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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명가의 창시자-131화 (131/181)

§131화 31. 다른 길(1)

블랙라벨로 향하는 이두마차가 있었다.

화려한 문양도 없고, 값비싼 장식도 없는 그저 그런 마차.

하지만 그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어느 명문가의 사람들이었다.

“곧 블랙라벨입니다, 아가씨.”

제이슨.

나이트로드라 불리는 이자벨라의 스승이자 그녀의 보호자였다.

그 말에 로브의 여인이 천으로 된 커튼을 살짝 치우고 마차의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그 옆에 자리한 거대한 항구도시가 시야에 잡혔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그녀에겐 꽤나 지루한 여정이었다.

“오면서 별문제는 없었네. 중간에 도적 떼라도 만나는 줄 알았는데.”

비단결 같은 쪽빛 머리칼에 성숙미가 충분히 느껴지는 여인이 운을 떼자 제이슨이 반응을 보였다.

“수수한 마차라 그들도 먹을 게 없어 보여 덤비기가 꺼려졌을 겁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말이 많이 끄는 마차일수록 그들의 관심을 사게 됩니다. 하지만 저흰 그게 아니니 나름 조용히 온 겁니다.”

“그래도 너무 심심하게 왔어. 걔들이 왔어도 별문제는 없었을 텐데. 아니야. 오히려 재밌었었겠네.”

“아닙니다, 아가씨. 무조건 심심한 게 좋은 겁니다. 세상일이란 건 도통 알 수 없으니까요.”

“제이슨 말도 맞아. 틀린 말은 아니야.”

왕관 전쟁이 시작되고 그들은 가문의 명을 받아 곧장 블랙라벨로 향했다.

그들이 블랙라벨로 향한 이유는 단 하나.

이곳에 리옹 길드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 이번에 리옹 길드랑 블랙라벨 유니온이 하나로 합쳐졌다면서?”

아무리 분야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도 듣는 귀가 있는지라 길드와 관련된 대략적인 소식 정도는 접하고 있었다.

“네, 새로 취임한 길드장이 꽤나 혈기가 왕성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취임한 직후 블랙라벨 유니온과 전면전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길드장이란 사람 싸우는 걸 꽤 좋아하나 봐?”

“유능하면서 나이가 매우 젊다고 들었습니다.”

“젊어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죠. 사람이란 건 늙어갈수록 보수적으로 변하니.”

“이전 길드장이 벤자민이었나?”

“벤자민 드 리옹입니다. 리옹 가문 출신으로 제 잇속만 챙기는 자였죠. 하지만 저희에겐 깍듯이 잘했습니다. 무난하면서 좋은 사람이었죠. 저희 입장에서 말입니다.”

“우리한테만 좋으면 뭐해. 길드 내에선 무능해서 쫓겨났는데.”

“그렇긴 합니다.”

그녀는 문득 그 새 길드장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새 길드장이란 사람. 제이슨도 누군지 전혀 모르는 거야?”

여기에 대해선 제이슨도 미안한 모양인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하달받은 명령이라 그 길드장이란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그래?”

“아마 아가씨가 알고 있는 것과 제가 아는 게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제이슨이나 나나 당장 중요한 건 왕관 전쟁이니까.”

왕관 전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들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 역시 그 왕관 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이 말했다.

“솔직히 길드 쪽에서 문제를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오래전부터 저희에게 충성하던 무리인지라 그들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꿀 줄은 몰랐거든요.”

이자벨라도 공감하는 눈치였다.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거 아냐?”

“그거야 모르죠. 하지만 그런 게 없다면 찾아온 저희 때문이라도 다시 길드 입장을 바꿔야 할 겁니다.”

마법사는 하늘 아래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찾아간다면 한낱 방코 무리의 우두머리가 머리를 숙일 건 당연한 일.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죠.”

하지만 제이슨은 그리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한계 때문에 쉽사리 저흴 저버리진 못할 겁니다. 그들에게 있어 저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거든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자벨라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우리 쪽에서 제공하는 특수한 종이가 없다면 그쪽은 전부 위조 천국이 되겠지? 그들이 그걸 만들 순 없잖아.”

나름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는 제이슨이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종이는 오직 싱클레어 가문에서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다시 궁금증을 드러냈다.

새 길드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길드장이란 사람. 듣기론 평민 출신이라고 하던데.”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너무 근본 없는 출신인지라 이름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제이슨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거야?”

“제 생각이지만 가문 내의 다른 사람이라면 그자의 이름을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저희보다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분명 있었겠죠. 하지만 가주님께선 그들보다 저희에게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가주 이야기가 나오자 이자벨라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날 지키려고 하는 거겠지. 직접적인 전쟁 참여는 너무 위험하니까.’

“나 때문에 그런 걸 거야. 갈수록 위험한 일은 안 시키려고 하시니까.”

제이슨이 고개를 주억였다.

“뭐, 그렇다고 가주님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쉬운 일만 밀어주시는 것 같아 개인적으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새 길드장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그들은.

블랙라벨에서 만나게 된 새 길드장을 보고선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코…… 소년?”

록펠러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제이슨이었다.

물론 그를 따라온 그녀 역시 놀라간 마찬가지였다.

‘설마 새로 취임했다는 길드장이 저 사람이었어?’

제이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저 소년이 여기 있는 거지?’

