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25. 라이얀 테페즈(4)
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먼저 그 정적을 깬 것은 록펠러의 말을 흥미롭게 들었던 1황자였다.
“칼만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원하던 반응이 1황자로부터 나오자 록펠러는 다시 다리를 꼬고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네, 원하시는 게 바로 그런 게 아니었습니까?”
원하는 바는 맞았다.
다만 이어지는 조건이 거슬렸을 뿐.
“대신 나도 지원하지 않겠다, 이 말이냐?”
록펠러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러자 황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최선은 나한테 올인하는 게 최선이겠지.”
“죄송하지만 그런 건 저희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간 싱클레어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체 누구 좋으라고 전하를 지원해 드리겠습니까? 그러다 전하께서 왕관 전쟁에서 패하시면요?”
록펠러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흰 강 위에 떠다니는 오리 알 신세가 될 텐데, 저희가 바보입니까?”
“하여 최선은 둘 다 지원하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1황자가 불만족스러운 듯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나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칼만을 지원하지 않는 건 좋은 일이지만…….’
쉽게 내릴 수 없는 판단이라 생각했는지 1황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트리니티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이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누굴 쳐다보고 있나 했더니 세상에 이한이란 놈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어떻게 생각해.”
1황자가 퉁명스럽게 묻자, 잠시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던 트리니티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멍한 시선을 주었다.
“뭘?”
“방금 얘기하는 거 못 들었어?”
그녀가 난처해지기 전에 록펠러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방금, 라이얀 전하와 칼만 전하 모두 지원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록펠러가 말을 마치자 그제야 트리니티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둘 다 지원하지 않는다고?’
당장 든 생각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까 전 록펠러가 말했던 것처럼 제국의 돈줄을 쥐고 있는 리옹 길드가 미는 쪽이 곧 차기 황제 폐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 가만히 있다 치면, 결국 동일선상에 선 1황자와 3황자만의 싸움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나빠 보이진 않은데…… 그런데 믿을 수 있겠어?”
그 말에 1황자도 같은 생각으로 록펠러를 쳐다보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대들은 이미 싱클레어 가문과 연이 닿아 있는데, 방금 한 말처럼 할 수 있겠나?”
“그전에 제가 말한 대로 한다면 전하께선 깔끔하게 저희를 포기할 의향이 있으신 겁니까?”
“깔끔하게 포기해?”
“더 이상 저희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왕관 전쟁 그 이후에도 말이죠.”
1황자가 생각을 위해 잠시 말을 아꼈다.
‘여기서 칼만과 나를 지원하지 않는다 치면 왕관 전쟁은 순전히 싱클레어 가문과 테페즈 가문의 싸움이 될 거야.’
둘의 재력을 비교해 봤을 때.
싱클레어 가문보단 자신이 몸담고 있는 테페즈 가문이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싱클레어 가문도 가진 재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재력의 일부분은 리옹 길드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유리해지는 건 나겠지. 정말 여기가 가만히 있다면 말이지.’
생각을 마친 1황자는 그래도 의심스러운지 입을 굳게 닫은 채 록펠러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가 한 말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보던 록펠러가 옅게 웃어 보였다.
“제가 한 말을 의심하고 계신 겁니까?”
“그렇다면?”
록펠러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기 시작했다.
“물론 저를 의심하는 전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오래전부터 싱클레어 가문과 함께 해오던 저희가 갑자기 그들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저흰 싱클레어 가문의 개가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이 길드의 수장이 되는 순간부터 모든 건 바뀌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관계까지 말이죠.”
1황자는 잠자코 그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이제부터 저희는 싱클레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나름 독자적인 세력으로 커갈 생각입니다. 교단, 그리고 황실과 협력하여 제국의 모든 돈줄을 쥐어 잡을 생각이죠.”
“제국의 모든 돈줄을 잡는다고?”
록펠러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가 목표하고 있는 적은 전하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지?”
“그들은 저희와 같은 방식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블랙라벨 유니온입니다.”
“블랙라벨 유니온이 그대들의 적이라고?”
1황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이스마일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알고 있느냐?”
“네, 물론입니다.”
“그럼 블랙라벨 유니온을 건들면 그대가 위험해질 것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이스마일이 아무리 이빨 빠진 사자가 됐어도 한낱 방코 연합의 수장을 처리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래서 저는. 그들의 바람인 가문의 부활을 위해 대놓고 2황자이신 크리스찬 전하를 도울 생각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에 1황자가 표정을 구겼다.
“뭐라? 크리스찬을 돕겠다고?”
“네, 크리스찬 전하도 황자 전하가 아닙니까? 그럼 왕관 전쟁에도 당연히 참가할 수 있겠죠.”
이스마일 가문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1황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하하, 계속 말해보거라.”
“저희가 크리스찬 전하를 돕는다 치면 이스마일에서도 가만히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블랙라벨 유니온을 치는 저희를 이스마일에서 가만히 묵인해 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을 지원하겠다?”
“저희야 제국의 돈줄을 모두 잡겠다는 명분이 있으니, 크리스찬 전하를 돕는다 해도 두 전하께서는 아무 말이 없을 겁니다. 이걸로 싱클레어 가문을 구워삶을 수도 있을 거고요.”
“싱클레어 가문에서 가만히 있겠느냐?”
