아가씨께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물음에 짧게 고심하던 이자벨라가 작은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아니. 그러긴 힘들겠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죠.”
제이슨은 생각했다.
만약 하늘이 두 쪽이 난다면.
어쩌면 이스마일의 피를 이어받은 2황자, 크리스찬 이스마일이 황좌에 오를지도 모른다고.
‘정말 하늘에서 허락한다면 말이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로 취임한 길드장이란 사람.
절대 헛소리만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가씨. 어쩌면 말입니다.”
이자벨라가 그를 쳐다보자 제이슨은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말해주었다.
“이스마일이야 핑계고, 상황을 봐서 저희와 테페즈 중 이긴 쪽에 붙으려는 건 아니겠습니까? 말로는 말도 안 되는 이스마일을 민다고 하면서 결국엔 저희와 테페즈 중 하나에 붙게 된다면. 결국 그들 입장에서도 큰 손해는 아닙니다. 괜히 저희를 밀었다가 나중에 테페즈가 이기게 된다면 그게 더 곤란해지겠죠.”
제이슨이 그런 생각을 피력하자 이를 생각해 보던 이자벨라는 별로 공감할 수가 없었다.
아까 만난 그 남자를 떠올려보건대…….
‘그건 아닌 것 같아. 나름 진심 같았거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그녀도 확신하진 못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 사람 입장에선 그게 최선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