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20. 길드 회의(4)
리옹 길드의 수장.
벤자민 드 리옹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베르키스 주교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가문 사람이라는 것은 그와 가깝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베르키스 주교는 어릴 적부터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판단하건대.
벤자민은 록펠러의 말처럼 쉽게 제 뜻을 굽힐 위인이 아니었다.
고지식한 것도 모자라 고집 또한 황소고집이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교회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니 베르키스 주교 입장에선 벤자민은 아픈 손가락 같은 느낌이었다.
내치려고 해도 같은 가문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그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말대로 벤자민이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아니네. 가족 같은 사람이니 이제껏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뒀던 게지.”
록펠러는 차분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후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자기 대신 가문 사람을 고집할 수도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줄곧 방해만 되어왔지.”
베르키스 주교가 과거 일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때도 길드장이 벤자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날 모함하는 세력들을 이곳의 성금으로 전부 찍어 눌렀을지도 모를 일이야. 교단에 있는 그 어떤 세력도 성금보다 위에 있을 순 없으니까.”
상위 교구에 기부하는 성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없던 관심도 생기는 게 바로 교단의 일이었다.
한낱 사제장에 불과하던 그가 대주교의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성금의 힘이었고, 교단의 여러 파벌 역시 기부되는 성금에 따라 파벌의 힘이 정해지고 있었으니까.
이렇듯 교단에서 성금의 힘은 아주 대단했다.
그러니 그의 생각 또한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하지만 그 당시 벤자민이 길드장으로 있어서 돈줄이 되는 길드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진 못했네. 내가 벤자민에게 그랬었지. 당장은 힘들어도 대주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지금보다 더 편히 장사할 수 있게 밀어줄 테니, 이번 한 번만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록펠러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고, 베르키스 주교는 그 당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예 듣지도 않더군. 그냥 힘들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어. 정말이지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는데. 잘하면 궁무처장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걸 더 못 도와줘 가지고.”
그의 말에서 분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록펠러가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힘들었지. 나야 그 일 이후로 줄곧 내리막이었으니까. 내가 방코 연합과 친하다는 건 교단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어. 작정하고 물어뜯으면 어떻게든 물어뜯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거기다 교황 성하와의 친분도 두터울 때라 주변에서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을 거야.”
록펠러가 보기엔 베르키스 주교는 그 당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노렸던 것으로 보였다.
방코 업자를 가장 경멸하는 교단에서 방코 연합과 친해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양날의 검이었으니까.
“그때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네. 지금도 버젓이 주교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여기서 편히 장사하고 있는 방코 업자들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들이 내주는 성금이 있기에 아직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세. 다만 그때가 너무 아쉬울 뿐이지. 그때가.”
힘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베르키스 주교가 짧은 침묵 뒤 무거운 입을 뗐다.
“같은 가문 사람이란 게 때론 좋을 때도 있지만. 내가 볼 땐 오히려 불편한 거투성이야. 특히나 그놈은 더하지. 오히려 돈줄을 가지고 날 은연중 압박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큰 게 다 누구 덕분인데 이제 와서 그런 짓거리나 하고 앉았으니.”
이어질 뒷말이 중요했다.
그 말에 따라서 록펠러는 천국과 지옥을 오갈 테니까.
크흠!
짧은 헛기침 뒤 베르키스 주교는 뜻밖에도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 당시 만약 자네가 길드장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나?”
뻔한 대답이었으나 록펠러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전달해 주었다.
“저야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어떻게 해서든 주교 각하를 계속 밀어드렸을 겁니다. 어차피 그 정도까지 왔으면 저희도 끝장을 봐야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교단의 눈치만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하…… 그때 자네 같은 사람이 길드장이었어야 했는데. 그럼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몰라. 어쩌면 내가 교황 성하의 안수를 받아 궁무처장 자리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이지.”
궁무처장은 교황의 비서 같은 자리로 교단 내에서 그 위치와 힘이 막강하며 교황 서거 시 차기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교단을 총괄하는 자였기에 교황 대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다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전과 다른 베르키스 주교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언가를 결심한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자네가 그쪽 길드장을 맡아주게.”
그 한마디에 록펠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안으로 굽는 팔도 그저 말뿐이었던 것이다.
‘다행이야. 혹시나 했지. 나 말고 계속 그 사람을 고집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같은 가문 사람인데.’
“주교 각하. 감히 저 같은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 자리는 줄곧 리옹 가문의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결심을 굳힌 베르키스 주교는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나도 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네. 아무리 봐도 자네가 그 자리에 앉는 게 맞는 것 같아. 자넨 아직 젊잖나? 그리고 몬테펠트로 영지 이야기는 나도 들어서 잘 알고 있네.”
