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26. 블랙라벨 유니온(1)
1황자와 그의 군대가 리옹을 떠나간 직후.
길드장이 주최하는 길드 회의가 게토 누오보에서 열렸다.
길드 회의에 참석하는 건 길드원의 당연한 의무였기에,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찾아온 길드원들은 회의장 앞에서부터 1황자와 만났던 록펠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봐, 소식 들었어?”
“당연히 들었지. 1황자가 그냥 갔다면서? 천하의 테페즈가 아무런 요구도 없이 그냥 갔다는 게 말이나 돼?”
“그러게 말이야. 나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 1황자가 그냥 갔다고.”
“도시 밖에 군대가 있었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야수의 심장이라도 가진 거야 뭐야?”
“이번 길드장은 세상에 겁도 없는 모양이야. 그게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지.”
“단순히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배짱이 있어.”
“배짱이 있다는 건 좋은 거지. 우린 겁쟁이라서 그런 건 절대 못 하잖아.”
“그건 그렇지.”
“이번 길드장이 진짜 물건이야. 내 생각엔 정말 잘 뽑은 거 같아. 안 그래?”
“장사도 이전보다 잘된다니까? 확실히 이자 몇 푼 쥐여주고 끌어들인 돈으로 대출 사업을 크게 벌이는 게 수익적으로 훨씬 좋아. 이상하게도 말이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요즘 톡톡히 재미 좀 보고 있지.”
“어디 자네만 그런 줄 알아? 나도 요즘 장사할 맛이 나고 있어. 예전엔 빌려줄 돈이 없어서 애를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젠 그 걱정을 덜 할 수 있으니 당연히 좋지.”
“그보다 벤자민 공이 자살했다고 하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쪽팔려서 목매달아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하긴. 그놈이 나가고 장사가 더 잘됐는데, 나 같아도 쥐구멍에 숨었을 거야. 그렇게 금화 보관료를 고집하더니, 쯧쯧쯧.”
“솔직히 잘 죽었지 뭐. 가문만 믿고 지 혼자 다 해 처먹으려던 놈이었는데.”
그들 중 배가 불룩 튀어나온 길드원이 대출 사업에 대한 한 가지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나도 장사야 잘되고 있기는 한데. 돈을 더 빌려주고 싶어도 어디 마땅한 데가 없어. 블랙라벨 유니온이 장악하고 있는 그쪽에다가 장사만 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을 거 같은데 말이야. 거긴 요즘 신항로 개척에다가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아주 난리라던데. 한탕 제대로 해 먹으면 수백, 수천 배를 남겨 먹는다고 하나 봐.”
블랙라벨.
제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자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꽤나 번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블랙라벨 유니온이라 불리는 또 다른 방코 연합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쪽은 못 건드리지. 거긴 블랙라벨 유니온이 꽉 잡고 있잖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그쪽에서도 가만히 안 있을걸? 분명히 말이 나올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이스마일이 움직이겠지. 어휴 무서워라. 어디 무서워서 그 근처에 가 보기나 하겠어? 사람 목숨 아까워서 근처도 안 가겠다.”
“그건 맞아. 그래서 많이 아쉽지. 거긴 진짜 빌려줄 돈이 없어서 아주 난리라던데. 그런 데다 장사를 해야 하는데….”
“거기가 진짜 노다지인데 말이야.”
“돈으로 장사하려면 진짜 그만한 데가 없긴 하지. 문제만 없다면 거기 가서 나도 장사하고 싶다니까?”
땅땅땅!
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회의장 밖에서 술렁이던 길드원들이 일제히 카타콤베 길드 회의장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서 들어가자고. 미사가 곧 시작되겠어.”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른 거야?”
“모르지. 대충 듣기론 무슨 중대 발표가 있다고 하던데?”
“중대 발표? 그게 뭔데?”
“나도 몰라. 일단 들어가 보자고. 들어보면 알겠지.”
회의 시작 전 교회의 사제가 주관하는 미사가 끝난 직후.
록펠러가 길드 회의를 위해 입을 열었다.
