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30.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1)
블랙라벨 총독에게서 증권 거래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은 록펠러는 그날 이후 제 가문의 이름이 걸린 증권 거래소를 짓기 시작했다.
로스메디치 증권 거래소.
증권이란 것을 쉽게 거래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고 하자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 증권 거래소가 지어지기 전까지.
록펠러는 길드의 사업 확장을 위해 대출 사업을 크게 장려하기 시작했고, 신용만 확실하다면 기존의 대출 이자보다 훨씬 낮은 조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대출이란 걸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역선 투자로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고 있던 구두가게의 주인 밥은 자신의 친구인 의상점 주인 벨이 새로운 마차를 끌고 나타나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저건 뭐야?’
귀족이나 탈 법한 화려한 사두마차를 고작 의상점이나 하는 그가 타고 온 것이다.
“아니, 저 마차는 뭐야? 대체 누구 거야?”
화려한 마차에서 최대한 우아하게 내린 벨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돈깨나 만지는 평민들도 이 정도 마차를 사들이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장인 정신이 깃든 마차의 화려한 문양이나, 고급스러운 내부 인테리어만 봐도 꽤나 값비싸게 보였으니까.
‘역시나 내가 예상하던 그 반응이로군. 저럴 줄 알았어. 내가 이 맛에 이걸 지른 거지.’
“큼! 내가 이번에 아주 큰맘 먹고 하나 장만했지.”
가뜩이나 돈이 없어 허덕이고 있던 구두가게 밥은 벨이 타고 온 마차 안을 살피며 연신 감탄사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허…… 이 내부 보소. 이거 너무 좋은데?”
감탄도 잠시.
당연히 생기는 의문이 그에게 찾아왔다.
“아니, 자네, 이거 자네 거야?”
“그럼 내 거지. 내 게 아니면 대체 누구 거라고 생각한 거야?”
밥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자네한테 무슨 돈이 있어서 이걸 사 온 거야?”
“돈?”
사실 의상점 주인 벨에겐 이 정도 마차를 쉽게 사들일 여유가 없긴 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면야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그럼 뒷일은 어찌한단 말인가?
“뭐, 대출 좀 끌어다 썼지.”
“대출? 지금 대출이라고 했어?”
“어, 이번에 방코에서 마차 대출을 해준다고 하더라고.”
“그래?”
의상점 주인 벨은 이번에 방코에서 하는 대출 프로그램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 글쎄 마차를 사면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준다지 뭐야. 물론 신용이 확실한 사람에게만 그 정도 대출을 해주는 모양이긴 한데, 옆에 잡화점 하는 루가 마차를 바꿨길래 나도 이참에 큰맘 먹고 바꾸게 됐지.”
“아니, 그런 게 있었어? 난 그런 대출이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자네는 무역선 투자를 하는 바람에 여유가 없어졌잖아. 당연히 이쪽에도 관심이 없었겠지. 하루하루가 여길 떠난 무역선 걱정인데 이쪽에 무슨 신경이 닿겠어?”
“그거야 뭐…….”
그들에게 있어 마차란 것은 부의 척도라 할 수 있었다.
마차가 본래 소모품 같은 개념인지라 오래 타고 다니면 다닐수록 그 가치가 보존되는 게 아니라 대개 몇 년이 지나면 그 가치가 반 이상으로 훅훅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분수에 맞는 마차를 골라 타고 다니는 경향이 짙었는데, 그런 모습 때문에 비싼 마차를 아무렇게나 타고 다니는 자들이 부자로 인식되면서 어느 정도 부의 척도가 된 것이다.
“내부가 엄청 화려한데? 이거 돈깨나 들었겠어.”
“나도 좀 무리해서 산 경향이 있지.”
“말도 네 마리나 되는 걸 보니까 유지비도 장난 아니겠는데?”
“당연히 장난 아니지. 보통 사람들은 아마 엄두도 못 낼 거야.”
“허허…… 자네는 도박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런 사치는 진짜 잘도 부리는군.”
그러자 벨이 싱긋 웃으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어젯밤에 가면무도회가 있었잖아? 내가 거기에 이 사두마차를 타고 가니까 확실히 주변 시선이 달라지더라고.”
“아니, 가면무도회까지 갔어? 자네가 무슨 재주로?”
