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21. 길드 회의#2(9)
안쪽을 살피니 가게 구조가 이전과 비슷한 게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 듯싶었다.
다만 가게 분위기와 간판만 바뀌어 있을 뿐.
가게 간판을 확인한 한 명이 대뜸 목청을 높였다.
“내가 말했잖아! 로스메디치라는 평민 집안에서 길드장이 나왔다고.”
그러자 가게 간판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다른 이가 곧바로 반발했다.
“무슨 소리야! 그냥 못 들어본 귀족 가문이거나 아니면 몰락한 귀족 가문이겠지.”
“그래도 평민 집안이라고 우기는 거야? 그래서 로스메디치라는 가문은 들어나 봤어? 들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빡빡 우기기나 하고.”
“일단 조용히 해봐. 안에 가서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끝까지 티격태격하던 둘은 마침내 가게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가게 주인을 만나고야 말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직 가게는 오픈 전인데.”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록펠러가 그들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가게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오신 겁니까?”
가게를 정리하느라 분주한 록펠러가 소매를 걷어붙인 차림에서 묻자, 찾아온 둘 중 하나가 나서서 그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기…… 요 근래에 길드장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 로스메디치라는 곳이 소문대로 평민 집안입니까?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은 귀족 가문입니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짐 정리로 분주한 록펠러란 청년이 새 길드장일 줄은 말이다.
그들은 마주한 록펠러를 새 길드장이 아닌 그가 고용한 조수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자 록펠러가 웃으며 그들이 궁금하던 것을 답해주었다.
“오늘만 세 번째로 받아보는 질문이군요. 말씀하신 로스메디치 집안은 이제까지 평민 집안이었습니다.”
그러자 찾아온 둘 중 하나가 반색했다.
“거봐! 내 말 맞지? 내 말이 맞잖아! 소문대로 로스메디치라는 평민 집안에서 여기 길드장을 맡았다니까.”
“하…… 그게 말이 돼? 여긴 대대로 리옹 가문에서 맡아왔단 말이야.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평민 출신 따위가…… 하…….”
길게 한숨 쉬는 그가 진한 패배감을 맛보고 있을 때.
나름 승리감에 도취한 이가 록펠러에게 다른 걸 물어보았다.
“그런데 새 길드장은 어딨는 겁니까?”
그가 록펠러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두며 묻자 록펠러가 웃으며 대꾸했다.
“접니다.”
“에이? 방금 뭐라고…….”
“제가 바로 새 길드장인 록펠러 로스메디치입니다.”
그러자 찾아온 둘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새파란 청년이 리옹 길드 전체를 책임지는 수장이라니!
“어떻게…….”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어떻게 이렇게 젊은 사람이 길드 수장이 될 수 있어?”
“그러게. 나도 마찬가지야.”
혹시나 해서 둘 중 하나가 다시 물어보았다.
“거짓말은 아니겠죠?”
반신반의하며 묻자 록펠러는 그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많이들 안 믿으시더군요. 저도 이해는 합니다. 제가 좀 어린 편이라 그렇죠.”
“어떻게 그 나이에……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너무 어렸던 탓인지 록펠러도 제 나이에 대해 밝히는 걸 꺼려하고 있었다.
스무 살도 안 되는 나이에 한 집단의 수장이 됐다는 건 꽤나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아직 젊습니다. 그 정도만 아시면 됩니다.”
“혹시 거짓말은 아니겠죠?”
“거짓말은 무슨요. 전부 다 사실입니다. 제가 새 길드장이고, 어제부로 이 가게를 인수받았습니다.”
“그럼 기존에 있던 길드장은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요. 집안에 계신 걸로만 알고 있습니다. 나름 배신감이 크셨겠죠.”
“집이요?”
다른 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길드장 자리에서 잘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 같아도 그러겠어. 쪽팔려서 어디 나다닐 수나 있겠어?”
이전 길드장인 벤자민 드 리옹은 길드 회의에서 자신이 퇴출되는 것에 찬성표를 던진 길드원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는지 회의가 끝난 직후 기약 없는 칩거 상태에 들어갔다.
록펠러가 길드 본부를 물려받기 위해 벤자민을 찾아갔으나, 찾아온 록펠러가 꼴 보기 싫었던 벤자민은 하인을 통해 가게 열쇠만 주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제 볼일을 마친 두 행인이 가게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를 가만히 놔둘 록펠러가 아니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그저 소문이 궁금해서 찾아오신 겁니까?”
그 물음에 가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두 행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 무슨 하실 말이라도?”