“바쁘신 여러분들을 제가 이렇게 소집하게 된 것은 중대 발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대 발표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1황자와 관련된 일도 잘 해결된 마당에 무슨 발표를 한다는 것일까?
모두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록펠러가 목소리를 냈다.
“오늘부터 저희 리옹 길드는.”
잠시 숨을 고른 록펠러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길드원들을 향해 다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블랙라벨 유니온과 전면전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록펠러의 말에 회의장 전체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록펠러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국이란 시장이 그렇게 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희들은 그들과 이제까지 제국 시장을 양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과 이 좁디좁은 시장을 나눠 갖는다는 것은 결국 제국에서 저희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돈이 궁한 황실 입장에선 굳이 저희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있기 때문에 저희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장의 술렁임은 계속됐고, 그들을 향한 록펠러의 말도 거침이 없었다.
“하여 그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저희 쪽으로 흡수시키려 합니다.”
말을 마친 록펠러는 차분히 서서 자신에게 향할 질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술렁이던 길드원 중에서 몇몇이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청했다.
록펠러는 그들 중 한 명을 지목하여 세웠다.
“모두를 향해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어느 이름 모를 길드원이 모두를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크흠! 좋은 생각이군요. 저는 찬성입니다!”
찬성이란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와 아우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우리가 그냥 눌러 버리자고!”
“이참에 싹 눌러 버리는 거야! 제국 시장은 우리 거라고!”
“아니, 무슨 개소리야! 그러다 문제라도 생기면 다들 책임지실 겁니까!”
그런 그들을 향해.
록펠러가 평소와 다르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 물음에 다른 길드원이 거수하자 록펠러는 그를 지목하여 발언권을 주었다.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편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브루봉에서 장사하고 있는 깁슨입니다. 블랙라벨 유니온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곧 이스마일 가문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겁니다.”
그가 회의장으로 시선을 주자 대부분 길드원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그들이 제국 제일의 암살자들이란 건 모두가 잘 아시겠죠? 그런데도 블랙라벨 유니온을 굳이 건드려야겠습니까?”
그는 이어 록펠러에게 물었다.
“아니면 나름 대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자신을 향한 물음에.
록펠러는 소란스럽던 회의장을 조용히 시킨 채 목소리를 냈다.
“물론 있습니다.”
대책이 있다는 말에 회의장이 잠시 술렁였으나 이내 록펠러의 말을 듣기 위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우선 이전 길드 회의에서 발언했던 것처럼 저희 리옹 길드는 이번 왕관 전쟁에서 2황자 전하를 지원할 생각입니다. 모두가 잘 아시겠지만 2황자 전하는 이스마일 가문 출신의 황자입니다. 그런 그를 지원한다는 것은 이스마일로부터 크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일이죠. 그럼 생각해 보십쇼. 그런 저희를 이스마일 쪽에서 함부로 대할 수나 있겠습니까? 2황자 전하를 밀고 있는데?”
그런 록펠러의 말에 자신을 깁슨이라 밝혔던 길드원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록펠러 공께서 1황자와 만남은 잘 해결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나머지 3황자가 문제인데…… 다들 아시다시피 3황자 전하는 싱클레어 가문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희 역시 오래전부터 싱클레어 가문과 함께해온 세력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저희가 만약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2황자 전하를 지원한다 치면 3황자 전하나 싱클레어 가문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말에 동조한 몇몇 길드원들이 고성을 지르며 회의장을 소란스럽게 했다.
“당연히 가만히 안 있지! 그들은 뭐 바보입니까?”
“그들은 마법사입니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사람이 의리를 지켜야지!”
그런 회의장을 향해.
록펠러는 우선 공감한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 말도 맞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도 충분히 공감 가는 내용입니다.”
“그럼 무슨 생각입니까?”
“그래서 저흰 더더욱 빨리 블랙라벨 유니온과 전쟁에 들어가야 합니다. 2황자를 지원하는 명분이 바로 블랙라벨 유니온과의 전쟁이기 때문이죠.”
“그럼 싱클레어 가문은요?”
