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21. 길드 회의#2(8)
록펠러의 말에 회의장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회의장을 향해 록펠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 누가 금화 보관료를 받는 방코에다 금화를 맡기겠습니까? 셈여림도 못하는 바보가 아니라면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 시간 이후로 제국에 있는 모든 금화는 저희 리옹 길드에서 독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길드 강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곳이 그 강령을 따르지 않는 방코가 아니라 자신들과 전혀 별개인 다른 방코 연합이라니.
회의장에 앉아 있던 길드원들이 저마다 반응을 내놓기 시작했다.
“흠……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우리야 좋은 거지. 안 그래도 빌려줄 돈이 없어서 문제였는데 그런 식으로 금화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기존에 해왔던 대출 사업이 크게 확장되겠어.”
“어쩌면 블랙라벨 쪽 고객들과 인연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예금에 대한 이자는 아직도 내키지가 않아. 좀 아깝지 않나?”
“그것도 일단 해보자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적어도 손님들이 몰릴 것은 당연해 보이는군. 어찌 됐든 집구석에 금화를 짱박아두는 것보단 우리에게 맡기고 소정의 이자라도 받아가는 게 좋을 테니까.”
저들끼리 숙덕이던 길드원 중에서 한 길드원이 손을 번쩍 들며 록펠러의 시선을 끌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해 주십시오.”
“블랙라벨 유니온은 우리와 같은 방코 연합이지만, 그쪽은 암살명가의 후광을 받고 있소. 만약 일이 잘된다 할지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소? 개인의 신변 문제 같은 게 말이오.”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록펠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우려에 답변해 주었다.
“네, 맞습니다. 그쪽 연합은 저희와 다르게 암살명가의 후광을 받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스마일의 힘이 예전 같지 않음은 여기 계신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록펠러의 말이 이어지기 전 베르키스 주교가 먼저 나섰다.
“이스마일 세력은 이미 오래 전에 와해되어 버렸네. 감히 이단의 종교를 세워 신을 우롱한 죄.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지.”
주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록펠러의 말이 이어졌다.
“주교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암살명가 이스마일은 과거 두 가문과의 전쟁 후 현재 그 명맥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그들이 감히 싱클레어 가문의 후광을 받고 있는 저희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암살명가가 아니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놓고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인데. 솔직히 나도 걱정되지만, 가장 걱정되는 건 바로 당신인데. 그건 어찌하려고.”
그러자 록펠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확신에 찬 미소.
그것은 소설 속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기에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맞습니다. 그들이 있는 한 저 역시 암살 위협에 계속 노출될지도 모릅니다. 그들과 대립을 하는 건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던전 안을 무방비 상태로 거니는 것과 다름이 없겠죠. 그래서 그쪽과 나름 딜을 할 생각입니다.”
“딜? 무슨 딜을 말이요.”
“블랙라벨 유니온 그 자체가 이스마일은 아닙니다. 그저 이스마일의 후광을 받고 있는 여러 세력들 중 하나일 뿐이죠. 하지만 저희로 인해 블랙라벨 유니온이 타격을 받게 된다면 그들과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이스마일 쪽에선 어떻게든 움직이려 할 겁니다.”
록펠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과거 지독한 악명을 떨쳤던 가문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저를 본보기로 암살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죠.”
술렁이는 길드원들이 록펠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제가 먼저 그들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다면. 그들은 과연 저를 해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슨 당근을 주려고 그러는 게요? 내가 볼 땐 그들과 협상할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
“있습니다. 2황자 전하는 그 처가가 이스마일 가문입니다. 하지만 지지세력이 부족하여 왕관 전쟁은 꿈도 못 꾸고 있죠. 하지만 저희가 그런 2황자를 밀어준다고 하면 이스마일 가문에서도 블랙라벨 유니온을 괴롭히는 저희를 어쩌진 못할 겁니다. 기존의 돈줄을 챙기는 것보단 새로운 돈줄과 결탁하여 과거의 영광을 되찾길 원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식으로 그들과 딜을 할 생각입니다.”
록펠러의 말에 회의장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켜보던 베르키스 주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교도의 황자가 황좌에 앉는 건 내가 먼저 반대일세.”
훈계를 하듯 그의 말이 록펠러에게 쏘아졌다.
“자넨 어찌 그런 이교도 출신의 황자를 옹호할 수 있는가?”
그러자 록펠러가 반박했다.
“주교 각하. 주교 각하께서 알고 계시는 것과 달리 크리스찬 전하께서는 더 이상 이교도의 황자가 아니십니다.”
“크리스찬 전하가 이교도가 아니라고? 맹인교단이라고 하면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속을 그렇게 썩였는데. 자넨 크리스찬 전하를 보지도 않고서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나?”
“물론 주교 각하 말씀대로 이스마일 가문 전체가 이교도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주워듣기론 크리스찬 전하께서는 맹인교단이 아닌 독실한 십자교단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보다 베르키스 주교 각하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어떻게든 살려고 그러는 척한 게 아니겠나? 그게 아니었으면 이미 교단의 철퇴에 맞아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교도와의 관련성은 검증된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 피가 어디로 가겠나?”
“만약 크리스찬 전하께서 진실된 십자교단의 교인이라면 저희가 못 밀어줄 것도 없지 않습니까?”