“이왕 오셨으니 저와 상담 좀 하시죠. 아직 가게 꼴이 말이 아니라서 손님을 받기에는 조금 그런 상태지만. 그래도 방코 업무는 가능합니다.”
둘 중 하나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록펠러에게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가게 간판이 방코가 아니라 뱅크라 되어 있던데. 이건 잘못 표기한 거 아닙니까?”
“하하, 그건 아닙니다. 앞으로 저희 리옹 길드에 속한 모든 방코는 전부 하나의 뱅크로 통합될 겁니다. 그럼 기존의 방코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겠죠.”
“정확히…… 어떻게 달라진다는 겁니까?”
“기존의 방코들이 서로 간의 연결고리가 없이 각자도생을 통해 살아왔다면, 현 시점부터 리옹 길드에 속한 모든 방코들은 하나가 되어 뱅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겁니다.”
새 길드장이 한 말이었기에 둘은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이기 시작했다.
“그거 신박하군.”
“나도 그 생각이야. 방코들이 하나로 통합된다고? 허허…… 거참. 그럼 다른 방코에서 빌린 금화를 여기다 갚아도 되는 겁니까?”
무심코 던진 말이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실로 놀라웠다.
“네,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말을 마친 록펠러가 다시금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최근에 이 소문은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말이요?”
“앞으로 저희에게 금화를 맡기면 이자를 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자 찾아온 둘은 록펠러가 한 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들었던 소문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 채 긴가민가했던 것이다.
“그거 정말입니까? 진짜 여기다 금화를 맡기면 매달 이자를 주는 겁니까?”
“나도 궁금했어. 그게 진짜인지.”
록펠러가 진한 미소를 보였다.
“물론이죠. 소문은 사실입니다. 리옹 길드에 속한 어느 방코라도 금화를 맡기신다면 매달 1퍼센트의 이자를 챙겨드리고 있습니다.”
“그게 진짜였어. 진짜였다고.”
“아니, 방코에선 무슨 돈이 있어 금화를 맡긴 사람에게 이자를 준다는 말입니까?”
그들로서는 당장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본래 방코에서는 금화보관료를 받아왔으니 더욱 그러했다.
‘이유야 당연히 있지. 그래야 우리한테 이득이니까.’
“저희도 가진 돈을 가지고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빌린 돈에 대한 보상을 당연히 여러분들께 돌려드리는 겁니다. 생각하면 간단한 거죠.”
아무것도 모르는 두 행인은 그저 이자를 준다는 소리에 싱글벙글이었다.
“이거 참 좋은 거 같은데? 그럼 집에다 금화를 놔둘 이유가 없잖아? 안전하지도 않은 데다가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니니까.”
“자네 말이 맞아. 집구석에 놔둬 봤자 누가 훔쳐가는 것밖에 더 하겠어? 차라리 여기다 맡기는 게 나을 거야.”
그런 둘에게 록펠러가 다시 한번 찔러보았다.
“이왕 말이 나오신 김에 여기다 금화를 맡겨놓고 가시죠. 다른 곳보다 저희 가게를 이용하신다면 매달 1퍼센트 이자가 아니라 거기서 좀 더 챙겨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이봐. 이자를 더 챙겨준다는데?”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겁니까?”
“아니, 이 사람아. 저 사람이 여기 길드장이라잖아. 그럼 당연히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 안 그래?”
그가 록펠러를 보며 물었다.
“저희가 의심할 필요는 없는 거겠죠?”
그런 물음에 록펠러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다른 방코와 마찬가지로 신용과 신뢰를 생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 없으니 가지고 계신 금화가 있다면 제게 맡기셔도 됩니다. 이자를 드리는 부분이니 분명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록펠러의 말에 혹한 둘은 곧장 자신의 집으로 달려가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쓸어다 다시 록펠러 가게로 찾아오고 말았다.
그러곤 그 돈을 맡기고 록펠러에게 뜻밖의 것을 건네받았다.
“이건…… 뭡니까? 처음 보는 건데.”
록펠러가 건넨 것은 바로 고블린 달러였다.
기존의 금화보관증(차용증서)이 맡긴 금액만 표시해 놨다면, 지금 록펠러가 건넨 것은 마치 화폐처럼 세분화된 단위가 있어 돈처럼 쓰기 쉽게 만들어져 있었다.
1 고블린 달러, 5 고블린 달러, 10 고블린 달러처럼 말이다.
“고블린 달러입니다. 앞으로 리옹 길드에 속한 방코에 금화를 맡기시면 기존의 금화보관증 대신 고블린 달러라는 새로운 화폐를 받으실 겁니다.”
