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23. 마석탱크(5)
리카르도가 있을지도 모를 드워프와의 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록펠러는 자신에게 온 또 다른 편지를 펼쳐 들었다.
영주와 자신의 동생이 보낸 것보다 더 고급스럽고 향기까지 나는 그 편지는 아쉽게도 황실에서 보낸 게 아니었다.
그 편지엔 싱클레어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길드장이 된 나를 축하하는 모양이군.’
싱클레어 가문에서 보낸 편지 내용을 대략 훑어보니 리옹 길드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과 함께 새 길드장인 자신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절 축하하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리카르도가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겠죠. 본래 리옹 길드는 싱클레어 가문과 연이 깊지 않습니까?”
“편지 내용을 보니 조만간 사람을 보낸다고 하는군요.”
새 길드장이 선출됐으니 싱클레어 가문에선 그저 축하만으로 끝낼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새 길드장이 선출된 만큼 이전부터 이어져왔던 관계를 지속하고 싶을 겁니다. 아마도 가문 사람을 보내면서 물질적으로나 어떤 식으로든 호의를 베풀 겁니다.”
록펠러도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겠죠.”
다만 눈가를 살며시 좁히는 걸 보니 나름 생각이 있는 모양.
이를 본 리카르도가 다른 걸 물어보았다.
“그보다 황실에선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겁니까?”
사실 그 어떤 축하메시지와 편지보다 가장 중요한 게 황실에서 온 서신이었다.
록펠러를 리옹 길드의 수장으로 임명한다는 황실의 허락이 있어야만 록펠러는 진정으로 길드장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네, 아직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군요.”
록펠러도 살짝 걱정하는 눈치였다.
황실에서 자신을 길드장으로 서임할 거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자신이 본래 평민이었기에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가 평민 출신이 아니라 일반 귀족 출신이었다면 황실에서도 이렇게 뜸을 들이진 않았을 텐데.”
리카르도는 그 누구보다 귀족 사회와 황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런 자신이 판단하건대 평민인 록펠러가 길드장으로 서임받는 것은 황실이나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다소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지만, 서임 자체를 부정하긴 힘들어 보였다.
“아마 별문제 없을 겁니다. 평민이라 해도 리옹 길드를 황실이나 관료들이 무시할 순 없으니까요.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길드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으니, 황실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군요.”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십쇼. 황실에서도 곧 좋은 소식을 보낼 겁니다.”
말을 아끼는 록펠러는 싱클레어 가문에서 온 편지를 내리고 다른 편지들도 쭉 살펴보았다.
전부 다 자신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것들이야 의미 없으니.’
자신에게 온 편지를 전부 내려놓은 록펠러가 책상에 앉은 채로 목소리를 냈다.
“그보다 광고 하나를 낼까 하는데.”
록펠러가 운을 떼자 리카르도가 시선을 주었다.
“광고요?”
조수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라면 자신이 있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뭘 찾으십니까?”
“사람입니다.”
“혹시 다른 조수를 찾는 겁니까?”
그 말에 록펠러가 웃으며 대꾸했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조수야 이미 고용했는데 더 고용할 필요가 없죠.”
“그럼 누구를 고용한다는 겁니까?”
“곧 1황자 전하가 오실 테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겠죠.”
그제야 리카르도는 록펠러가 무슨 연유에서 광고를 내려는지 알 수 있었다.
“호위 기사라도 찾을 생각이십니까?”
“네, 1황자에게 꿇리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겠죠.”
대체 어떤 호위 기사를 고용해야 1황자 앞에서도 모가지를 빳빳하게 세울 수 있을까?
‘몇몇이 있긴 한데…….’
그 몇몇도 록펠러 입장에선 고용이 쉽지 않은 자들이었다.
아니,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그들은 돈으로도 다룰 수 없는 자들이었으니까.
‘딱히 없어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호위 기사를 생각할 수 없었던 리카르도 의문을 자아냈다.
“어설픈 호위 기사로는 아마 힘드실 겁니다. 대체 누구를 생각하신 겁니까?”
“네, 그건 압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한 자를 그때만 섭외해서 제 호위로 둘 생각입니다.”
“그런 자가 있긴 합니까?”
“딱 하나 있죠.”
딱 하나 있다는 말에 리카르도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한 사람을 특정 지을 수 있었다.
“설마…… 이한은 아니겠죠?”
리카르도가 떠올렸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록펠러 입장에선 감히 부르거나 부를 수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이한이라는 소문의 사내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 이한조차 쉽게 부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네, 맞습니다. 이한이란 자를 잠시 호위 기사로 데리고 있을 생각입니다. 그럼 1황자 전하도 절 어쩌지 못하겠죠.”
리카르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한이란 자를 데려올 수나 있긴 합니까? 그를 돈으로 매수하는 건 아마 힘들 텐데요?”
그러한 물음에 록펠러는 나름 확신을 가지고 답해주었다.
“그래서 그가 필요한 것을 미끼로 내걸 생각입니다.”
“미끼라 하시면?”
“소문을 듣자 하니 그가 마석을 위해 여러 던전을 쑤시고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베헤모스의 마검.
그것은 마석을 먹으며 자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마석을 준다 하면 이한도 절 위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마석 때문에 이한이란 자가 분주하게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긴 했다.
“마석이라…….”
“분명 움직일 겁니다.”
록펠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리카르도는 당연히 의문을 드러냈다.
“그리 확신할 수 있는 겁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촉이 상당히 좋다고요. 아마 이한은 제가 가진 마석을 위해 분명 찾아올 겁니다.”
“하긴…… 마석이 필요하다면.”
말을 마친 록펠러가 생각했다.
