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27. 블랙라벨 유니온 #2(2)
새파랗게 어린놈이 길드장이랍시고 모가지를 빳빳하게 세워 자신을 쳐다보는 꼬락서니라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어린 길드장을 향해 유니온 대표는 이전 기억을 살려 전성기 때의 흉포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었다.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가 본데?”
그런 유니온 대표를 향해 록펠러는 그저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아닙니다. 찾아온 이유야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게 화내시는 이유도 모르지 않습니다.”
유니온 대표는 가게 밖에 있던 그의 사병들을 생각하며 이죽이기 시작했다.
“지금 가게 밖에 놔둔 저까짓 사병들 가지고 건방을 떠는 거라면. 그 못된 생각 빨리 고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습니까?”
“내가 말이야. 소싯적 자네 같은 사람은 그냥 이 손으로 머리통을 잡아 그대로 부숴 버렸어. 그다음 모가지도 없는 시체를 선박들이 잘 지나가는 암초 지대에 전시해 놨었지. 나를 상징하는 깃발과 함께 말이야.”
해적왕이라고 불렸던 그의 악명은 블랙라벨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에도 록펠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셨군요. 그러시던 분이 지금은 뭐하러 방코 연합의 수장 같은 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잘하시던 거나 계속 하시지.”
“뭐?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그런 워렌을 무시한 채 록펠러는 근처에 있던 소파로 가 앉았다.
“이리와 앉으시죠. 언제까지 자기 소개만 하실 겁니까?”
건방져도 너무 건방진 자였다.
거기다 한때 해적왕이라 불렸던 바다의 악몽 앞에서도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여유까지 보이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니온 대표가 직접 그를 처리하기 위해 성큼성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육지에서 가만히 있으니까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는 건가? 어린놈의 새끼.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내가…….’
그런 길드장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록펠러의 조수인 리카르도였다.
“넌 또 뭐야?”
다소 건방지게 제 앞을 막아선 리카르도를 향해 유니온 대표가 성난 얼굴로 으르렁거리자 리카르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록펠러란 자를 만나기 전까진 방코 연합의 대표는 다 이런 식으로 막돼먹은 녀석들인 줄 알았지. 어차피 돈 냄새가 나는 곳엔 항상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니까.’
“맞은편 자리에 앉아 계시면 제가 따뜻한 차를 곧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이 판국에 차를?
유니온 대표에겐 귀에도 안 들리는 소리였다.
“무슨 놈의 차! 지금 차 같은 게 내 목구멍에 넘어갈 거 같아?”
언성을 높이는 유니온 대표 따위야 쳐다도 보지 않는 록펠러가 고개를 저었다.
‘지 주인도 몰라보고…… 하긴. 뒤지려면 뭘 못할까.’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앞을 막아서던 조수를 단번에 밀쳐 버리려 했던 유니온 대표가 이윽고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이전의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어, 어떻게…….’
그런 유니온 대표에게 리카르도가 다시 말했다.
“자리에 앉으시죠. 곧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내색하지 않은 척 최대한 행동을 조심하는 유니온 대표가 얼떨결에 록펠러와 마주 앉게 됐다.
그러면서 속으론 탄복했다.
‘역시 이스마일이야. 근처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어.’
어디서 날아온 전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스마일이 여기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와서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잖아? 어차피 이스마일 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텐데.’
그가 아는 선에선 블랙라벨 유니온은 이스마일 가문의 훌륭한 돈줄이었다.
그런 돈줄이 곤경에 처했는데 이스마일 가문에서 과연 가만히 있을까?
‘그러진 않겠지. 절대로.’
“크흠! 방금까지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네. 나도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옛날 버릇이 툭 튀어나왔지 뭐야.”
갑자기 태도를 바꾼 유니온 대표를 보고도 록펠러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비용의 문제였을 뿐. 정 문제가 됐으면 그때 이한을 부르면 됐거든. 그게 아니더라도 이스마일 가주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겼겠어.’
