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24. 가문의 탄생(6)
초당 마석 1개나, 분당 마석 1개나.
마석이 썩어나지 않는 이상 그를 고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잠시 고용하든가.’
잠시 고용할 경우, 그가 활약할 시간을 특정 지을 수 없어서 이것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 뜻대로 좋게 협의해 줄 위인이 아니긴 하지. 애당초 노리고 말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록펠러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당신이 드래곤보다 낫다고 해도 비용 문제 때문에 드래곤이 훨씬 낫겠군요. 당신을 고용하는 게 너무 비쌉니다. 비싸도 너무 비싸죠.”
아예 체념하듯 말하자 이한이 표정부터 구겼다.
“이봐, 방금 전까지 날 고용할 것처럼 말해놓고서 갑자기 이러기야?”
“세상에 생각이란 걸 해보십쇼. 분당 마석 1개가 어디 개집 이름입니까? 제국의 황제도 그렇게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이한이 웃어 보였다.
“아니, 날 고용하려면 그 정도 비용은 당연히 지불해야지. 내가 어디 동네 양아치 호위 기사도 아니고, 나름 이름있는 마검의 주인인데.”
이한이 은근슬쩍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검을 쓱 보이자 록펠러는 차분히 고개부터 저었다.
‘소설 주인공이라 해도 몸값이 너무 비싸.’
“아니면 당신이 필요한 단 몇 분만 고용할 수도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생각 좀 해보죠.”
1황자와 평생 대면할 것도 아니고, 이한이 필요한 순간은 최대 한두 시간 정도라는 게 록펠러의 생각이었다.
만약 분당 1개의 마석을 지불한다면 최대 120개의 마석이 필요했고, 이 정도 지불 능력은 록펠러에게 있는 상태였다.
‘마석 120개 정도면 지불 의사가 있긴 하지만 저놈이 그렇게 안 해주겠지.’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오직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의 표본.
그게 바로 이한이었다.
“분당 1개의 마석을 지불할 테니, 대신 필요한 시간만 쓰겠다?”
“만약 동의하신다면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흥, 누굴 호구로 아는 건가? 날 고용하려면 최소 이틀은 생각해야지. 그리고 그게 상식적으로 맞잖아.”
역시나 저 멍멍이 소리가 또 나올 줄 알았다.
록펠러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바로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누굴 호구로 아는 겁니까? 이틀 동안 분당 마석 1개를 지불하게 되면 2,880개가 되는데, 제가 바보라면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이 정도 양이면 고블린 방크에서 드래곤이 아니라 아예 군대를 빌려와도 되겠군요.”
이한은 표정부터 구겼다.
“아니, 날 고용하면서 그 정도 비용도 지불하지 못 하겠다는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날 고용하는데?”
“본인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은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비용이 너무 비싸면 작게 나눠서 다달이 갚으면 되잖아. 이자는 아주 싸게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번엔 록펠러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하하, 그건 저희가 자주 쓰는 수법입니다. 제가 누군지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일개 방코 업자도 아니고, 그런 업자들을 대표하는 길드장입니다. 그런데 제게 그런 말을 하시다니요. 절 우습게 아셔도 너무 우습게 아신 것 같군요.”
이한이 록펠러를 노려보다 이내 피식 웃어주었다.
“그래도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잖아. 좋게 생각하라고. 나름 싸게 해준 거니까.”
록펠러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남자가 양보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소설 속 그 어떤 인물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자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낼 순 없지.’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록펠러는 소설의 애독자였기에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봐, 나는 당신이 무슨 사람인지 훤히 꿰뚫고 있다고. 여기서 당신은 날 모르지만, 난 아니야.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다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그림은 여기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신의 뜻대로 해줄 리는 만무하니까요.”
이한이 대꾸하기 전에 록펠러가 재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군요. 어찌 됐건 당신에겐 마석이 필요해 보이고, 그 마석은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괜히 여러 던전을 도는 것보단 그래도 제게 붙어서 마석을 뜯어내는 게 그쪽 입장에서도 좋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록펠러가 말을 이어가는 사이.
리카르도가 아래층에서 차를 가지고 왔다.
제 앞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 따위엔 관심도 없는 이한이 입을 열었다.
“나야 전혀 아쉬울 게 없어. 마석이야 어차피 세상천지에 널려 있는데.”
이에 질 록펠러가 아니었다.
“저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제가 고용할 사람들이야 세상천지에 널려 있으니까요.”
둘의 첨예한 대립을 지켜보던 리카르도가 말을 아꼈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나선다고 해서 딱히 타협점을 찾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러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한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자 록펠러가 먼저 선수를 쳤다.
“밖까지 배웅해 주시죠. 아무래도 저와 뜻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한이 저 혼자 웃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지?’
보통 이쯤 했으면 대부분 제 뜻을 꺾고 넘어오게 마련이었다.
왜냐?
자신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으니까.
‘가진 건 돈하고 입밖에 없는 녀석이.’
이한이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 않자 록펠러가 다시 말했다.
“뭐하십니까?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으신 겁니까?”
이한이 록펠러를 손가락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이한의 옆으로 리카르도가 서서 밖까지 배웅하기 위해 준비를 하자.
돌연 이한이 자리에 앉으며 록펠러에게 말했다.
“하루에 100개.”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록펠러는 고개부터 저었다.
“안 됩니다. 50개면 생각해 보죠.”
“50개는 절대 안 돼. 내가 던전을 털었을 때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마석 개수가 40~60개는 되거든.”
“그럼 60개로 하시죠. 일당으로 마석 60개 정도면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합니다.”