‘어차피 이 시기엔 마검을 키우기 위해 환장하던 때라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아무튼 광고 좀 크게 부탁드립니다. 이한이란 자가 지금 어딨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리카르도가 물었다.
“이한을 찾는 일이야 최대한 여러 곳에 광고를 내면 되겠죠. 그보다 마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물음에 록펠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이봐, 당신은 일단 조수라고. 내가 맘 편히 부려먹을 수 있는.’
“그것도 부탁드립니다. 길드장인 저도 나름 할 일이 있는데, 이런 제가 직접 마석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좀 웃긴 일 아니겠습니까?”
암살명가의 가주가 마석을 수급하려 한다면 최단 시간 내에 많은 마석을 끌어모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구매할 돈도 빵빵하니 무슨 문제겠는가?
“일단 알겠습니다. 최대한 마석이란 마석은 모아보겠습니다.”
록펠러가 원하는 방향은 리카르도가 원하는 방향과 같았기에 그가 딱히 문제를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맘 편히 생각하는 록펠러가 곧 바빠질 그에게 심심한 격려를 전해주었다.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 * *
피로 얼룩진 대지.
사방팔방 시체가 널브러진 대지 위에서 별다른 감흥도 없이 자리에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피 칠갑이 된 전신 갑옷을 착용하고 붉은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는 그는 제국 1황자라 불리는 라이얀 테페즈였다.
“…….
적발적안.
테페즈 가문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던 그에게 한 명의 여기사가 다가왔다.
그녀 역시 적발적안의 소유자였으며, 1황자만큼이나 피로 얼룩진 자였다.
특징이라면 그녀가 보고를 위해 자리에 선 직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검들의 존재였다.
요란스레 떨어져 내리는 검의 비를 무시한 채 그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1황자를 향해 말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재미도, 감흥도 없던 싸움이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는 게 가장 맞을 것이다.
혁명군의 수장은 이미 오래전에 그 목이 날아가 버렸고, 무조건 항복하려는 혁명군의 의사 따윈 무시한 채 오로지 살육만으로 이번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그것이 바로 테페즈의 방식이었다.
혁명군의 시체를 밟고 선 1황자가 고개를 돌려 찾아온 여기사를 쳐다보았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누이였다.
드디어 표정에 변화가 생긴 1황자가 입을 열었다.
“재미가 하나도 없더군.”
“이런 일에 재미가 있을 거 같아?”
“뭔가 짓밟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궁지에 몰리면 더 처절하게 저항할 거라고 생각한 게 내 잘못이었어. 이렇게 재미가 없을 줄이야. 너무 일방적이었잖아. 안 그래?”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그녀는 1황자의 방식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항복했으니 그냥 살려줬어도 됐잖아? 잘못이야 했지만 반성이라는 기회를 한 번쯤 줬어도 됐다고.”
그 말에 1황자는 고개부터 저었다.
“그건 테페즈의 방식이 아니지. 그리고 그런 자비를 베풀었다간 사람들이 우릴 우습게 알 거다. 조금만 잘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아니야. 그렇게 돼서는 안 돼. 우린 두려움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거야.”
라이얀이 손을 뻗어 찾아온 누이의 얼굴을 들게 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말을 멈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오라버니란 작자가 심심하면 하는 행동이었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그녀가 그의 손을 거칠게 치워내자 1황자가 피식 웃었다.
“나도 딱히 널 좋아하진 않아. 그저 내 피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너뿐이니까 그런 거야.”
그녀의 표정은 계속 굳어 있었고, 그런 누이를 향해 1황자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괜찮은 여자라도 소개시켜 주든가. 웬만하면 너보다 강한 여자로. 그럼 관심은 꺼줄 테니까.”
“나한테 관심 주는 것보다 곧 있을 왕관 전쟁이나 준비하지 그래?”
왕관 전쟁.
미치광이 전쟁광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이벤트였다.
“그래, 왕관 전쟁은 이번 토벌전과는 전혀 다르겠지. 그 잘난 칼만이 나올 테니까.”
배다른 황자인 칼만의 목을 칠 생각에 라이얀은 흥분된 자신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칼만 그 녀석은 절대로 날 이기지 못할 테니까.”
“칼만 오라버니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텐데? 칼만 오라버니는 크리스찬 오라버니와 다르게 싱클레어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싱클레어 가문.
쉽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 생각해 둔 게 있었는지 오히려 그는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래도. 다 수를 써놨으니까.”
“수를 써놨다고?”
그녀는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걸 막지 못했다.
“대체 무슨 수를 써놨다는 거야?”
“내가 돈줄을 막아놨거든. 돈줄이 막히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지. 어차피 전쟁이란 건.”
그는 확신하듯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돈이 전부니까.”
그때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오는 병사가 있었다.
그는 소식을 전하는 병사였다.
그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은 1황자가 그것을 바로 펼쳐보았다.
황실에서 온 서신이었다.
“무슨 내용이야? 혹시 안 좋은 일이야?”
누이인 트리니티가 궁금해서 묻자 눈가를 살며시 좁힌 1황자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곧 새로운 길드장에게 서임을 내린다고 하는군. 그 사람이 본래 평민이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서임이 좀 늦춰졌던 모양이야.”
리옹 길드의 새 길드장.
이전 길드장에게 작업을 쳐놨던 1황자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읽어봐. 그런 내용이니까.”
받았던 서신을 트리니티에게 건네준 1황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시체 가득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새 길드장이 바뀌었다고?’
뭔가 내키는 진행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신경 쓸 건 없겠지.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어. 새 길드장이 평민 출신이라면 이전 길드장보다 구워삶기 더 좋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