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23. 마석탱크(6)
리옹 길드에 새 길드장이 추대되고, 그가 선출됨과 동시에 추진했던 길드 강령들이 빛을 보기 시작할 무렵.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한이 리옹에 위치한 게토 누오보 지역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자신에게 온 서한을 들고 있던 록펠러가 리카르도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것을 차분하게 읽어 내렸다.
록펠러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리카르도가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감흥 없는 말투였지만, 록펠러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화답해 주었다.
“별문제는 없었군요. 무탈하게 길드장 자리에 앉은 것 같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황실에서도 싱클레어 가문과 같이 길드의 선택을 존중한 거겠죠.”
“그렇겠죠. 싱클레어 가문도 인정한 마당에 황실에서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고, 록펠러도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했기에 여기에 이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이로써 평민의 신분을 벗고 귀족이 되는 건가?’
“장족의 발전이로군요. 한낱 평민이었던 제가 황실의 서임을 받고 이렇게 정식 귀족이 될 줄이야. 남작 신분만 해도 제국 황실에 몇십 년간 세금을 줄기차게 바쳐야 정식으로 인정받는다고 들었었는데…… 그런 자리를 이리 꿰차다니.”
이어 록펠러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 소식을 듣고 좋아할 동생들이 떠오른 것이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제 동생들도 많이 좋아하겠군요. 과정이야 어찌 됐든 저를 따라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됐으니까요.”
말을 마친 록펠러는 자신의 동생들 중 가장 막내인 막둥이 루시아를 떠올릴 수 있었다.
다 큰 남동생들이야 당장 평민에서 귀족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지만.
어린 루시아만큼은 달랐던 것이다.
“다른 동생들보다 막둥이 루시아에겐 분명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이젠 돈 좀 만지는 부유한 평민 집안이 아니라 어엿한 귀족 가문이니 분명 좋은 곳에 시집을 갈 수 있으니까요.”
가족의 일을 마치 제 일처럼 좋아하는 록펠러를 보고서 리카르도는 나름 느끼는 게 많았다.
아무리 같은 가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겐 어느 정도 선이 있었던 것이다.
“록펠러 공께선 본인이 잘된 것보다 가족들이 잘되는 게 더 좋으신가 봅니다.”
“그야 당연하죠. 저와 제 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추위와 굶주림도 같이 이겨낸 사이니까요. 제 일은 곧 동생들의 일이고, 동생들의 일은 곧 저의 일입니다.”
저런 모습.
왜 자신의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을까?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인데.
‘이유가 뭘까?’
잠시간 생각해 보니 그 이유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록펠러와 그의 형제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경쟁이란 단어가 그들에겐 존재했던 것이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과 매일 같이 경쟁하며 살얼음판 같은 지옥 속에서 살아왔었다.
그 지옥을 견디고 독보여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또 가문의 주요 요직들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그 미덕이 존재하는 한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도 결국 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럽긴 하군. 적어도 형제들을 저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형제들끼리 서로 싸운 적은 없었습니까?”
그 물음에 록펠러는 피식 웃었다.
“많았죠. 설마 그런 일이 없었겠습니까? 저만 해도 어렸을 때 둘째인 앤드류를 많이 못살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야 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죠.”
록펠러가 이어 말했다.
“저와 제 동생들은 다른 집안의 형제들과 다르게 서로 싸우지 않고 무조건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약속했죠.”
리카르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애당초 그의 입장에선 형제를 믿는다는 전제 자체가 우스웠다.
“그러다 배신을 당하면 어쩌시려고.”
그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배신하는 일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잘 당하지 않죠. 하지만 가족이 하는 배신은 다릅니다. 일단 믿고 있으니까 배신을 당했을 때도 크게 당하게 되죠.”
그래서 그는 줄곧 살아오면서 이 원칙만은 굳건히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아무도 믿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죠. 그 누구든 항상 의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배신을 당한 적은 없네요.”
배신을 당한 적?
사실 있었다.
다만 죽은 자와 얽힌 소문이 퍼지는 법이 없으니 그는 나름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말에 록펠러도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남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가족만 예외로 둔 겁니다.”
“그들이 진정 록펠러 공을 배신하지 않으리라 확신하십니까?”
그 물음에 있어.
록펠러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니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록펠러는 이렇게 답해주었다.
“형제들끼리 서로 믿는 것. 이건 다른 가문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저희 로스메디치만의 힘이자 전부니까요.”
믿음이 곧 힘이다.
리카르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딴죽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건…… 가훈 같은 겁니까?”
“가훈이라……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적어도 제가 힘든 시기부터 동생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말입니다. 다른 집안과 다르게 우리 형제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아마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해서 동생들도 거의 세뇌 수준일 겁니다.”
“…….”
이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딱히 의미를 두자면 다른 가문과 다른 로스메디치 가문의 특징 정도로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정식 귀족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동생분들도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그보다 어서 이 소식을 동생들에게 전해야겠군요.”