“나도 체면이 있지 60개는 도저히 안 되겠는데?”
“그럼 65개.”
“80개. 80개면 꽤 깔끔할 거 같은데.”
일당으로 마석 80개 정도면 록펠러 입장에서도 크게 무리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70개로 하시죠. 그리고 일이 잘 마무리되면 보너스까지 더 챙겨드리겠습니다.”
분명 내키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노동의 강도를 따져왔을 때 어느 방코 연합의 길드장을 호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 이한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대신 보너스는 두둑이 주는 걸로.”
이한이 엄지와 중지를 노골적으로 비볐다.
“물론 이것도 필요한 거 알고 있지?”
이후 이한과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록펠러였기에 보너스 부분은 확실히 챙겨줄 생각이었다.
‘보너스 정도야 뭐. 그딴 푼돈에 마음껏 흥분하라고. 어차피 내겐 의미가 없으니까.’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보너스가 무슨 대수라고.”
이한이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 말이야.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최근에 던전만 계속 돌아다녀서 며칠만이라도 어디 가서 쉴까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여기 일을 맡은 것이니, 다음에도 내가 이럴 거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 그땐 죽어도 따따블이니까.”
그 말에 록펠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다음엔 마석으로 쇼부를 안 보지. 그때가 되면 당신도 마석에 그리 목매지 않을 테니까.’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당신과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쩐의 힘이 아직 완벽하지 않거든요.”
이한이 비웃었다.
“더 좋은 조건?”
이한은 대놓고 고개를 저었다.
“이봐, 단순히 마석만 생각하면 안 돼. 그때 가서 내가 뭘 요구할지 당신이 어떻게 알겠어?”
록펠러의 입매가 길게 휘어졌다.
제법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과연 그럴까? 이다음에 당신에게 제시할 건 무한에 가까운 돈인데?’
찍어내고, 또 찍어내고, 계속 찍어내도.
절대 마르지 않는 돈.
고블린 달러.
“그거야 두고 보시죠. 다음엔 더 좋은 조건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은근히 기분이 나쁜 자였다.
겉으로 봐선 별거 없어 보이는데, 속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이한은 록펠러에 대한 평가를 좋게 내리진 않았지만, 어차피 길게 갈 인연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너무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때가 언젠데? 아니면 오늘부터야?”
“오늘은 아닙니다. 1황자 전하가 오시는 날. 그날부터 이틀 정도입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리옹이란 도시는 미치광이 전쟁광이라 불리는 1황자가 좋아하는 곳이 아니었다.
1황자도 마석탱크와 관련된 일로 잠시 들르는 것일 뿐.
만약 큰일이 없다면 1황자가 리옹에 머무는 시간은 극히 짧을 거란 게 록펠러의 생각이었다.
“보니까 당신도 1황자가 언제 오는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제가 무슨 황실 사람도 아니고, 1황자 전하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이쪽으로 오게 된다면 일이 그렇게 될 것 같으니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겁니다.”
이한이 씩 웃어 보였다.
“기뻐하라고.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내가 당신을 지킨다면. 당신은 세상 누구보다 안전할 테니까.”
록펠러 역시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저야 더 바랄 나위 없겠군요.”
이한은 품에서 루비 박힌 펜던트를 꺼내 록펠러에게 던져주었다.
“타미르의 호출석이다. 본래 이런 용도가 아니긴 한데……. 아무튼 그걸 쥐고 날 간절히 생각한다면.”
이한이 품에서 또 다른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록펠러에게 던져준 것과 똑같은 루비 펜던트였다.
“이것 역시 알아서 반응할 테니, 그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찾아오겠다.”
록펠러가 루비 펜던트를 손에 쥐자 이한의 손에 들려 있던 루비 펜던트가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충 그런 식이야. 상대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면 알아서 반응하는 거지. 그런 아티팩트니까 당신 중간 물건처럼 소중히 간직하라고. 일이 끝나면 바로 회수할 생각이니까.”
말을 마친 이한은 정말 귀신같이 사라졌다.
마치 이한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적막만 감도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록펠러는 이한이 남기고 간 루비 펜던트를 잠시간 만지작거렸다.
“타미르라면…… 연인끼리 서로 나눴다던 그 쌍둥이 아티팩트로군요. 예전에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본래 연인끼리 나눠 갖는 거라 쓰이는 용도가 좀 다르긴 한데, 뭐, 나름 유용할 것 같긴 하군요.”
리카르도가 침묵을 깨자 록펠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 소문대로 신출귀몰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이런 식으로 이한이란 자가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예고도 없이 그렇게 찾아올 줄이야.”
리카르도 역시 소문의 이한과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다들 그자를 경계하는지 대충 알겠어. 겉과 다르게 그 깊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야.’
“위험하긴 했습니다.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은 자라.”
하지만 이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록펠러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부터 저었다.
“그건 소문만 그럴 겁니다. 잠시였지만 그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그리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군요. 나름 대화란 게 통하긴 했습니다. 그 대화가 다소 불쾌하긴 했어도.”
이렇게 이한에 대한 건 끝났다.
나머진 그를 기다리는 일뿐.
록펠러는 이후 자신을 찾아올 1황자를 머리에 그리며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내가 평민 출신이니 찾아오는 1황자도 여기 일을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구워삶기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이한도 구슬렸겠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 록펠러는 오히려 자신감만 가득 찬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왔다간 정말 큰코다치는 거지. 애당초 그 자린 평민이 앉을 수 없는 자리인데.’
록펠러는 사람 좋은 인상으로 말했다.
“이제 맘 편히 1황자를 기다려 보죠. 저희야 준비는 다 끝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