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22. 고블린 달러(4)
록펠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즘.
어느새 게토 누오보 지역을 빠져나온 리카르도는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몇몇 사람을 더 만나보기로 했다.
전부 리옹 길드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리옹에서도 손꼽히는 어느 대저택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곳의 주인을 찾아간 리카르도는 초조한 기색으로 서재에 앉아 있던 벤자민에게 불쑥 말을 던져보았다.
“말하신 자를 만나보고 왔습니다.”
인기척 하나 없이 목소리만 튀어나왔기에 벤자민이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깜짝이야! 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야? 식겁했잖아!”
놀란 가슴을 여러 번 쓸어내린 벤자민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뭐, 뭐야? 지금 어딨는 거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리카르도는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 말씀하신 것과 좀 다르더군요.”
“다르다고? 아니,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리카르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서 찾아왔을 때 그 모습을 떠올리는 벤자민이 말을 이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
뭔가 싸늘한 느낌이 자신의 등골을 스쳤지만, 애써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벤자민이 내색하지 않는 모습으로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자네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 같은데. 그자는 자네들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야.”
본래 벤자민의 계획은 이러했다.
예금 이자와 관련된 일로 이스마일 가문이 움직인다면, 그들과 남모르게 접촉하여 록펠러란 청년을 제거하자고.
어차피 이스마일 쪽에서도 록펠러란 인물은 눈엣가시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쓸데없이 예금 이자를 주는 일로 지금 누가 피해를 입고 있나? 이제까지 자네들을 후원해 주던 블랙라벨 유니온이 아니었나?”
“그건 맞습니다. 그 일로 블랙라벨 유니온 측에선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 말에 벤자민의 입가가 길게 휘어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야. 그런데도 자네는 그자를 가만히 놔뒀나? 어떻게 했어? 처리는 했나? 소문의 자네들이라면 상대를 귀신 같이 없애버릴 텐데.”
잔뜩 기대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리카르도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해 주었다.
“아니요. 그냥 두었습니다.”
“뭐? 그냥 놔뒀다고?”
벤자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냥 놔둔 거야? 난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자를 굳이 살려둘 이유가 있었나?”
“질문이 참 많으시군요.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 벤자민이 저도 모르게 목울대로 침을 삼켰다.
“뭘 묻겠다는 겐가?”
“제게 말하시길. 그자는 저희에게 있어 하등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필요 없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 자네들 입장을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길드 회의도 참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길드 회의?”
“이번에 있었던 길드 회의 말입니다.”
“당연히 참석이야…… 했지.”
“그럼 거기서 그자가 한 말도 들었겠군요.”
벤자민은 저 혼자밖에 없는 방 안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내가 무슨 말을 들었다는 거야? 그보다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겐가? 우선 내 앞으로 나와 보게. 안 보이는 데서 말하니까 내가 자꾸 불안해지잖나?”
서재에 앉아 있는 그의 뒤엔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서 있는 리카르도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회의 때 그자가 한 말을 들으셨다면 왕관 전쟁 때 2황자 전하를 밀어준다는 그의 말도 아셨을 텐데요?”
“그거야…….”
화들짝 놀란 벤자민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적막뿐.
“…….”
잠시간 말이 없던 벤자민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타고내리는 식은땀의 존재를 알게 됐다.
뭔가…… 느낌이 대단히 불안했다.
‘이거 위험해.’
상대는 이스마일쪽 사람이었다.
만약 당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될 것이다.
그 느낌이 든 순간.
벤자민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밖을 향해 소리치려 했다.
“이봐! 거…….”
그 순간 벤자민의 뒤를 잡고 그의 입을 틀어막은 리카르도가 그의 목에 천천히 비수를 가져다 대었다.
자신의 목에 차가운 금속 느낌이 닿자 흠칫 놀란 벤자민이 선 자세로 굳어버렸고, 리카르도는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쉿~ 밖에 사람도 있는데 시끄럽게 구시면 안 됩니다.”
벤자민이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자 그를 자리에 앉힌 리카르도가 일방적으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저희에게 일방적인 의뢰를 하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땐 이해라도 했을 테니까요.”