그때 당시 저 소년은 아리송하게 일을 하는 방코 소년이었다.

쓸데없이 차용증서를 남발했던 소년.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선 나중에 듣게 됐다.

영주가 파산했다고.

‘그렇군. 그런 거였어.’

다소 늦었지만 제이슨은 새로 취임했다는 길드장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방코 소년이 소리 없이 커서 리옹 길드를 이끄는 수장이 된 것이다.

“몬테펠트로 영지에서 봤던 그 소년인가? 날 기억하나?”

제이슨이 운을 떼자 록펠러도 나름 놀란 눈치였다.

싱클레어 가문에서 누군가 찾아올 줄은 알았지만, 그 많고 많은 가문 사람들 중에서 저들이 또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이내 놀란 표정을 감추는 록펠러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이군요. 전에도 한 번 뵀었죠? 몬테펠트로 영지에서 말입니다.”

록펠러가 시선을 옆으로 옮겨 이전과 다르게 많이 성숙해진 이자벨라를 보았다.

‘제법 컸군. 그땐 완전 애였는데.’

“반갑습니다.”

록펠러가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같이 온 제이슨이 대번 엄해졌다.

“무엄하다! 어디서 감히…….”

하지만 이를 받아치는 록펠러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젠 귀족입니다. 평민이 아니죠.”

전과 다르게 다소 거만해진 그를 보자.

제이슨도 느끼는 바가 많아졌다.

‘사람이…… 변했군. 저게 본 모습이라면 이전에는 발톱을 숨긴 거였나?’

“…….”

록펠러가 귀족이라 하자 제이슨도 할 말이 없었다.

귀족끼리는 평민과 다르게 다른 예법이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식적으로 리옹 길드의 수장이었다.

그가 모시는 그녀 역시 그에게 어느 정도 예를 보여야 한다는 소리.

제이슨이 조용해지자 그 자리를 이자벨라가 치고 나갔다.

“이자벨라 싱클레어입니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이름일 잊지 않고 있었다.

“록펠러 공?”

제 이름을 기억해 주는 그녀에게 록펠러도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이자벨라 아가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못 보던 사이에 길드장이 되셨나요?”

“네, 서로 안 보던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지금은 제가 리옹 길드의 수장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록펠러 옆으로 웬 아가씨가 와서 섰다.

그의 비서인 엘리스였다.

“손님이신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엘리스가 묻자, 록펠러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찾아온 둘을 근처에 있던 접대용 자리에 앉혔다.

물론 상석은 내주지 않았다.

싱클레어 가문과 이제 작별을 하겠다는 나름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간접적으로 보낸 것이다.

이전과 다르게 대우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자 그녀와 함께 있던 제이슨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자가 여기 길드장이라면 왜 태도를 바꿨는지 대충 이해가 가는군.’

제이슨이 기억하기론 그때 만났던 그 어린 방코 소년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 소년이었다.

당장 보기엔 별거 없어 보여도, 그가 행했던 일들은 결국 한 영지의 주인을 파산시키지 않았던가?

‘우리와 연을 끊으려는 것도 나름 계획이 있겠지.’

생각은 많았지만 제이슨은 이 자리서 크게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이 자리에 나설 인물이 자신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차가 나오자 이를 음미하는 이자벨라가 다소 거만하게 다리까지 꼬고 있는 록펠러를 흘겨보았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쉽지 않겠네.’

“길드에서 갑자기 입장을 바꾸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까요?”

그녀가 운을 떼자 다소 거만하게 앉아 있던 록펠러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왕관 전쟁에 대해 물으신 거라면. 저흰 이미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자벨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저흰 1황자 전하도, 3황자 전하도. 전부 도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싱클레어 가문을 돕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감히 싱클레어 출신 앞에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표정을 구긴 제이슨이 나서려 하자 이를 손짓으로 가볍게 제지한 이자벨라가 다시 말했다.

“저희와 그런 식으로 끊어진다면 길드 입장에서 곤란해질 일이 많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흰 오래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사이가 아니었나요?”

친구란 말에 록펠러가 옅게 웃어 보였다.

“그것도 다 예전 일입니다. 제가 취임한 이후로 리옹 길드는.”

록펠러가 강조하듯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이 하늘 아래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시 태어났다니.

찾아온 두 마법사는 어이가 없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는 대체 뭘 믿고 두 마법사 앞에서 저렇게 거만하게 행동하는 걸까?

“저희가 누군지 모르시는 건가요?”

이자벨라가 묻자 록펠러는 여전히 같은 표정을 고수하며 받아쳤다.

“알고 있습니다. 싱클레어 가문에서 오신 두 마법사분이시죠.”

“그런데도 태도가 불순하시네요.”

그 말에 록펠러는 부정하지 않았다.

“애당초 좋게 갈 사이가 아닌데, 여기서 가식적으로 떠들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록펠러가 이어 말했다.

“제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저희 길드 입장을 두 분께 간접적으로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것 외엔 다른 의미는 없으니 오해하진 마시길.”

참다못한 제이슨이 나섰다.

“뭘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그 말에 록펠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받아쳐주었다.

“믿는 구석이야 많죠. 제 뒤엔 이한이란 사람도 있고, 또 이 자리엔 없지만 이스마일 가문도 알게 모르게 개입해 있습니다. 아마 다른 건 몰라도 제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여기 계신 분들도 나름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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