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21. 길드 회의#(3)
카타콤베.
교회가 나를 배척한다 해도 내 믿음은 변치 않으리.
과거 교회로부터 핍박받았던 고리대금업자들이 신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대다수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신앙심을 키우길 원했었고, 이를 위해 지어진 곳이 바로 리옹 길드의 시초가 되는 이곳 카타콤베 교회였다.
사실상 작은 교회라 볼 수 있는 이곳은 그 구조가 예배당과 흡사했는데, 지금이야 리옹 대성당을 찾아가는 길드원이지만 과거엔 교회에 대놓고 찾아갈 수가 없어 매주 이곳에 모여 신께 기도를 드리고 길드 발전을 위해 길드원끼리 회의 같은 걸 했었다.
그것이 카타콤베 길드 회의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길드 회의장은 처음이군. 여기가 말로만 듣던 카타콤베인가?’
회의장 형태는 일반적인 예배당과 흡사했다.
미사와 길드원 발언이 진행되는 강단이 맨 앞자리에 마련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신도와 길드원들이 앉을 수 있는 교회 의자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회의장 안쪽으로 들어선 록펠러는 카터를 따라 적당한 곳에 앉았고, 주변에서 자신을 두고 숙덕거리는 길드원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날 의식하는 모양이군.’
록펠러가 자리에 앉고 얼마 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길드원들도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문의 주인인 록펠러를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였으며,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저기 저 사람이야.”
“아 소문의 조수가 바로 저 사람이야?”
“그렇다니까. 자기 영주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여기 교회 재산을 전부 빼돌려 이자를 준다고 소문이 자자해.”
잠시 후.
리옹 대성당에서 지원 나온 베르키스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기 시작했다.
길드 회의 전 신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길드 회의의 오랜 전통이었다.
다만 오늘 예배가 여느 때와 다른 것은 일반 신부가 아닌 베르키스 주교가 찾아와 미사를 집전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곳 베르키스 주교가 길드장과 같은 가문 사람이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길드원들은 베르키스 주교가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것에 대해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미사가 끝나자 기다리던 길드 회의의 시간이 찾아왔다.
베르키스 주교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벤자민이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길드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큼! 그럼 지금부터 길드 회의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군데군데서 기침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회의장 안은 조용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벤자민이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바쁜 여러분들을 소집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긴히 상의해야 할 몇몇 중요한 안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벤자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선 저희가 첫 번째로 회의할 안건은 다가올 왕관 전쟁에 대한 것입니다.”
왕관 전쟁 이야기가 나오자 회의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용! 아직 얘기는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벤자민은 회의에 참석한 모두에게 지난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1황자의 사람이 찾아와 길드장인 자신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듯 1황자께선 저희보고 3황자를 절대 지원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이를 어길 시 나중에 각오하란 말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각오란 저희보고 장사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벤자민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터져 나오는 길드원들의 고성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3황자 편에 있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
“1황자는 겁도 없는 모양이지! 나중에 누구한테 돈을 빌리려고!”
“싱클레어 가문은 그냥 있을 거 같습니까!”
성난 길드원의 외침에도 벤자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여러 차례 고성이 오간 뒤.
벤자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 좋은 의견을 듣고자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입니다. 어디 좋은 의견 없습니까?”
좋은 의견을 달라고 하자 여러 길드원이 일제히 거수를 하며 자신에게 발언권을 달라고 하였다.
벤자민은 대충 훑어보고는 자신의 눈에 익은 한 명을 지목하며 말했다.
“자네가 한번 말해보게.”
크흠!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어느 이름 모를 길드원은 자리에 모인 길드원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린 곧 죽어도 싱클레어 가문의 비호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와서 1황자가 무슨 개소리를 한다 해도. 우린 무조건 싱클레어 가문이 밀어주고 있는 3황자를 버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건 의리를 저버리는 행동이죠.”
그의 의견은 이러했다.
1황자가 무슨 개소리를 하든, 무조건 싱클레어 가문과의 의리를 지키자고.
말인즉 3황자만 주구장창 밀자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러면, 1황자가 왕관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땐 뭘 어쩔 건데! 그때도 싱클레어 가문만 찾을 겁니까! 한번 말해보세요!”
여기선 벤자민이 중재에 나섰다.
“워워, 회의 시작부터는 제가 지명한 사람만이 이 회의장에서 발언하실 수 있습니다. 전부 회의 규칙을 준수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앞서 반발했던 길드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발언권을 달라는 의미였다.
벤자민은 그를 지목하며 원하던 발언권을 주었다.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쇼.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지.”
발언권을 얻게 된 길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목소리를 냈다.
“곧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는 1황자인 라이얀 전하이십니다. 저희에겐 미치광이 전쟁광으로 잘 알려진 라이얀 전하께서는 그 유명한 테페즈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성향이 매우 호전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록펠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라이얀이라……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그가 말하는 것처럼 제국 1황자는 아주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걸어온 싸움은 절대 피하지 않았으며, 또한 당한 게 있으면 응당 갚아주는 성격의 소유자.
전형적인 테페즈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황자였다.
“만약 라이얀 전하께서 왕관 전쟁에서 이기신다면 그분을 후원하지 못한 저희들은 한순간에 내팽개쳐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위험한 도박을 여러분들은 과연 하고 싶습니까?”
