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25. 라이얀 테페즈(5)
록펠러와 악수를 마친 1황자가 근처에 있던 이한에게 잠시 시선을 주더니 이내 자리에서 떠나갔다.
트리니티 역시 록펠러와 이한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곧바로 1황자를 쫓아갔다.
둘이 떠나가자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이한이 말했다.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녀석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 줄이야. 난 예상도 못 했다니까?”
1황자가 마지막에 보인 모습은 오직 왕관 전쟁 이후를 생각한 수였다.
이를 모를 리 없던 록펠러가 떠나간 1황자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전쟁자금일 줄이야.’
“돈이 좋긴 좋죠. 당신도 따지고 보면 돈 때문에 여길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생판 모르는 절 지켜주셨죠. 이게 다 돈의 힘입니다.”
그 말에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돈은 아니지. 정확히는 마석이지.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마석이거든.”
“그 마석도 결국 돈으로 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돈이죠.”
“중간 과정이 생략되잖아. 당장 필요한 건 마석이라고. 이 녀석을 키울 수 있는.”
이한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벨트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심오한 기운이 잠시 흘러나왔다가 이내 이한의 간섭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한이 다시 말했다.
“그보다 일은 싱겁게 끝난 거 같은데.”
아쉽게도 1황자가 조용히 떠나 이한이 재미를 보지 못했다.
여기서 난동이라도 부렸거나 아니면 도시 밖에 있는 군대를 끌고 왔더라면 정말 재밌었을 텐데.
이한이 정말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록펠러가 옅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하루 일당은 버셨으니 손해는 아니겠군요. 약속대로 마석 70개를 드리겠습니다. 떼먹을 생각은 없으니 맘 편히 놓으시길.”
그러자 이한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보너스는? 보너스도 같이 주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기엔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얼굴 한번 비춰주고 마석 70개를 가져간다면 누가 봐도 남는 장사인데. 그런데도 보너스를 운운하십니까?”
록펠러의 말대로 이한이 와서 딱히 한 건 없었다.
“그래도 좀 챙겨주지 그래? 내가 그리 싸구려 인력도 아닌데.”
“다음 기회에 보너스를 왕창 챙기실 일이 있을 겁니다. 그때 한번 고려해 보죠.”
“다음 기회?”
이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기회가 어딨어. 우리 만남은 이걸로 끝인 거 같은데.”
“그럴 리가요. 저희 만남이 이렇게 쉽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록펠러는 그에게 받았던 펜던트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를 생각이니까요.”
그 말에 이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봐.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꽤 고급 인력이야. 누가 부른다고 해서 왔다 갔다 하는 동네 똥개 새끼가 아니라고.”
“조건이야 같습니다. 설령 오늘처럼 일이 싱겁게 끝난다고 해도 마석 70개는 바로 챙겨드리겠습니다. 나름 먼 길을 오셨을 텐데, 출장비 정도는 챙겨드려야죠.”
“그때 가서 마석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마석이 아니라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걸 챙겨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당신이 공짜로 오는 것도 아닐 텐데.”
피식 웃는 이한이 세운 검지로 록펠러를 겨누었다.
“명심해. 난 동네 똥개 새끼마냥 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싸구려 인력이 아니라고. 부르는 건 그쪽 자유지만, 그 대가는 확실해야 할 거야.”
록펠러가 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당신을 부르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럼 됐어.”
이한이 떠나가려고 하자 록펠러가 그를 불렀다.
“아, 잠시만. 조만간 다른 일로 당신을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이한이 의문을 표했다.
“다른 일? 다른 일이라면 뭘 말하는 거야? 호위 관련된 일은 아닐 테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
고블린 달러의 완성을 위해, 그리고 싱클레어 가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한의 힘은 필수였다.
“제가 요즘 아주 재미난 걸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된 겁니다.”
“재미난 계획?”
“네, 쉽게 말해서 완전한 독립이죠. 저희가 싱클레어 가문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아마 잘 아실 겁니다.”
이한은 대꾸하지 않고 록펠러가 하는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저희 방코 연합에서 쓰고 있는 차용증서조차 위조 방지를 위해 싱클레어 가문에서 주는 아주 특별한 종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종이가 없으면 애당초 차용증서를 발행할 수도 없고, 만약 그 종이를 쓰지 않는다면 위조 여부를 판가름할 수가 없어 상당히 큰 문제가 됩니다.”
록펠러의 말이 이어졌다.
“어디 그뿐입니까? 현재까지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싱클레어 가문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저희 쪽 차용증서를 위조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솔직히 누가 알겠습니까? 그 특수한 종이를 준 것도 그쪽이고, 그것을 감별할 마법 도구를 준 것도 그쪽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저희야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겠죠.”
“그럴 수도 있겠군. 사이가 안 좋아진다면 골치 아파지겠어.”
“그래서.”
록펠러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을 이한에게 해주었다.
