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21. 길드 회의#2(1)
길드장 주최로 열리는 길드 회의까지 앞으로 일주일 남은 시점.
리옹 방코의 주인이자 길드의 수장이기도 한 벤자민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흠…….”
“그게 라이얀 전하의 뜻입니다. 만약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자신 외에 다른 분을 지원하신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셔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느닷없이 벤자민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말끔한 군복을 갖춰 입은 제국군 장교였다.
그는 제국 1황자인 라이얀 테페즈를 따르고 있었고, 오늘 리옹 길드의 수장을 만난 것은 1황자의 경고를 직접 전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이보게 이 사람아. 갑자기 이런 식으로 찾아와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나? 리옹 길드가 싱클레어 가문의 비호를 받는 거야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거야 라이얀 전하께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라이얀 전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다가올 왕관 전쟁이고, 여기에 관여한 모두는 라이얀 전하의 경고를 새겨들으셔야 할 겁니다.”
제국군 장교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소문이야 익히 들으셨겠지만. 라이얀 전하께서는 자비라는 게 없으십니다.”
“자비가 없다니…….”
“라이얀 전하에 대한 소문은 아예 못 들으셨습니까?”
“테페즈 가문이 본래 잔학무도한 것은 알고 있었네. 애당초 그런 가문이었으니까.”
“그런 가문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3황자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는지.
자연스레 표정을 구긴 벤자민이 항변했다.
“그럼 싱클레어 가문에서 말들이 나올 텐데 그건 어떻게 하라고?”
그러자 찾아온 제국군 장교가 옅게 웃어 보였다.
“그거야 저희 알 바 아닙니다.”
“알 바가 아니라니…….”
“저는 그저 라이얀 전하의 경고만 전할 뿐. 판단은 오로지 벤자민 공의 몫입니다.”
쓴웃음을 짓는 벤자민이 생각했다.
‘미치겠군. 설마 설마 했는데 저따위 식으로 나올 줄이야.’
왕관 전쟁.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미덕으로 삼는 제국 황실의 오랜 전통으로.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황자들 중에서 차기 황좌에 오를 황태자를 선별하는 그들만의 전쟁이었다.
황좌에 오르길 희망하는 황자들은 제 의지로 왕관 전쟁에 참여가 가능했으며, 왕관 전쟁에 참여한 황자들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황태자 지위와 황제의 성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왕관 전쟁과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야 그저 조용히 장사만 하면 되는데.’
이대로 수긍할 순 없었는지 벤자민이 배짱을 한번 부려보았다.
“이보게.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빡할 거 같나? 우린 싱클레어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네. 우릴 건드린다고 하면 싱클레어 가문에서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러자 그의 배짱이 아주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찾아온 장교가 대놓고 비웃어주었다.
“하하, 다가올 왕관 전쟁의 승패에 따라 라이얀 전하께서는 리옹 길드를 아예 없애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뭐? 길드를 없, 없애 버린다고?”
“어차피 방코야 교단에서도 배척받는 곳 아닙니까? 고리대금업에 하는 짓도 깡패라 제국민의 원성도 자자한 곳인데, 그런 곳들을 전부 문 닫게 해도 할 말은 없으시겠죠?”
“누, 누구 맘대로 말인가! 우리도 나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장사를 하는 것인데!”
“라이얀 전하께서 황제 폐하가 되신다면 못하실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제국 법이야.”
은연중 웃어 보이는 제국군 장교가 나머지 뒷말을 이어주었다.
“전부 황제 폐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
벤자민 입장에선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1황자인 라이얀 테페즈는 여러 황자들 중에서 차기 황태자 후보로 강하게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니 찾아온 제국군 장교가 하는 말이 벤자민에겐 전혀 가벼이 들리지 않고 있었다.
‘저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싱클레어 가문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고.’