“그래서 저희에게 좋은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제국의 돈줄을 전부 잡겠다는. 어차피 저흰 곧 전쟁에 들어갈 겁니다. 왕관 전쟁이 아니라 블랙라벨 유니온과의 전쟁이죠. 그런 저희가 싱클레어 가문을 도울 여력이나 있겠습니까? 솔직히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핑계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알아서 할 문제니.”
록펠러가 1황자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전하께 물어보겠습니다. 만약 저희가 크리스찬 전하를 지원한다 치면 라이얀 전하께선 그걸 말리시겠습니까?”
자신과 칼만이 아닌 2황자인 크리스찬이 왕관 전쟁에서 이긴다?
이제 그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이스마일 가문의 황자가?
그는 교단에서도 버림받아 아무런 가망도 없는 자였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어째 붙어도 2황자에게 붙는단 말이냐? 거긴 교단에서도 좋게 보지 않아. 설령 왕관 전쟁에서 이겨도 교황 성하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얀 전하. 정녕 제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흥.”
대꾸하지 않는 1황자가 다시 자신의 누이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여기 정신 나간 길드장이 나랑 칼만 대신 크리스찬을 민다고 하는데.”
아까와는 달리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던 트리니티가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하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고 하니까.”
1황자 입장에선 굳이 다 죽어버린 2황자를 지원하겠다는 록펠러의 결정을 말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제국의 가장 큰 돈줄 중 하나인 그가 2황자를 지원하겠다는 건 다소 꺼림칙했으나, 그걸 떠나서 몰락한 이스마일 가문과 그들을 이교도로 낙인찍은 교단이 있기에 2황자가 왕관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아예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옹 길드가 이스마일 황자를 지원하는 명분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봤다.
‘예전의 이스마일이었다면 또 모르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이스마일은 이미 끝났다.’
그런 1황자를 부추기기 위해 록펠러는 이 말도 전해주었다.
“그리고 저희가 이런 식으로 제국의 돈줄을 전부 잡게 된다면. 훗날 어떤 전하가 황제 폐하가 되시든. 저희는 그분을 도와 제국을 대륙 제일로 만들 생각입니다. 만약 라이얀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다면 전쟁 자금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이어지는 말은 라이얀이 그와 만나면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굳이 세금을 올릴 필요도 없이, 그 자금들은 전부 저희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저 전하께서는 제국군을 이끌고 대륙 전역으로 뻗어 나가시면 됩니다.”
전쟁광에게 저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듣기는 좋군.’
잠시간 록펠러의 말을 생각해 보던 1황자가 돌연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쭉 들어보니 그대는 이번 왕관 전쟁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구나. 다른 귀족들은 전부 줄서기 바쁜데 말이야.”
황자의 미소를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인 록펠러 역시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다.
“굳이 누구 편을 들어서 저희가 그 리스크를 감내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희 입장에선 왕관 전쟁에서 누가 이기든, 그저 그분과 함께하면 그만입니다.”
1황자는 수긍한 모양인지 저 혼자 고개를 주억이기 시작했다.
“운이 좋구나. 본래는 이런 취지로 찾아온 게 아니었는데. 정말 칼만은 지원하지 않겠지?”
그 물음에 있어 록펠러는 오직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왕관 전쟁에서 누가 이길 줄 알고 감히 칼만 전하를 돕겠습니까? 그러다 전하가 이기시면 저흰 어떻게 될지 뻔하잖습니까?”
“뻔하겠지. 그건 기대해도 좋다. 만약 칼만을 지원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치면 나중 일이야 어찌 됐든 날 기만한 너부터 죽일 테니까.”
“하하, 괜한 걱정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흰 크리스찬 전하를 지원할 생각입니다. 이유야 대충 설명드렸으니 굳이 묻진 않으시겠죠.”
록펠러의 말처럼 1황자는 애써 묻지도 않았다.
애당초 가능성도 없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처음엔 영 별로였는데.”
훗날 전쟁 자금을 원 없이 빌려주겠다는 그의 말에 혹했던 것일까?
아니면 칼만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말에 적당히 만족을 한 것일까?
당장 다가올 왕관 전쟁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일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던 제국 1황자, 라이얀 테페즈는 굳이 이 자리서 록펠러와 적이 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게 세상일이 아닌가?
훗날을 위해서라도 이 정도 훈훈한 마무리는 1황자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나름 생각이 깊으신 분이었군요. 초반에 범했던 무례는 제가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리옹 길드의 수장이신데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1황자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역시 돈의 힘은 아주 대단해 보였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전하께 더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저 역시 죄송할 따름입니다.”
“앞서 불쾌했던 일이야 서로 간 오해가 있었던 것이니, 오늘 일이야 쉽게 잊혀지겠죠.”
떠날 생각을 한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1황자가 마주 일어서던 록펠러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관 전쟁 이후가 기대되는군요. 록펠러 공이라 하셨습니까?”
“네, 전하. 록펠러 로스메디치입니다.”
“블랙라벨 유니온과의 통합, 아니, 그게 통합이 될지 흡수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칼만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그 약속만큼은 꼭 지켜주시길.”
“그 일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이어지는 말은 록펠러도 나름 진심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칼만 전하는 지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누구 좋으라고 지원을 하겠습니까? 훗날 제가 전하와 함께할 수도 있는 건데요. 안 그렇습니까?”
“부디 서로 간 재미없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