“시대가 변한 지가 언젠데. 귀족만 가면무도회에 가란 법 있어? 나 같은 평민도 돈만 있으면 그쪽에서도 거절하진 않아. 어차피 돈이 최고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서 그쪽에서 놀 생각으로 이번에 큰맘 먹고 뽑은 거지. 나중에 가면무도회가 끝나고 나니까 여자들이 서로 내 마차에 타려고 안달이야.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는 답답해서 못 타겠다나 뭐라나. 서로 타려고 아등바등하는 걸 자네가 봤어야 했는데. 뒤에서 지켜보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아이고 당연히 그렇겠지! 구질구질하고 느리게 가는 마차보단 이게 훨씬 낫겠지. 그래서 어제 재미 좀 본 거야?”
“재미야 당연히 봤지. 크흠! 그래서 오늘도 거기 가서 놀 생각이야.”
“오늘도?”
“당연하지. 인생 뭐 있어? 내가 도박 같은 건 싫어해도 노는 건 또 좋아하잖아. 괜히 무역선 투자하다가 전 재산 다 날려먹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인생 즐기면서 쓰는 게 나은 거지.”
“허허……”
잠시 생각에 잠기던 밥이 벨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마차 대출이라는 거. 나도 해주는 거야?”
“자네? 자네는 이미 대출을 크게 받지 않았어?”
“대출이야 받기는 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는데. 방코에 가서 한번 물어봐. 마차 대출은 또 일반 대출과 다르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럼 나도 되는 거 아니야?”
“그거야 물어봐야 알겠지.”
그렇게 둘은 곧장 록펠러가 운영하고 있는 방코에 찾아갔다.
“저번에 여기서 돈을 빌려가긴 했는데. 혹시 저 같은 사람도 마차 대출이 되는 겁니까?”
록펠러는 찾아온 밥을 얼핏 알아보았다.
근처에서 장사를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심심하면 친구와 함께 자신의 가게로 찾아와 부산을 떠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저희 가게에서 돈을 빌려가지 않았습니까? 무슨 증권에 투자한다고 하시던데…….”
“네, 그렇긴 했습니다.”
“대출이라. 잠시만요. 저희도 다 빌려드리는 건 아니라서요.”
잠시 후 록펠러는 장부를 뒤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것 같습니다. 한도가 꽉 차서 더 이상 빌려드릴 돈이 없습니다. 이것 참 유감이군요.”
“허허…… 안 된다니.”
그러자 옆에 있던 벨이 씩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그때 하지 말라고 했지. 그때 안 빌렸으면 지금 여기서 마차 대출이 됐을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돌아오기만 하면 대박이라고. 최소 4배야. 4배라고.”
“그 4배도 돌아왔을 때의 일이지.”
“그래도 요즘 유니온 대표도 죽고 해서 그쪽 분위기가 나쁘진 않아. 거기다 이번에 군함들이 대거 건조됐다면서? 여길 이따금 찌르던 해적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소문이 있어. 이건 무역선 투자에 올인한 사람들에게 진짜 좋은 얘기라고.”
“그래도 돌아오는 건 다른 문제라니까. 폭풍은 또 어떻게 할 거야? 단순히 해적만 생각하면 안 되지. 현지에 가서 원주민들하고 충돌하는 문제도 있고.”
“그렇기야 한데…….”
듣고 있던 록펠러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때 사신 증권을 저희에게 파셔도 됩니다.”
“증권을?”
“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무역선에 대한 기대보다.
당장 행복을 누리고 있는 벨의 모습을 보니 밥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벨이 말한 것처럼 재수 없게 영영 안 돌아올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가진 건 전부 휴짓조각이라고.’
“그럼…… 얼마에 사 가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록펠러는 웃으며 답해주었다.
“물론 제값에 사 가진 않습니다. 발행했던 액면가의 4분의 1 가격이면 저도 고려해 볼 만하겠군요.”
“에이! 어림도 없지. 누가 그 미친 가격에 되판단 말입니까? 내가 미치면 그 가격에 팔겠지.”
록펠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말도 해주었다.
“네, 맞습니다. 4분의 1 가격에 되파는 건 좀 아니겠죠. 하지만 이따금씩 안 좋은 소식이 들리는 몇몇 증권은 그 가치가 액면가의 10분의 1까지 떨어지기도 합니다. 휴지가 될 증권을 들고 있자니 차라리 몇 푼이라도 건져보려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 말을 들은 의상점 주인 벨이 말했다.