1황자인 라이얀 테페즈는 검술명가 테페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3황자인 칼만 싱클레어는 마법명가인 싱클레어 가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두 황자가 모두 왕관 전쟁에 참여한다고 가정했을 때 싱클레어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 리옹 길드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진 것이다.
“우선 생각할 시간을 주게. 우리도 싱클레어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찾아와 다짜고짜 3황자 전하를 지원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가 뭘 어쩌겠나? 우리 길드도 나름 입장이란 게 있는데.”
찾아온 제국군 장교도 그리 급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벤자민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이야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아마 곧 라이얀 전하께서 마석탱크와 관련된 일로 리옹에 방문하실 것 같으니, 그때까지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잠깐. 라이얀 전하께서 곧 리옹에 오신다고?”
“네, 일정이야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곧 찾아오실 겁니다. 대충 요르문간드 혁명군에 대한 토벌이 끝나신 직후가 되겠군요.”
“허허…… 혁명군에 대한 토벌은 거의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 곧 오실 겁니다.”
찾아온 제국군 장교는 나름 만족감을 머금으며 그에게 마지막 말을 전해주었다.
“그럼 벤자민 공께선 나름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겠습니다. 벤자민 공이나 길드원 모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장사를 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제국군 장교가 떠나가고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벤자민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젠장! 빌어먹을…….’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당면한 현실에 대한 욕뿐이었다.
‘세상에 그 미치광이 전쟁광이 리옹에 온다고? 혁명군에 대한 토벌이 끝난 시점이라면 곧이잖아.’
길드 회의도 준비해야 하는 마당에 황태자 후보로 강하게 거론되고 있는 라이얀 1황자의 방문 역시 그에겐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들었던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자비 같은 건 없을 거야. 애당초 테페즈 가문이 그런 거로 유명하니까.’
잔학무도하고 자비 없기로 소문난 검술명가.
역사적으로 테페즈 가문 출신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적을 난도질하고 살육을 즐겨 하는 미치광이들로 묘사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거 싱클레어 가문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지. 그건 미련한 짓이지. 당연히 싱클레어 가문에선 저런 말이야 귓등으로도 듣지 말라고 할 텐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곧 1황자가 찾아온다고 했으니 나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1황자 쪽에서 저렇게 나올 줄은…… 이거 어떻게든 둘 중 하나를 택하란 소린데.’
다가올 왕관 전쟁에서 유력한 참여 후보로 거론되는 게 1황자와 3황자였다.
‘2황자야 지지 세력이 약하니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겠고. 반반보다 약간 높은 확률로 1황자가 왕관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 보이는데…… 이거 이참에 테페즈 가문으로 라인을 갈아타야 하나.’
벤자민이 어느 쪽 라인을 타야 하는지 심히 고심하고 있을 때.
그에게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그는 벤자민을 대신하여 가게 업무를 보고 있던 세바스찬이었다.
“벤자민 공, 아까 다녀가신 분은 누굽니까? 저한테 대충 설명하기론 제국군 장교라고 하던데.”
“1황자 쪽 사람이네. 다가올 왕 관전쟁에서 3황자를 지원하지 말라고 내게 으름장을 놓더군.”
“예? 그럼 안 되지 않습니까? 저희야 싱클레어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데.”
“당연히…… 저쪽 뜻대로 해서는 안 되겠지. 자네 말대로 우리야 싱클레어 가문과 연이 깊은데.”
세바스찬이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1황자 전하께서 아주 호전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기존대로 3황자를 지원하게 되면 1황자 전하께서 난리라도 치시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안 봐도 뻔하지. 황후가 테페즈 가문 출신인데 그 피가 어디로 가겠나?”
“그럼 본래 3황자 전하를 지원하기로 했던 저희 길드 입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벤자민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것도 이번 길드 안건으로 내걸어야겠어. 나 혼자 결정하기엔 너무 문제가 커. 어차피 길드 회의도 열리는 마당에 예금 이자를 영구히 철회함과 동시에 다가올 왕관 전쟁에 대해서도 길드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어려운 문제를 길드원들과 나눈다는 것은 좋은 생각으로 보였다.