“역시나 유니온 대표답게 행동거지가 그리 저급하진 않군요. 만약 옛날 같은 분이셨다면 이 자리서 상대도 안 할 뻔했습니다.”
나름 도발적인 언사였으나, 웬일인지 유니온 대표는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어차피 조만간 뒤질 놈 같은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겠나. 이왕 온 김에 대충 놀아주면 되겠지.’
“배에서 내린 지가 언젠데. 언제까지 그런 망나니처럼 놀 순 없겠죠. 그래, 이름이…….”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유니온 대표에게 록펠러는 웃는 얼굴로 친절히 알려주었다.
“록펠러 로스메디치입니다.”
“아, 록펠러 공이셨군요. 어디서 어린놈의 새끼가 갑자기 길드장이 됐다기에 그거 이름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씩 웃는 유니온 대표가 가소롭다는 듯이 록펠러를 쳐다보았다.
‘어린놈의 새끼가 겁도 없어가지고.’
“어린 나이에 그 정도 위치까지 오르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록펠러가 웃으며 대꾸했다.
“저야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보다 평생 생선 비린내나 맡으며 노략질이나 일삼다, 도저히 처리가 안 될 것 같으니 황실에서 내려준 작위로 운 좋게 유니온 대표가 되신 우리 워렌 공이 더 대단하시겠죠.”
“하하하…….”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웃고는 있었지만 워렌의 눈썹은 이 순간 강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개 같은 놈이 그놈의 주둥아리는 아주 예술로 굴리는군. 그래, 대체 뭘 믿고 그러는 줄 모르겠다만. 적어도 정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구나.’
“여기가 저희 구역이란 건 잘 모르고 오신 거겠죠? 제정신이라면 아마 안 그랬을 테니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잘 알고 여기다 가게를 차렸습니다. 여기가 그쪽 구역이 맞으시겠죠?”
이놈이 새끼가.
“하하, 어려서 겁도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정신줄을 놨던가.”
“그래도 저희가 란스타드에 직접 장사를 안 하는 걸 감사히 여기십쇼. 거기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면 아마 그쪽 가게는 다 문을 닫았을 겁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리 말하십니까?”
“그걸 굳이 말해줘야 알겠습니까?”
록펠러가 웃으며 다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주변을 보세요. 유니온에 속한 방코 가게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아오, 혈압.
그래도 웃는 얼굴은 무조건 고수해야만 했다.
억지로 웃어 보이는 유니온 대표가 갑작스레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영문 모를 웃음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진짜 목숨이 두세 개라도 되는 겁니까?”
“목숨은 당연히 한 갠데 무슨 두세 개라도 되는 것마냥 물어보십니까.”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십쇼.”
소파에 늘어지게 앉는 유니온 대표가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주변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여기가 다 저희 땅인 줄 아십니까? 저흰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진짜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이스마일이라고 들어는 보셨는지요?”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유니온 대표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아신다고 바지에 오줌까지 지리진 마시고. 아무튼 그 모가지. 대체 언제까지 붙어 있을 줄 아십니까?”
그때.
그를 따라왔던 조셉이란 자가 그의 옆자리까지 와서 조용히 귓속말을 전해주었다.
이를 듣고 고개를 주억이던 유니온 대표가 가소로웠는지 이내 한쪽 입꼬리를 격하게 끌어 올렸다.
“아, 그런 거였군요. 전 또 무슨 배짱으로 여기까지 와서 장사를 하나 했습니다.”
록펠러는 대꾸하지 않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세상에 싱클레어 가문만 믿고 여기서 그런 배짱을 부리신 겁니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록펠러를 향해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 거였군요. 솔직히 웬 미친놈처럼 여기서 장사를 하길래, 대체 저놈들은 무슨 배짱으로 장사를 하나 궁금하긴 했습니다.”
이어 고개를 주억이는 그가 말했다.
