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25. 라이얀 테페즈(6)
절대 화폐.
위조가 불가능한 화폐를 만들어달라는 말에 이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완전한 복제가 가능한 마법도 있는데.’
세상에 없는 마법을 구현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나 록펠러가 말한 절대 화폐에 대해선 이한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다 좋은데. 대체 어떤 식으로 만들어달라는 거야?”
“틀에 대해선 제가 대충 잡아놨습니다. 각 고블린 달러마다 공공 거래 장부를 기록하고 이것들을 서로 연결시킵니다. 즉, 모든 고블린 달러가 동일한 거래 장부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모든 고블린 달러에 동일한 거래 장부를 기록한다?”
“네, 거기서 위조된 고블린 달러가 끼게 되면 기존에 있던 고블린 달러가 그것을 구별해 내는 겁니다. 거래 장부야 전부 동일하니, 그것과 다른 거래 장부를 가진 녀석이 끼게 되면 그것을 쉽게 가려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똑같이 생겨도 말이죠.”
“같은 거래 장부면…… 서로 같은 반응을 보이는 식으로 하면 되겠군.”
“설령 거짓된 장부를 가진 다수의 고블린 달러가 등장하게 되더라도 51%의 점유율을 뺏기지 않는다면 전부 거짓으로 판별 나게 만들면 됩니다.”
“51%라…….”
록펠러는 블록체인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고블린 달러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을 이어나갔다.
생소한 개념이었으나, 이한이 보기엔 그 개념으로 화폐의 위조 여부야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번거롭기는 한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그냥 머리 좀 굴려봤습니다. 구현은 가능하시겠죠?”
“밑바닥에서 시작했다면 시간이 좀 걸렸겠지만, 대충 틀은 알았으니 그대로 구현시키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럼 됐습니다.”
록펠러가 말한 절대 화폐를 만드는 일은 이한 입장에선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다 좋은데 그 종이돈이란 게 정말 돈처럼 쓰일 수 있나? 사람들이 그걸 돈처럼 쓰는 걸 보기야 했었는데…….”
“고블린 달러에 대해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고블린 달러에 대해 말하는 거야. 나는 그게 도무지 돈처럼 안 보였다고.”
이한은 소설 속 주인공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금융에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이한이 품에 있던 돈주머니에서 금화를 한 움큼 쥐어 록펠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것보단 진짜 돈은 바로 이거지. 이게 진짜 돈이지, 그깟 종이돈은 뭔가 좀…….”
이한의 모습을 보고 록펠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돈이란 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돈? 돈이야 그냥 돈이지.”
록펠러는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틀렸습니다. 돈이란 건 말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네, 믿음이죠. 지금 당신이 쥐고 있는 그 금속 화폐는 대체 무슨 근거로 돈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거? 이거야 뭐 예전부터…….”
길게 휘어진 록펠러의 입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게 바로 믿음이란 겁니다. 돈이 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요소죠. 생각해 보십쇼. 종이돈보다 무겁고 노란빛이 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사람들이 환장을 하겠습니까? 실질적으로 사용하기 편한 건 종이로 만들어진 고블린 달러인데.”
“이건 금이잖아. 황금이라고!”
“그 금이란 것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계속 그 의미를 부여하면서 결국 가치 있는 물건이 된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금이란 건 그저 땅에서 캘 수 있는 그저 그런 광물 중 하나였겠죠.”
록펠러가 바로 말을 이었다.
“고블린 달러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의미가 없었겠죠. 하지만 사람들 인식 속에 고블린 달러가 돈이라는 인식이 계속 박힌다면. 언젠간 사람들은 금화가 아닌 고블린 달러를 돈으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현재 금화의 위치는 고블린 달러가 대신하게 되겠죠.”
이한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별로 그렇게 될 거 같지 않은데. 어차피 당신이 말한 그 고블린 달러라는 것도 결국 방코에서 금화로 바꿔주니까 사람들이 돈처럼 쓰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상황이 계속되고, 사람들이 굳이 방코에 와서 돈처럼 쓰이는 고블린 달러를 금화로 바꾸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희들이야 금화가 돈이라는 인식이 뼛속까지 박혀 있어서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겠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고블린 달러를 계속 돈처럼 사용한 아이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록펠러가 물었다.
“그 아이에게 있어 돈은 방코에 처박혀 잘 보이지도 않는 금화일까요? 아니면 일상에 흔히 쓰고 있는 고블린 달러가 될까요?”
그 물음에 이한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금화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고, 록펠러가 가정한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고블린 달러를 돈처럼 썼던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게 뻔해 보였으니까.
“아마 제 생각과 같으실 겁니다. 그 아이에게 있어 돈은 잘 쓰이지도 않는 금화가 아닌 오히려 고블린 달러가 되겠죠. 그건 고블린 달러가 진정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돈으로서 계속 인식되어 왔기에 없던 믿음 같은 게 생긴 겁니다. 고블린 달러가 돈이라는 믿음이 말이죠.”
이어지는 말은 나름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게 바로 저의 일이기도 합니다. 고블린 달러를 금화 혹은 다른 가치 있는 것과 연동시킨다든지, 아니면 국가나 어떤 믿을 수 있는 단체가 그것을 보장해준다는 확실한 배경이 있어야 사람들 인식 속에서 고블린 달러가 진정한 돈으로 자리매김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내가 못하는 건데?”
“누가 그 일을 당신보고 하라고 했습니까? 그건 저와 리옹 길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죠. 바로 고블린 달러를 완성시키는 일입니다.”