“새로운 화폐라고? 그럼 이게 화폐라는 겁니까?”
“이봐. 단위가 자잘하게 쪼개져 있는 걸 보니 이걸 돈처럼 써도 되는 모양이야.”
“그럼 이걸 여기다 가져오면.”
그가 묻기도 전에 록펠러가 바로 대답해 주었다.
“정확히 맞춰서 금화로 다시 돌려드릴 겁니다. 즉, 저희 입장에선 여러분들이 쓰기 쉽게 기존의 차용증서를 화폐의 형태로 바꿔드린 겁니다.”
“오, 이거 참 신박한데?”
“그럼 이걸 가져오면 여기서 금화로 바꿔준다는 말입니까?”
“네, 기존의 차용증서와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기존과 다른 점은 좀 더 돈처럼 쓰기 쉽게 여러 단위로 쪼개놓았다는 겁니다. 만약 저희에게 10 달란트를 맡기셨다면, 저희는 10 고블린 달러를 여러분께 돌려드릴 겁니다.”
록펠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여러분이 갑자기 금화가 필요해져서 저희에게 10 고블린 달러를 돌려주신다면, 저희는 그 즉시 10 달란트를 여러분께 돌려드릴 겁니다. 여기엔 그 어떤 수수료도 없고, 그저 편리함만 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록펠러가 짓는 미소 뒤에 나름의 악마가 자리한다는 것을.
그러자 한 명이 의문을 표했다.
“아니, 그러면. 이 고블린 달러라는 게 금화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편한 걸 두고 어떤 멍청이가 무거운 데다가 휴대하기도 불편한 금화를 쓴단 말이요?”
그 물음에 록펠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라도 금화 대신 고블린 달러를 돈처럼 쓸 겁니다.”
신기했는지 고블린 달러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둘은 머잖아 가게를 떠나갔다.
‘계획이 완성된다면 우리도 무(無)에서 돈을 찍어낼 수 있겠지. 어차피 사람들은 자세한 내막 따윈 잘 모르니까. 그저 우리의 안정성과 신뢰만 논할 테니까.’
그런 둘을 보고 잠시간 자리에 서 있던 록펠러는 하던 일을 마치기 위해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록펠러 가게를 찾아온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곱슬거리는 긴 은발에 호수 같이 깊은 눈.
그는 록펠러만큼이나 젊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그는 새롭게 바뀐 가게 간판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기존의 리옹 방코가 아닌 뱅크 오브 로스메디치라는 새로운 가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를 보고 눈을 게슴츠레 뜨던 정체불명의 청년은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록펠러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직 가게가 준비되지 않아 좀 어수선합니다.”
가게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었다.
찾아온 이는 마치 호스트바에나 어울릴 만한 사람이라고 할까?
록펠러가 대꾸도 없이 자신만 빤히 쳐다보는 그에게 시선을 주자, 상대도 심오하면서도 깊은 눈으로 자꾸만 록펠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혹시나 싶어 록펠러가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다른 곳에서 오셨습니까? 싱클레어 가문에서 오시진 않았겠죠?”
새 길드장이 됐으니 찾아오는 사람이 죄다 가게 손님일 순 없었다.
제국의 두 방코 연합 중 하나의 수장 자리를 맡고 있으니, 나름 귀한 손님이 찾아올 수도 있는 법.
확실한 건 상대가 옷을 어떻게 입고 있든, 사람 몸에서 풍기는 기품과 느낌은 귀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느낌상 싱클레어 가문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곱슬거리는 긴 은발과 호수 같은 눈.
그리고 엄청난 미남.
록펠러의 머리에 딱 떠오르는 인물 하나 있긴 했다.
다만 확신이 없었을 뿐.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오셨습니까?”
계속 물음이 이어지자 자신에 대해 별로 밝히기 싫었던 그는 손끝으로 잡고 있던 광고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광고지였다.
“아…….”
짧게 탄식하던 록펠러가 다시 물었다.
“혹시 구인광고를 보시고?”
상대가 고개만 끄덕이자 이내 록펠러가 반응을 보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붙임성 없는 사람을 조수를 두지 않습니다. 이 일을 하시려면 잘 웃으셔야 하고 또 말도 많으셔야 합니다.”
그러자 찾아온 이가 록펠러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멋스럽게 웃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전부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차갑던 인상은 오간 데 없고 잘 미소 짓는 미청년만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 분위기가 변하자 록펠러는 처음부터 가졌던 생각을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아름다운 은발과 호수 같이 깊은 눈.
그리고 천(千)의 얼굴을 가진 자.
‘리카르도 이스마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