“저희가 왕관 전쟁이 아닌 블랙라벨 유니온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도 뭐라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1황자 전하가 저를 찾아왔어도 그냥 갔던 것은. 저희가 2황자 전하만 지원하기로 서로 합의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록펠러는 1황자와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 전부 설명해 주었다.
리옹 길드는 1황자, 3황자 모두 지원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2황자만 지원하기로 약속한 내용을 모두에게 알린 것이다.
“하여 1황자와 약속한 내용이 있기에 저희는 더더욱 2황자 전하만 지원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 문제없이 넘어간 1황자가 다시 찾아와 말썽을 일으킬 겁니다.”
록펠러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테페즈가 두려운 건 모두 공감하실 겁니다. 그러니 저희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분을 내세워 2황자를 지원하고, 그 목적을 왕관 전쟁이 아닌 블랙라벨 유니온을 없애는 것으로 싱클레어 가문을 설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길드원마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인지.
이전과 다르게 회의장 내부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언권을 가지지 않은 한 길드원이 목소리를 냈다.
“이유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싱클레어 가문에서 아쉬운 소리가 나올 텐데요?”
그가 이어 말했다.
“어쩌면 저희에 대한 지원을 전면 철회할 수도 있습니다. 3황자 전하가 왕관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한다면 그땐 또 어쩔 겁니까? 애당초 그들이 지원해 주는 종이가 없으면 차용증서도 못 만드는 마당에.”
그런 그에게 록펠러가 반문했다.
“그럼 1황자 전하가 이번 왕관 전쟁에서 이기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1황자가 엄포를 내놓은 것처럼 다들 장사를 접으실 겁니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록펠러는 모두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 어떤 선택을 해도 곤란하다는 건 모두가 공감하고 계실 겁니다. 이렇듯 이런 애매모호한 자세가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저흰 1황자, 3황자 그 누구도 배팅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싱클레어 가문에선 아쉬운 소리가 나오겠죠. 분명히 나올 겁니다. 하지만 저희 역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부분이야 나중에 3황자 전하가 왕관 전쟁에서 이기시면 그때 잘 보답해 드리면 됩니다.”
길드원 모두 이 일에 대해 생각이 제각각이었지만.
록펠러의 말처럼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 게 어쩌면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들은 2황자가 왕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조용하던 회의장에서 록펠러의 생각에 동조하는 길드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블랙라벨 유니온과 벌이는 전쟁에 집중해서 최대한 저희 쪽 명분을 만드는 게 좋겠군요. 어차피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가망 없는 이스마일을 지원하는 저희에게 뭐라 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공감한 다른 길드원이 목소리를 냈다.
“싱클레어 가문을 도와줘야 하는 게 의리는 맞지만. 그렇게 되면 1황자가 또 난리를 칠 테니. 이건 뭐 의리를 떠나서 저희가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1황자도 조용히 떠난 걸 보니 아마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너무 크게 문제 삼진 않을 겁니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자.
록펠러는 확인 차 모두를 향해 물어보았다.
“더 다른 의견은 없으십니까?”
모두는 침묵으로 긍정하는 듯싶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면 블랙라벨 유니온과의 전면전은 계획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한 길드원이 거수했다.
록펠러가 발언권을 주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문을 드러냈다.
“전쟁이야 좋은데. 록펠러 공께선 대체 어떻게 그들과 전쟁을 하실 생각입니까?”
록펠러가 씩 웃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간 병사들처럼 총칼을 들고 싸우진 않겠죠. 다행스럽게도 그런 식은 아닙니다.”
그 말에 회의장을 채우고 있던 길드원들이 옅게 웃었다.
“그럼 대체 어떤 식입니까? 총칼을 들고 싸울 것도 아니면.”
“적진 한복판에 가서 장사를 해볼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그쪽이 많이 핫하다고 들었습니다. 신항로 개척이나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하죠? 대출 사업도 나름 활황이라고 하던데…… 오죽했으면 거기서 돈을 못 빌린 사람들이 리옹까지 찾아왔겠습니까?”
록펠러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그런 곳이니 저희가 가서 장사를 해주는 게 나름 예의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