이한이 이해한 듯 보이자 록펠러가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부디 제가 제안한 고블린 달러를 꼭 완성시켜 주십쇼. 그래야 허공에서 찍어낸 돈으로 오직 당신과 나만이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흡사 악마의 제안과도 같은 그 말을.
이한은 진심으로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것참 기발한 생각이군. 가치도 없던 걸 돈으로 만들어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자니. 그런 거야 나도 원하는 일이지. 그것도 당신과 내가 무한히 찍어낼 수 있는 돈으로 말이야.”
여기서 양심?
이한에게 양심?
그딴 건 없었다.
오직 자신 앞에 펼쳐질 장밋빛 미래만 그리고 있을 뿐.
“그보다. 그런 생각은 또 어떻게 한 거야? 당신 머리가 좋은 모양이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쪽 일에 있다 보면 자연히 드는 생각입니다.”
“살다 살다 당신 같은 방코 업자는 처음 보는군. 나는 그저 돈이나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보다 몇 단계 진화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진화라, 웃기는군.”
이한은 씩 웃으며 록펠러에게 세운 검지를 겨눴다.
“당신, 아주 마음에 들어. 생각하는 게 말이야. 나랑 잘 어울릴 거 같아. 앞으로도 자주 보자고.”
“그보다 제가 제안한 고블린 달러는 언제 만드실 겁니까?”
“그것도 슬슬 시작해야지. 왠지 재밌어 보이거든?”
“그렇습니까?”
“대충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당신 말대로 우리 외엔 위조가 불가능한 절대 화폐를 만들어서 가져올 테니까.”
“그럼 당신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이한은 자취를 감추기 전 이 말을 남겨주었다.
“완전한 고블린 달러야 내가 만드는 거지만, 그것을 펑펑 써재낄 세상은 바로 당신이 만드는 거야. 부디 내가 실망하지 않게 잘해. 그래야 당신이나 나나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테니까.”
떠나간 이한과 맞물려 록펠러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곤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옅게 미소 지었다.
“후, 어지러운 하루였습니다. 다행히도 두 일 모두 잘 풀렸군요.”
여기서 리카르도는 록펠러와 1황자가 나눈 대화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이전에 록펠러는 2황자를 황좌에 앉힐 생각으로 민다고 했었다.
하지만 1황자에겐 블랙라벨 유니온과의 통합을 위해 2황자를 민다고 했으니 여기서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런 리카르도를 두고 편히 앉는 록펠러가 흘리듯 이 말을 남겨주었다.
“나중에 2황자 전하가 황좌에 오르면 저승에 떠돌고 있을 1황자 전하가 어찌 생각할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이스마일 세력이 죽었다고 해서 저리 방심을 할 줄이야. 뭐, 이해는 합니다. 이스마일 사정이 너무 안 좋다 보니 저리 생각할 수도 있겠죠.”
역시나.
자신의 걱정은 괜한 기우였다.
2황자를 황좌에 앉히겠다는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아까 그런 말을 한 것은 찾아온 1황자를 회유시키기 위함으로 보였다.
‘그런데 의문이긴 해. 1황자 말도 틀린 게 없으니.’
리카르도가 생각하기엔 가망이 없다던 2황자의 사정도 완전 틀린 건 아니었다.
아무리 리옹 길드가 지원한다고 해도 이스마일 가문을 이교도 세력과 연관시킨 교단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다면 2황자가 황좌에 오를 가능성이 아예 없었으니까.
“교단에서도 2황자 전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2황자 전하가 황좌에 오를 가능성도 극히 낮아지겠죠. 저희가 2황자 전하를 지원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물론 지금 교단에선 그렇겠죠.”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인지 록펠러의 입매는 길게 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단의 지배 세력이 바뀐다면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일입니다.”
현 교황인 펠릭스 3세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사인은 독살.
하지만 대중에 공개된 이유는 노환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애당초 교황의 시신을 부검할 수 없으니 생긴 일인데, 그 사건의 진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록펠러는 들으란 듯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2황자 전하께서 왕관 전쟁에 나가신다면 이스마일 쪽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교단을 상대로 움직여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교단 입장도 바뀔 가능성이 있는 거고.”
이어지는 말은 록펠러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가 밀게 될 베르키스 주교 각하께서 그 빈자리를 채우신다면 대충 제가 원하는 그림이 나올 겁니다.”
리카르도는 록펠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베르키스 주교 각하를 그 정도 위치까지 올리려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겠죠. 정말 많은 돈이 필요할 겁니다.”
록펠러는 리카르도에게 들으란 듯이 이스마일 가문이 블랙라벨 유니온을 치려는 자신들을 묵인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아주 대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봐 잘 들으라고. 당신 들으라고 한 소리니까.’
“그리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선 저희가 제국 돈줄을 전부 쥐어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블랙라벨 유니온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저희 밑으로 무조건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제국 시장을 독점할 수 있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록펠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수술 전 부모 동의라도 얻어야 하는데…… 혹시 이스마일 가문과 연락할 방법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록펠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리카르도 입장에선 블랙라벨 유니온은 버려야 하는 패로 보였다.
2황자를 황좌에 앉히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일은 또 아니라서.”
말을 마친 록펠러가 편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정체는 안 밝힐 테니 밑에 있는 사람이라도 보내려나? 그거야 뭐 알아서 하겠지.’
어찌 됐건.
그림 자체는 잘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