“싱클레어 가문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아주 기발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까 하는데, 여기서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이한은 강한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일과 내가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물론 당신에 대해 제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마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싱클레어 가문 출신보다 더 낫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독자적인 마법도 자유롭게 구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싱클레어 가문 출신의 마법사들도 이뤄낼 수 없는 기적 같은 일들도 아주 쉽게 해낸다고 하죠. 솔직히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당신의 마법적 지식이 싱클레어 가문보다 더 높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까?”
이한도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싱클레어 가문 출신이라는 것들은 전부 다 애송이에 불과한 자들이었으니까.
“부정하진 않겠어. 나도 그 위치까지 오르기 위해 고생이란 걸 좀 했거든. 빌어먹을 수용소 같은 데서 썩었던 시간이 꽤 길어서 말이야.”
그가 말한 수용소가 바로 방대한 지식이 담겨져 있는 ‘무한서고’였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말 여러 방면으로 연구를 했었지. 마법이란 것도 그중에 하나였어. 아마 당신은 모를 거야. 내가 그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고생을 했는지.”
록펠러가 미소를 보였다.
“그런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 저 역시 싱클레어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한 겁니다.”
“구체적으로 뭘 원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고블린 달러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 저희 리옹 길드에서 새로운 화폐로 밀고 있는 것이죠.”
“고블린 달러?”
그러고 보니 금화나 은화 같은 게 아닌, 이상한 종이로 된 화폐가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이를 기억해 낸 이한이 물었다.
“설마 그 종이로 된 돈을 말하는 건가? 방코에 가면 금화로 바꿔준다는.”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 고블린 달러에 당신의 힘으로 위조 방지를 위한 마법적인 힘을 구축하려 합니다.”
“그 종이돈 이름이 고블린 달러였나? 이름 한번 기똥차군. 인간이 만든 화폐에 고블린이란 이름을 붙이다니. 고블린방크에 있는 녀석들이 아주 좋아라 하겠어. 엄한 놈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써먹고 있으니까.”
“아마 이런 작업은 제가 모르긴 해도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높은 수준의 마법사들이나, 아니면 당신 같이 독보적인 실력을 가진 마법사만이 구현 가능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굳이 나서서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마 나 정도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거야.”
록펠러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만약 제가 고안해 낸 고블린 달러가 완성된다면 저희는 더 이상 싱클레어 가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죠. 나름 독자적인 세력으로 커갈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이한이 표정부터 구겼다.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왜 당신 일을 도와줘야 하지?”
그 물음에 있어.
록펠러는 그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로 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이한이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생각난 건데. 오랫동안 함께해온 싱클레어 가문은 믿지 않고, 대신 날 믿는다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뭐라고 날 믿어. 좀 바보 같은데?”
이한에 관련된 소문은 아주 많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아니, 이한은 세상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흥, 잘 알고 있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란 사람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별로 믿음직스럽지도 않구요.”
이한이 피식 웃었다.
“당신. 좀 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그렇게 날 믿지도 않으면서 내게 그런 일을 부탁하겠다고?”
그 물음이 이어지자 록펠러의 입매가 길게 휘어졌다.
“제가 왜 그런 부탁을 한 줄 아십니까?”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그야 당신은 맘껏 위조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뭐?”
이어지는 말들은 록펠러가 고블린 달러를 완성시키기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위조해 쓰셔도 됩니다. 그냥 대놓고 위조해서 쓰십쇼. 대신 남은 안 됩니다. 오직 당신만 가능합니다.”
오직 자신만 가능하다는 말에 이한은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간 어이를 상실해 있던 이한이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아니, 왜 나는 예외로 두는 거지?”
“그야 당신은 그것을 고안해 낸 당사자니까요. 일종의 수고비라 보시면 됩니다. 맘껏 위조하십쇼. 그리고 맘껏 쓰십쇼. 저와 길드는 전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직 당신만을 위해 쓰십쇼. 그게 제가 요구하는 조건입니다.”
“하…… 위조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고, 대신 나만 하라?”
“네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이 아닙니까? 무한대로 돈을 펑펑 쓸 수 있는데.”
이한 입장에선 마다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 종이로 된 돈이 세상에 엄청 퍼지게 되면, 나는 무한대로 돈을 찍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건데.”
“네, 그렇게 되시겠죠. 단, 다른 사람은 위조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면 당신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록펠러가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누리는 걸 남과 나누고 싶습니까?”
“아니, 미쳤어? 내가 왜?”
돌아오는 대답에 록펠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
그것이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인 이한이었다.
‘당신의 소비 성향이나 미래 일까지 완벽히 파악하고 있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 돈이야 쓰겠지만, 그래 봤자 내가 앞으로 찍어낼 돈 앞에서는 의미가 없을 거야. 그리고 당신은 마지막에 그렇게 되잖아. 그러니 더더욱 의미가 없지.’
“그래서 제가 볼 땐 당신이 이 일의 적임자입니다. 어떠십니까? 제가 생각해 낸 마법을 한번 구현시켜 보시겠습니까? 대가는 앞서 말했던 대로 마르지 않는 돈입니다. 평생 필요한 만큼 찍어다 쓰십쇼. 대신 제가 원하는 고블린 달러를 완성시켜 주셔야 합니다. 당신 외에 그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절대 화폐를 만들어 달라 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