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21. 길드 회의#2(8)
고블린 달러(Goblin Dollar)의 등장.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돈처럼 쓰이던 차용증서가 드디어 완전한 화폐의 모습을 갖추게 된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화폐라 함은 금화와 은화와 같은 본래 가치 있던 것을 동전의 형태로 가공한 것이 전부였었다.
그런데 탐욕스러운 방코 업자들의 기만으로 인해 기존에 쓰이던 금속 화폐가 무시당하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화폐는 실질적 가치를 지닌 금과 은이 있어야만 새 화폐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지금 록펠러가 제안한 종이 화폐는 오로지 신용과 종이만 있으면 이론상 무한대의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 있었다.
“고블린 달러?”
“기존에 우리가 쓰던 차용증서를 전부 하나로 통일하자는 얘기 같은데.”
“그걸 통일하면 남이 발행해 준 차용증서까지 우리가 다 책임져야 하잖아.”
“어차피 어디서 발행하든 다 책임져주는 형태였잖아.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야.”
수런대던 길드원 중에서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록펠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록펠러가 발언권을 주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려하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각 방코에서 발행되던 여러 차용증서를 전부 하나로 통합하자는 얘기입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묻고 싶군요. 그렇게 되면 남이 발행해 준 차용증서를 다른 방코에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도 실질적인 금화를 기반으로 발행된 차용증서이기에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옆에 있는 방코에 가서 손님에게 받은 차용증서를 주고 금화를 다시 받아오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아무튼 저희로서는 무척이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가 강한 의문과 함께 록펠러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까지 감수하면서 각 방코에서 발행된 여러 차용증서를 하나로 통일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록펠러는 미소까지 띠며 답해주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고블린 달러는 더 이상 차용증서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앞서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새로운 화폐입니다.”
록펠러가 그에게 반문했다.
“제가 묻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저희에게 차용증서를 돌려주며 금화를 가져갈까요?”
“그거야 그 금화가 필요하니까.”
“왜 필요합니까?”
“그건…… 그게 돈이니까.”
그 말에 록펠러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맞습니다. 금화가 곧 돈이고, 그게 필요해서 사람들은 저희에게 차용증서를 돌려주고 금화를 가져갔던 겁니다. 하지만 저희가 발행한 차용증서가 마치 돈처럼 쓰인다면 과연 사람들은 번거롭게 방코에 찾아와서 금화를 가져갈까요? 이미 쓰고 있는 게 돈인데?”
“그건…….”
“만약 고블린 달러가 금화처럼 쓰이게 된다면 애당초 걱정하셨던 부분도 어느 정도 해결될 겁니다. 사람들이 오질 않는데 굳이 바꿔줄 필요가 없죠.”
“허허…….”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차용증서가 돈처럼 쓰이는 것을 낯설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한 길드원이 발언권 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건 아니오. 여기서도 차용증서는 돈처럼 쓰이고 있소. 암암리에 말이요.”
굳이 지적하지 않는 록펠러가 그의 말을 받아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제 말을 이해하기 쉽겠군요. 방금 전 제가 제안한 것은 그것을 극대화시키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게 있겠소?”
“얻는 거야 당연히 있죠.”
그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모두가 의문을 표하는 가운데 록펠러가 진정한 기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금화는 금이 있어야 찍어낼 수 있고. 은화 역시 은이 있어야만 은화를 찍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발행할 새 종이 화폐는 그저 리옹 길드의 신용과 종이만 있으면 됩니다.”
완전한 신개념이었다.
종이로 돈을 찍어낼 수 있다니.
그 말을 이해한 몇몇 방코 업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록펠러와 같은 생각을 안 해봤던 게 아니었다.
다만 배짱이 없었을 뿐.
“앞으로 저흰. 그걸 대놓고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저흴 더욱 더 살찌우겠죠. 무(無)에서 부를 창조하는 저희를 과연 누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한 길드원이 반신반의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하나만 묻겠소. 사람들이 그걸 쓰겠소? 그들도 바보가 아닌데. 진짜 돈인 금화를 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찍어낸 종이 쪼가리를 대신 쓰겠냐 이 말이요.”
그 물음에도 록펠러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앞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종이 화폐에 필요한 것이 바로 신용과 종이라고. 종이야 뭐 지천에 널렸으니 생략하고 정작 중요한 건 바로 신용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 차용증서를 가져오면 금화로 돌려주겠다는 확고한 믿음, 그리고 신뢰. 그런 게 있어야만 저희 뜻대로 될 수 있는 겁니다.”
“그 신용은…….”
“그 신용이 어떻게 하면 생기겠습니까? 각 방코에서 저마다 차용증서를 발행한다고 생길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어떤 것을 저희가 무조건 받아준다는 신뢰가 생겼을 때. 비로소 고블린 달러의 신용이 완성되는 겁니다.”
한 길드원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왜 고블린 달러요? 고블린이란 이름을 붙인 건 대충 알겠는데, 달러라는 건 대체 뭡니까?”
여기 있는 이들이 달러에 대해 알기나 할까?
록펠러는 아니라고 봤다.
“달러는 그냥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세상 최초로 종이 화폐라는 게 나왔는데 그 이름 정도는 제가 지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새 길드장이 제 맘대로 지었다고 하자 대다수는 수긍하기 시작했다.
“종이 화폐면…… 그냥 막 찍어내도 되잖아.”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는 건가?”
“기발하다 못해 너무 무서운 생각 같은데?”
“무섭기는. 우리한텐 무조건 좋은 거지.”
록펠러는 이번 회의를 마치기에 앞서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고블린 달러는 예금 이자의 연장선에 있는 저희의 원대한 계획이기도 합니다. 예금 이자가 활성화된다면 십중팔구 제국의 모든 금화가 저희에게 모일 겁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금화보관증인 차용증서가 대량으로 유통될 것인데, 그것을 계기로 고블린 달러를 활성화시킬 생각입니다.”
록펠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디 새롭게 맞이할 신세계에서. 저희의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록펠러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베르키스 주교에게 향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록펠러는 정중히 예를 보였다.
“그리고 저희의 이익은 항상 교회와 나눌 것입니다.”
이를 본 베르키스 주교가 나름 수긍했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사실 이번 회의 내용 중 다소 거슬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익을 교회와 나눈다고 하니 알아서 납득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