하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이는 세바스찬이 말을 이었다.
“어려운 문제로군요. 저 역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확실히 그 문제는 길드 회의를 통해 정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것보다 1황자가 길드 회의 전에 여기에 오면 안 될 텐데.”
그러자 세바스찬이 곧바로 의문을 표했다.
“1황자 전하가 여기에 온다고 했습니까?”
“마석탱크와 관련된 일로 여기에 온다고 하더군. 여기 리옹에 마석탱크 공장이 있잖는가?”
“아, 1황자 전하께서 마석탱크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상공업이 발달한 리옹에선 방코에서 많은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었기에 마석탱크와 같은 공장이 생겨날 수 있었다.
“마석탱크야 좋긴 하지. 좋기야 한데…….”
마석탱크.
오크, 리자드맨, 언데드와 같은 이종족들은 집채만 한 괴수병기들을 앞세워 전장에서 그들의 무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 괴수병기에 맞서 제국에서 개발한 병기가 바로 마석탱크와 같은 강력한 화력병기였다.
“요즘 마석탱크에 대해 말들이 많아. 개발 초기라 그런지 고장 문제도 많고.”
“마석탱크에 문제가 많다는 건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프랑크 백작이 또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군. 그 고철 덩어리에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마석탱크를 개발하고 리옹에 공장까지 세운 사람은 발렌 가문 출신이자 마법학회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프랑크 백작이었다.
발렌 가문은 본래 비루한 남작가였으나 마석탱크를 개발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백작가로 급부상한 가문이었다.
“또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까?”
“마석탱크 자체가 완전 돈덩어리야. 거 뭐만 하면 개선 좀 하겠다고 연구비로 돈 좀 달라고 하니. 이게 제대로 돈이 쓰이는지 알 수도 없고.”
“그것도 문제로군요. 아직 미완성이니.”
“괜히 쓸데없는 곳에 돈만 나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당장이야 급해서 마석탱크를 군에서 사들이고 있지만, 그러다 마석탱크가 고장만 나는 애물단지라는 게 알려지면 순식간에 망할 수가 있다고.”
“그럼 프랑크 백작에게 돈을 빌려준 저희 또한 문제가 되겠군요.”
“다 불량채권이 되겠지.”
마석탱크 또한 골칫거리였는지 벤자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잘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마석탱크와 관련된 일이 잘 풀린다면 그의 생각대로 떼돈을 버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거대 괴수병기가 지배하는 전장에서 그런 괴수병기에 맞설 제국의 유일한 힘은 마석으로 움직이며 강대한 화력을 뿜어내는 마석탱크밖에는 없었으니까.
“한데 이게 판단이 쉽지가 않아. 내가 무슨 개발자도 아니고. 그저 돈만 대주는 방코업자인데.”
“그래도 1황자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실 정도면 마석탱크도 나름 가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벤자민이 팍 구긴 표정으로 말했다.
“1황자야 뭘 알겠어? 태어나 배운 게 칼질밖에 없는 아주 무식한 놈인데. 그냥 당장 안 쓰기엔 아쉬우니까 격려 차원에서 들르는 거겠지. 어떻게든 쓸 만하게 만들어달라고.”
“고장이 진짜 많은 모양이군요.”
“얘길 들어보면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아무튼.
“이것도 좀 생각해 봐야겠어. 내가 무슨 미래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신처럼 미래 일을 알 수 있다면 여기서 더 무리해서 투자할지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접어버릴지 결단을 내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
그런 벤자민의 말에 세바스찬도 격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벤자민 공 말처럼 마석탱크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만 있다면 정말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안 그래도 프랑크 백작의 사정이 안 좋으니 잘만 도와준다면 공장 지분까지 노려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중요한 건 지분이지. 정말 잘만 된다면 당장 빌려준 돈보단 공장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