록펠러가 급하게 펜을 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막둥이 루시아도 이제 이쪽으로 불러들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자고로 노는 물이 좋아야 꼬이는 물고기도 좋은 법입니다. 이쁜 막둥이를 시골 촌구석에서 엄한 놈하고 눈을 맞출 순 없죠.”
록펠러의 동생 사랑이야 리카르도 입장에선 그저 흘려들을 이야기였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황실에서 온 서한엔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한창 동생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느라 바쁜 록펠러에게 리카르도가 묻자 록펠러가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뭘 들은 건가?’
“있긴 했습니다. 서한 말미에 곧 1황자 전하께서 오신다고 하는군요.”
요르문간드 혁명군이 최근 그 뿌리까지 토벌됐다는 소식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혁명군 토벌이 끝났으니 자연스레 1황자의 관심을 왕관 전쟁에 쏠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여러 소식을 듣고 있던 리카르도가 혹시나 해서 록펠러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여러모로 피곤해지겠군요. 1황자 전하께선 언제 오시는 겁니까?”
“시기야 특정 지어지지 않았지만, 곧 오신다고 하는군요.”
“그렇습니까?”
“그보다 이한을 구하는 광고는 어떻게 된 겁니까?”
1황자가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게 자신을 지켜줄 호위 기사였다.
그래서 록펠러가 이한을 구하는 구인광고에 대해 묻자 리카르도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이한이 찾아갈 법한 모든 곳에 광고지를 뿌려놨습니다. 마석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 분명 저희에게 찾아올 겁니다.”
그 말에 록펠러가 물었다.
“그보다 마석은 준비된 겁니까?”
마석을 구하는 일?
어차피 돈이 문제였다.
“마석과 관련된 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저기서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으니, 이한이 원하는 양만큼은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문제는 이한이라는 건데…….”
대륙 여기저기에 광고를 뿌린 시간이 제법 됐었다.
이한이 그 광고를 안 봤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
‘마석이 필요하면 무조건 찾아올 텐데…….’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소설 속 인물들 중 가장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 바로 주인공 이한이었으니까.
‘무한서고에 갇혀 있던 시간이 길어서 장거리 이동 마법으로 움직이는 건 이한에겐 아무 일도 아닐 텐데.’
“기분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제 앞에 나타날 것 같은데 소식이 영 없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마석이 별로 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리카르도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아무도 없는 주변을 미묘하게 훑기 시작했다.
록펠러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변화를 리카르도는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마나의 잔향이 짙군. 설마?’
“순전히 제 느낌이지만. 밑에 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록펠러가 의문을 표했다.
“손님이요?”
“네, 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리카르도가 잠시 아래로 내려간 사이.
록펠러는 리카르도가 내려간 계단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누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게 누구일까?
혹시?
그 순간.
록펠러의 옆에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놓고 나를 찾던데.”
놀라 옆을 보니, 마치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는 이가 있었다.
처음 본 얼굴이었지만, 머리 스타일과 눈동자, 그리고 그자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보고서 판단하건대.
‘이한.’
아무래도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이 맞는 듯싶었다.
“누군가 했더니 별거 없는 방코 업자였군.”
피와 흙먼지로 얼룩진 옷.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검 하나.
그리고 이 세계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흑발과 흑안의 주인.
록펠러는 놀란 척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별로 놀라진 않았어.’
“누, 누구십니까?”
그 물음에 정체불명의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누구냐고? 지금까지 날 찾았으면서 지금 나한테 누구냐고 묻는 거야?”
“설마…… 이한?”
정체 모를 사내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잘 맞혔군. 아니지, 어차피 여기서 검은 머리는 나밖에 없으니까 내 정체를 맞히는 게 어렵진 않겠어.”
록펠러가 급히 계단 쪽으로 시선을 두자 이한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있던 조수 녀석을 찾는 거라면 녀석은 지금쯤 엉뚱한 것을 쫓아 거리 위로 나갔을 거야.”
이한의 입장에선 록펠러와 같이 있던 사내는 좀 성가신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쪽으로 시선을 줄 필요는 없어. 지금쯤 신나게 내 환영을 쫓고 있을 테니까.”
이한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마석이란 미끼로 날 찾은 이유가 뭐지?”
말을 마친 이한은 신고 있던 장화를 벗어 그 안에 있던 흙먼지를 털어냈다.
주변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 보니 자연스레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런 이한의 모습을 보고 록펠러가 생각했다.
‘날 전혀 경계하지 않는군. 하긴 그럴 수밖에.’
자신은 마법은커녕 칼조차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었다.
그러니 경계심이 죽은 이한의 행동이야 충분히 이해가 됐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찾아오셔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보다시피 전 일반인이라서 그렇게 찾아오시면 깜짝 놀라거든요.”
방금 전까지 놀라서 말까지 더듬던 방코 업자가 갑작스레 말을 편하게 하자 이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제가 불렀으니 당연히 이렇게 찾아오신 거겠죠. 바쁘신 분을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긴장한 모습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는 록펠러가 나머지 뒷말을 이어주었다.
“원하는 만큼 마석을 드릴 테니 당분간 제 호위 좀 맡아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