베르키스 주교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걸 떠나서도 왜 하필이면 2황자인가? 건실한 1황자도 있고, 또 리옹 길드와 연관이 깊은 3황자 전하도 계시는데. 밀려면 차라리 그쪽을 밀어야지.”
“그쪽엔 이미 세력들이 붙어 있어 저희가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됐든 결국 저희가 미는 쪽이 황좌에 앉을 거란 사실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베르키스 주교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러면서 고개를 주억이는 게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도 록펠러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현재 2황자 전하께서는 지지세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십니다. 과거에 두 가문과의 전쟁으로 대수술을 당한 터라 이스마일의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상태니까요. 그런 2황자 전하께 저희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민다면. 훗날 그분께서 황좌에 오르실 때 저희 역시 얻을 게 많지 않겠습니까?”
“도박일세. 그건 아주 위험한 도박이야.”
“맞습니다. 주교 각하 말씀대로 이건 도박입니다.”
하지만 이건 도박 같은 게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있어 왕관전쟁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도박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저희 역시 얻는 게 많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그 일로 주교 각하께서도 아주 큰 수혜를 입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베르키스 주교가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그게 어떤 식으로 주교 각하께 이득이 될 수 있는지 아마 어림짐작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크흠…….”
그럼에도 베르키스 주교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려워. 아주 어려운 일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2황자라니. 쯧쯧쯧.”
그래도 록펠러가 한 말이 있어 베르키스 주교도 더 이상 따질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록펠러의 말처럼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래, 감내하는 위험이 클수록 얻는 보상 또한 더 크게 따라오는 법이지.’
“그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내가 이 자리서 계속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록펠러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배려 감사합니다.”
이어 고개를 든 록펠러가 자리에 앉은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듯 저는 기존의 1황자 전하와 3황자 전하도 아닌 전혀 엉뚱한 2황자 전하를 밀어줄 생각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이스마일의 위협 역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기존에 우릴 도와주던 싱클레어 가문은 어찌할 생각이오? 그쪽에서 3황자를 도와달라고 할 텐데.”
그 물음에 있어서 록펠러를 마치 칼과 같았다.
“최소한의 의리만 지킬 생각입니다.”
“그런다고 되겠소? 그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데. 저희는 이제부터 다른 길로 나아갈 겁니다. 오늘 이후로 저희가 누구의 눈치를 보는 건 있어서도, 있어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만한 힘이 없잖소.”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그렇게 운을 뗀 록펠러가 품에서 차용증서 하나를 꺼내 보였다.
“제가 여러분께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저희의 힘은 어디서 나온다고 보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왔다.
“돈이지.”
“금화야.”
“당연한 걸 묻고 그래.”
그러한 말에 록펠러는 고개를 저었다.
“전부 틀렸습니다. 저희의 힘은 앞으로 이것에서 나올 겁니다.”
록펠러가 들고 있는 차용증서에 모든 이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그건 그냥 차용증서가 아니오.”
“세상 모두를 빚지게 만들 생각인가?”
“뭔 생각이야.”
그런 그들에게 록펠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건 더 이상 차용증서 같은 게 아닙니다. 아 물론 차용증서는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주 다른 개념이 될 것입니다.”
“다른 개념?”
“무슨 개념?”
이어지는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종이 화폐입니다.”
종이 화폐란 말이 생소했는지 모두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기존에 저희가 알고 있던 화폐는 금화, 은화와 같은 금속 재질로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게 아닌 저희에게 받아간 이 금화보관증, 즉 언젠간 당신의 금화를 돌려주겠다는 이 차용증서를 돈처럼 쓰고 있다는 사실을요.”
록펠러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몇몇 분들은 이미 남모르게 없는 금화까지 빌려주고 이자 수익도 제법 짭짤하게 챙기셨을 겁니다.”
그러자 애꿎은 헛기침을 연발하는 몇몇 방코 업자들이 있었다.
나름 켕기는 게 있는 모양.
그런 그들을 흘겨보며 미소 짓는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저는 도덕적 해이에 빠진 그분들을 탓하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희도 이제 좀 더 발전된 형태로 나아갈 때가 됐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바로 이 종이 화폐로 말입니다.”
아직까진 확 다가오지 않은 개념인지라.
대부분 길드원들은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물론 록펠러의 말처럼 방코에서 발행된 차용증서가 몇몇 곳에서 마치 돈처럼 쓰이고 있긴 했다.
다만 그게 제국 전체적으로 쓰이지 않았을 뿐.
“앞으로 저흰 방코 연합의 다른 개념인 은행이란 게 될 것이고, 그리고 이제까지 제각각 발행해왔던 차용증서를 전부 하나로 통일시켜, 제국 달란트를 대체할 전혀 새로운 종이 화폐를 만들 생각입니다.”
웅성거리는 길드원들.
“저희가 새롭게 만들고 이 땅에 무한히 뿌릴 그 화폐의 이름은.”
한낱 사기업인 미연준이 국가기관처럼 보이며 모두를 기만하는 것처럼.
록펠러 역시 세상 모두를 기만하기 위해 고블린의 신용을 기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혀 새로운 종이 화폐를 고안해냈다.
“바로 고블린 달러입니다. 고블린의 신용은 저희 인간보다 우수하니까요.”
록펠러는 이 말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아마 다른 세력들은 이 종이 화폐가 고블린방크에서 나온 줄 알 겁니다. 애당초 그런 취지로 지은 이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