그 물음에 시원히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저는 애매한 도박 같은 건 잘 안 하는 편입니다. 물론 둘이 싸워서 기존에 저희가 밀고자 했던 3황자 전하께서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확률만 놓고 보자면 1황자 전하의 기세가 아주 대단합니다.”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발언을 마쳤다.
“그러니 저는 여러 핑계를 대서라도 3황자 전하를 지원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차라리 이러면 싱클레어 가문에서 불만은 나올지언정 1황자 전하가 왕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저희가 장사를 접는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말을 마친 길드원이 자리에 앉자 또 다른 길드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벤자민이 지목하자 이번엔 배가 불뚝 튀어나온 길드원이 모두를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앞서 두 분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저 역시 두 분의 생각에 공감하고 있으며 존중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는 위기입니다. 어느 한 편도 확실하게 밀어줄 수 없는 입장이죠.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해볼까 합니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자 그는 하려던 다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둘 다 몰래몰래 다 지원해 주는 겁니다. 그럼 눈치 볼 것도 없잖습니까?”
그러자 어느 길드원이 반발했다.
“그걸 안 들킬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최대한 아무도 모르게 다 지원해 주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어느 쪽이 이기든 저희야 할 말이 있으니까요.”
이번엔 다른 길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부터 저었다.
“그러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한쪽을 미는 것 자체도 어마무시한 돈이 들어갈 텐데, 그걸 양쪽 다 지원을 해준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돈은 무슨 하늘에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돈 벌려고 이 짓거리 하는 거지! 누가 돈 퍼주려고 이 짓거리 하는 줄 알아!”
그의 고성이 이어지자 이에 동조하는 목소리로 인해 회의장 전체가 어수선해졌다.
“조용! 조용히!”
그리고 이 소란을 수습하는 건 자연히 벤자민의 몫이 되었다.
“조용히 하세요!”
그가 여러 차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회의장은 가까스로 조용해질 수 있었다.
“제가 발언권도 안 줬는데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난리입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하다간 회의장에서 길드장 권한으로 강제로 퇴장시킬 생각이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크흠!
짧은 헛기침 뒤 벤자민이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다른 좋은 의견은 없는 겁니까? 여기 있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게 좋은 의견이 있으면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모두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드릴 테니 한번 말해보십쇼.”
좋은 의견.
그게 있을 리 없는 모두는 침묵 속에서 서로 눈치만 봤다.
그런 길드원들을 보고 있자니 벤자민도 나름 속 터지는 느낌이었다.
자신 또한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에 그러했다.
그때.
‘뭐야?’
길드원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젊은 청년이 조용히 거수하는 게 보였다.
벤자민은 손을 든 자를 보고선 저도 모르게 눈살부터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록펠러가 조용히 거수했지만 벤자민은 일단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발언할 다른 길드원이 없나 잠시 기다렸지만, 그런 길드원은 없었다.
‘자꾸 성가시게 하는군. 대체 뭐라 지껄이려고.’
내키진 않았지만 두 번째 안건에서 록펠러야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의 증언이 있어야 길드원들을 납득시키며 새로운 길드 강령을 강제할 수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군.’
“자넨 여기 길드원도 아닐 텐데. 그래도 의견은 들어보도록 하지.”
벤자민이 발언권을 주자 자리에서 일어난 록펠러가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말대로 아직 길드원이 아니라 주제넘은 발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러분들 위해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발언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록펠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를 알아본 대다수의 길드원들이 저들끼리 숙덕이기 시작했다.
소문의 방코 조수가 발언권을 얻었기에 그러했다.
그런 길드원들을 향해 록펠러가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무슨 대단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태도는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록펠러의 말에 회의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살며시 표정을 구긴 벤자민이 록펠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자네가 보기엔 왕관 전쟁에 휘말린 우리가 우습게 보이나?”
그러면서 벤자민은 은연중 록펠러를 비웃었다.
너 같은 애송이가 뭘 아느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록펠러는 고개를 저으며 여기 있는 모든 걸 부정했다.
“돈은 곧 힘이며, 사실상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것을 쥐고 있는 실세들입니다. 그런데 상대는 저희를 얕잡아보고 오히려 으름장만 놓고 갔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록펠러는 강조하듯 눈빛까지 불태우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것에 주눅이 들고 오히려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희가 가진 힘도 모른 채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만 보여줬다는 말입니다. 이건 말입니다. 대단히 문제 있는 겁니다. 저희가 언제부터 힘없는 약자였습니까? 그 힘을 키우고자 이렇게 길드를 만들고 서로 단합을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마지막 물음에 반박하는 길드원은 없었다.
그들도 내심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알기론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1황자와 3황자 간의 힘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여러분들의 의견도 전부 갈리는 거겠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면 이번 안건은 내놓을 필요조차 없었으니까요.”
수긍하는 모두를 향해 록펠러가 저 혼자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그 어설픈 저울질 속에서 저희가 어느 한쪽을 강하게 밀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겠습니까?”
침묵 속에서 록펠러는 답을 말해주었다.
“저희가 미는 쪽이 곧 황제가 되는 겁니다.”
그제야 회의장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만 조금 달리하면 록펠러 말이 어느 정도 맞았던 것이다.
“이렇듯 두 황자 중 누가 황제가 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저희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말이나 됩니까?”
록펠러는 그들이 잘못했다는 듯이 대놓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이건 여러분이 잘못하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