“그놈의 싱클레어. 아, 싱클레어도 나름 대단한 가문이죠. 그래도 명색이 테페즈 가문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명문 가문이 아닙니까? 그런 곳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겁대가리를 상실할 수도 있겠군요.”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아무리 이스마일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어도, 그래도 발톱은 남아 있을 텐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록펠러는 여전히 같은 표정을 고수하며 말을 아꼈다.
“여기서 말을 더 섞을 필요조차 없겠군요.”
록펠러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우선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대뜸 자리에서 일어난 유니온 대표는 그의 앞에 있던 탁자 위에 바다뱀이 그려진 은화 한 닢을 조용히 올려놓았다.
“저승길 노잣돈입니다. 곧 저승에 가실 텐데, 제가 딱히 해드릴 건 없고. 이 정도가 딱 적당하겠군요.”
그 말에 따라왔던 그의 부하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곧 죽을 사람에게 저승길 노잣돈을 주는 건 해적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들의 저급한 웃음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메우자, 그제야 록펠러가 닫았던 입을 열 수 있었다.
“저승길 노잣돈이라…… 노잣돈치곤 너무 일찍 주신 것 같은데. 그보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더 할 말은 없으시고?”
노잣돈이나 챙겨주고 성큼성큼 가게 밖으로 나가는 유니온 대표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록펠러에게 진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어차피 곧 뒤질 것 같은데 여기서 말을 더 섞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나름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런 유니온 대표가 그대로 떠나가려 하자.
록펠러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는 그에게 금화 한 닢을 던져주었다.
‘아마 이전 길드장하고 같은 길을 가겠지.’
이스마일이 허투루 일을 처리한 적은 없었다.
애당초 그들의 암묵적인 승인이 없었다면 자신은 이미 이 자리에 없거나, 아니면 장사조차 하지 못했을 터.
“그럼 제 것도 받아 가셔야죠.”
유니온 대표는.
제 등허리에 맞고 굴러떨어진 금화 한 닢을 보고선 의아함을 가졌다.
“이건 뭡니까?”
“뭐긴요. 그쪽 노잣돈입니다. 그쪽도 조만간 저승 구경을 하실 거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먼저 챙겨드린 겁니다.”
기가 찬 모양인지.
혼자서 끅끅대며 웃던 유니온 대표가 록펠러와 다르게 자신의 노잣돈을 챙겨 들었다.
“어리긴 한데, 배포는 아주 크신 분이로군요. 보통은 은화 한 닢 정도 던져주는 게 관례이긴 한데. 세상에 금화씩이나 던져주시다니.”
“그거 저승길 노잣돈입니다. 만지면 재수가 더럽게 없을 거 같은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록펠러가 뭐라 말하든.
애당초 저승에 갈 생각이 없던 유니온 대표는 오히려 록펠러의 안전을 걱정해 주었다.
“숱한 폭풍우와 해군 전함들을 만나왔어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그런 제가 갑자기 죽긴 왜 죽습니다. 오히려 죽을 사람은 따로 있죠.”
손에 쥔 금화로 록펠러를 겨누는 유니온 대표가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두 입술 사이로 보이는 누런 이와 금이빨이 나름 매력적인 자였다.
“이건 제 맥줏값으로 요긴하게 써보겠습니다. 이런 푼돈이야 보통은 거들떠도 안 보는 거지만. 그래도 리옹 길드장이 준 금화라면 다르지.”
조셉이 끼어들며 그의 흥을 돋워주었다.
“워렌 공! 오늘 술맛 한번 기가 막히겠습니다!”
“그래, 오늘 술맛 기가 막히겠어! 리옹 길드장이 내 맥줏값이나 챙겨주고 말이야!”
“하하하!”
설마 자신이 준 노잣돈을 저리 대놓고 챙겨갈 줄이야.
록펠러는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확실히 금화가 좋긴 좋은 모양이야. 저승 간다고 해도 저렇게 챙겨가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