“거봐. 그거 다 도박이라니까. 돌아오면 대박. 안 돌아오면 쪽박.”
“나도 알고 있었어. 에이, 좋다 말았네. 나도 요즘 너무 심심해서 마차나 한 대 뽑으려고 했는데.”
벨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만약 자네가 투자한 무역선이 잘 돌아오면 그때 한번 고려해 봐. 그럼 좋지 뭐.”
“그래, 분명 돌아올 거야. 폭풍이 치든, 해적이 지랄을 하든. 언젠간 꼭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가게를 떠나려던 둘은 출입문 근처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예전에 무역선 투자로 대박이 났다던 구두닦이 샘이었다.
“샘?”
구두닦이 샘은 그들과 확연히 다른 옷차림의 젊은 사내였다.
마치 젊은 귀족 같다고 할까?
샘은 마주한 밥에게 넙죽 인사를 했다.
“밥 아저씨.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대출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대출?”
“네.”
“자네도 무슨 마차 대출을 하려고?”
밥이 기억하기론 무역선 투자로 대박이 난 샘은 벨보다 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녔다.
크기도 크기지만 말이 무려 6마리가 끄는 육두마차였던 것이다.
그 물음에 샘은 우선 웃고 봤다.
“하하, 전 마차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나더 레벨.
샘에게 있어 마차란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사치품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아니, 마차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그럼 뭘 대출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아, 지금 집을 알아보고 있거든요. 때마침 괜찮은 매물이 있는 거 같아, 대출이 가능한지 한번 알아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
집을 구한다기에 벨과 밥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작은 집은 아닐 텐데?’
‘분명 큰 집일 거야. 육두마차나 타고 다니는 녀석인데 귀족처럼 화려하고 큰 저택을 사들이겠지. 그것도 정원이 엄청나게 크게 딸린.’
둘은 저도 모르게 부러움의 시선을 샘에게 던져주었다.
그 시선이야 이제 감흥 없이 받아들이는 샘이 둘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럼 전 볼일이 있어서.”
그렇게 샘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두 남자를 뒤로하고 가게 주인인 록펠러와 마주 보았다.
록펠러는 찾아온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최근 들어 이곳 블랙라벨에서 가장 많은 부를 쌓아 올린 젊은 청년이었으니까.
“샘이라 하셨죠? 또 뵙는군요.”
“록펠러 공,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번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하하, 이번에 저택 대출에 대해 상담 좀 해보려고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아, 이번에 집을 구하시는군요.”
“네, 작은 집은 아니고 아주 큰 집입니다. 사실 저택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
록펠러는 선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그렇게 예상했습니다. 육두마차나 타고 다니시는 분께서 설마 작은 집을 구하려고 대출을 받겠습니까? 그건 아니겠죠.”
“네, 그래서 저도 이번에 대출이 된다면 사는 집 좀 바꾸려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몇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록펠러는 가게 장부를 펼쳐 몇 가지를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다면 큰 대출은 아마 무리일 것 같습니다. 안타깝군요.”
그 말에 샘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고객분들께 대출을 해드리는 것은 고객분들의 미래 수입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기에 그것을 감안하여 대출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담보가 없다면 대출은 무리죠.”
샘에게 있어 지금 관심 있는 분야는 무역선 투자가 아니라 바로 부동산 투자였다.
잘만 사들인다면 무역선 투자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기에 나름 확신을 갖고 있던 샘이 사정조로 나서기 시작했다.
“록펠러 공,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는 이번 대출이 꼭 필요합니다.”
샘이 사정하자 이를 살피던 록펠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동산도 잘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긴 하지. 어중간한 주택이 아니라 저택 같은 거라면 밀어줄 가치가 있긴 해.’
“그렇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듣자 하니 증권 투자를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들고 계신 증권을 저희에게 담보로 맡기신다면 어느 정도 감안하여 약간의 대출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샘이 내키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록펠러는 다른 대안도 제시해 주었다.
“아니면 주택담보대출이라고 해서 사들이려는 주택을 저희가 담보로 잡는다면 나머지 금액에 대한 대출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 일부 금액에 한해서 대출이 가능하고, 명의는 그 대출이 전부 상환될 때까지 저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