목울대로 마른침을 삼켜 넘기는 벤자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기 앞으로 마치 저승사자가 찾아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본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저희를 기만하려 한 죄. 그 죗값은 절대 가볍지 않죠.”
입이 틀어 막혔음에도 살기 위해 비명을 지르려는 벤자민이 나름 발악을 하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가 않았다.
그러다 온몸에서 힘이 일순간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그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자 리카르도는 틀어막았던 그의 입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리고 살려둬 봤자 계속 말썽만 일으킬 것 같군요. 당신은 저나 그쪽이나 전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저희 일에서 조용히 퇴장해 주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벤자민의 눈꺼풀이 완전히 닫혔다.
* * *
밀물처럼 밀려드는 외지인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는 리옹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리옹 길드의 이전 길드장인 벤자민의 자살이었다.
얼마 전 길드장 자리에서 쫓겨난 벤자민이 그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서재에서 목을 매 자살을 했단다.
자필로 쓴 유서까지 있어 그 누구도 벤자민이 자살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고, 유서까지 있으니 그 누가 의심을 하겠는가?
하지만 록펠러만큼은 달랐다.
가게 안에서 해당 소식을 접한 록펠러는 기분이 묘한 상태였다.
그게 자살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자가 처리한 건가?’
이 순간 록펠러는 자신을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조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굽이치는 은발을 가진, 제법 귀티가 나는 청년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가주가 직접 움직였으니.’
역시나 암살명가답게 이스마일은 무서운 곳이었다.
필요 여하에 따라선 사람을 쉽게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게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그자보단 내가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자살했을 쪽은 바로 나였을 테니까.’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2황자를 밀어준다는 말이 이스마일 쪽에서는 아주 달콤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블랙라벨 유니온에 피해를 입힌 자신을 그들이 놔줄 이유가 있을까?
‘당연히 없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뒤 다시 일에 매진하고 있을 때.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또 오셨군요.”
누군가 했더니 저번에 조수가 되기 위해 찾아왔었던 그자였다.
자신을 토마스 마르텔이라고 소개한 이스마일의 가주.
리카르도였다.
“네, 아직도 구인광고가 밖에 붙어있길래. 혹시나 해서 다시 찾아와봤습니다. 같이 일할 사람은 구하셨나요?”
리카르도 외에 다른 이들이 록펠러 밑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으나 록펠러 마음에 드는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리카르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두 번씩이나 찾아온 걸 보니 나름 목적이 있어 보였다.
‘설마 왕관 전쟁에서 내가 2황자 전하를 진짜 후원할지 안 할지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건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왜 가주가 직접 나서서 날 감시하려는 거지?’
그게 의문이었다.
보통이라면 자기 아랫사람을 시키게 마련인데.
이자는 가주임에도 직접 나서고 있었다.
그 정도로 왕관 전쟁이 중요했던 걸까?
‘왕관 전쟁이 그렇게나 중요했나?’
“아니요. 아직 구하지 못 했습니다. 제가 좀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워서요.”
록펠러는 잠시 고민했다.
대충 핑계를 만들어 그를 돌려보낼지 아니면 이대로 받아들일지를 말이다.
‘내가 원한다고 돌려보낼 수 있는 게 아닐 거야. 어떻게든 내 주변을 맴돌 테니까.’
이왕지사.
록펠러는 그를 자신의 옆에 두는 건 어떨지 잠시 생각해 봤다.
‘좋게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저자를 내 옆에 두는 게 안전할지도 몰라. 곧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날 위협할 사람들이야 아주 많을 테니까.’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이 몰래 자객을 보낸다?
호랑이가 사는 굴에 하룻강아지나 보내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록펠러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울 수 있었다.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더 기다린다고 해서 딱히 더 좋은 지원자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러자 리카르도 역시 기쁜 표정으로 화답해 주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일이야 천천히 배우시면 됩니다. 우선 오늘 만나볼 사람이 있으니 절 따라오십쇼.”
마침 할 일이 있었는지.
록펠러는 방금 채용한 조수와 함께 가게 밖으로 나섰다.
채용과 동시에 얼떨결에 가게 밖으로 끌려나온 조수가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번 일은 록펠러 혼자 움직여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상 최강의 보디가드를 굳이 안 데리고 다닐 이유가 있겠는가?
“오늘 만나볼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프랑크 백작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프랑크 백작.
마석탱크의 개발자였다.
“이름이야 얼핏 들어봤습니다.”
“마석탱크 개발자입니다. 듣자 하니 최근 들어 공장 사정이 많이 안 좋다고 하더군요.”
“그쪽 사정이 안 좋은 것과 찾아가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를 조수라고 볼 수 있을까?
어찌 됐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일을 알려줘도 괜찮다고 생각한 록펠러가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쪽 사정이 안 좋은 건 돈이 없어서입니다. 공장을 돌리려면 연구비나 인건비 등을 감당해야 하죠.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공장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걸 해결해 주기 위해 찾아가는 겁니다.”
“그냥 무상으로 도와주진 않으실 텐데요?”
“물론이죠.”
타종족의 괴수 병기에 맞서는 제국의 유일무이한 화력병기.
마석탱크만큼이나 전쟁에 있어 중요한 병기가 없었다.
‘마석탱크야 여러모로 중요하지. 머잖아 찾아올 금맥전쟁을 위해서라도.’
“도와주는 대신 그쪽 지분을 요구할 겁니다. 그럼 프랑크 백작과 마찬가지로 마석탱크의 주인이 되겠죠.”
마석탱크의 결과에 대해 알고 있는 록펠러와 다르게 여기저기서 마석탱크와 관련된 안 좋은 소식들을 접했던 리카르도는 약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괜한 곳에 돈을 쓰시는 건 아닙니까? 마석탱크에 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는데, 거의 고철덩어리 수준이라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개발이 잘 된다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소문이 너무 안 좋아서.”
“그거야 나중에 알게 되겠죠. 어차피 저희야.”
록펠러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돈은 많으니 그런 곳에 쓴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게 없습니다. 설령 실패해도 그만이죠.”
돈이 많다고?
물론 리옹 길드의 수장이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가실 텐데요? 그쪽에 들어가는 마석 값만 해도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록펠러는 자신 있는 투로 답해주었다.
“전부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 저희에겐 이게 있으니까요.”
록펠러가 품에서 고블린 달러를 꺼내 보이자 리카르도가 살며시 눈가를 좁혔다.
최근 들어 리옹에선 저 이상한 종이 화폐가 마치 돈처럼 쓰이고 있었다.
저 편리한 종이 돈 때문에 금화와 은화가 서서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전에도 방코에서 발행된 차용증서가 몇몇 사람들에겐 돈처럼 거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쓰이진 않았지. 그런데 저자가 길드장이 되고 나서 완전 달라졌어. 전부 다 고블린 달러를 쓰고 있으니까.’
금화를 대신하는 고블린 달러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제국 사회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차피 가져온 고블린 달러만큼이나 금화로 교환이 가능하니 그 어느 곳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모양.
정확히는 그 이유를 모르기에 가만히 놔두는 것이었다.
‘없는 금화를 가지고 차용증서를 찍어낸 이야기야 듣긴 했었는데…… 설마 그런 것의 연장선인가?’
자신과 관련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은 들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 이 록펠러란 자는 제국 전체를 상대로 기만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기보다 무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일지도.’
“그게 어쨌다는 거죠?”
리카르도가 꺼낸 고블린 달러에 대해 묻자 록펠러는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프랑크 백작이 얼마를 원하든.”
만약 금화를 빌려주려 했다면 그 한계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가진 금화야 한정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담보로 발행된 고블린 달러는 그 제한이란 게 없었다.
상대가 원하는 만큼, 그저 찍어서 주면 그만.
그게 고블린 달러가 가진 무서움이었다.
‘진정한 Show me the money지.’
“전부 이걸로 대신하면 되는 겁니다. 이건 저희가 가진 마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