“영지 이야기라면…… 저희 카터 방코가 영지의 권리를 가져간 이야기를 말하시는 겁니까?”
“맞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자네가 참 영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한낱 방코가 영지의 권리를 전부 가져갈 줄이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거기 일이 그렇게 됐어도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지 않나? 그건 자네가 머리를 잘 쓴 거야. 괜히 영주를 쫓아내고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았다면 나와 피터의 입장도 아주 난처해질 뻔했어. 거기 일이야 우리의 관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관계없는 건 아니니까.”
“저도 여기저기서 여러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최우선적으로 영지의 권리만 가져왔습니다. 영주님의 지배권은 그대로 보장해 주는 게 저희를 위해서도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잘했다는 거야. 보통이라면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쳤을 걸세. 그런 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것만큼 민감한 문제가 없네.”
“뭐,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니 별 탈은 없는 모양입니다.”
“내가 볼 땐 자넨 될 사람이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여기 있는 길드의 수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당장 자기 앞에 보이는 밥그릇에만 집착하는 그 고집만 세고 크게 볼 줄 모르는 녀석보다는 훨씬 낫겠지.”
이어질 말은 그가 진실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와 함께 있어야 교단 인생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든 내게도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오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가 그 자리에 앉는 게 맞는 걸세.”
주교의 간절한 요청을.
록펠러는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
“제게 그 자리를 허락해 주신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 주교 각하를 모셔보겠습니다.”
만족감에 고개를 주억이는 베르키스 주교가 록펠러란 젊은 청년을 자신의 시야에 담았다.
‘젊은 사람이 아주 야심이 있어. 한낱 방코 조수라 해서 무시하려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젠 나까지 설득해 버리고 보통이라면 감히 앉을 수 없는 그 자리에 앉으려 하다니.’
야심에 찬 상대와 마주하니 그도 죽었던 열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내게도 저런 열정이 있었지. 그 열정. 모르긴 해도 아직 죽진 않았을 거야.’
“이제까지 제국 변방에 위치한 방코의 조수였던 자네에겐 아주 과분한 자리가 될 걸세. 그 자리는 나름 잔뼈 굵은 모든 방코 업자들을 능력껏 통솔해야 하는 자리니까.”
록펠러는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그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자네에게 그들을 통솔할 능력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야.”
이 순간 록펠러가 보인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다.
‘여기서 겸손을 떨었다간 오히려 반감만 살 거다.’
“주교 각하. 제 능력에 대해선 의심을 품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제가 너무 젊은 나머지 몇몇 길드원들의 반발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교 각하가 제 옆에서 버티고 있는 한 그 누구도 제 지위에 토를 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길드장으로 있으면서 그들에게 이전보다 더 큰 부를 안겨다 준다면.”
록펠러의 눈빛은 그 어떤 순간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도 저란 존재를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자신감에 베르키스 주교가 보인 반응은 의심이 아니라 바로 믿음이었다.
이제까지 그가 보여줬던 모든 것들이 믿음이었고, 지금 보여준 모습 또한 아주 믿음직스러웠으니까.
“훌륭하군. 자네가 아주 믿음직스러워. 지금 그 모습 분명히 기억해 두겠네.”
“믿어주십쇼. 단연코 절대 후회하시는 일이 없을 겁니다.”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이던 베르키스 주교가 문득 의문을 표했다.
“그보다 내가 자넬 지지한다고 해서 그쪽 길드장이 될 수 있겠나? 나야 당연히 자넬 지지하겠지만, 그쪽 길드장은 내가 앉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리옹 길드의 수장 자리는 사실상 그의 권한 밖에 있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록펠러는 은연중 미소까지 띠며 또 다른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 일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교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길드장은 전통적으로 길드 회의를 통해 정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드 회의는 일주일 뒤, 여기 게토 누오보에서 열리게 됩니다.”
“길드 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자네가 그 자리에 앉는다는 보장이 없잖는가?”
“보장이야 없지만 저는 이번 길드 회의를 통해 현 길드장의 무능함을 모든 길드원이 보는 앞에서 직접 증명해 보일 작정입니다.”
“어떤 식으로 말인가?”
“벤자민 공은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 지급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며 또 그것을 대단히 멍청한 짓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말뿐이죠. 실질적으로 제가 다른 식으로 증언한다면 벤자민 공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질 겁니다.”
베르키스 주교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
“길드 회의에서 현 길드장의 무능함을 주장하고 퇴출시킨 다음, 새 길드장을 선출시키려 한다면.”
록펠러가 입가를 작게 휘었다.
“마땅한 후보도 없는 마당에 과연 누가 새로운 길드장으로 추대되겠습니까?”
“당연히 내가 지지하는 자네가 되겠군.”
“그래서 제겐 이 대화가 그렇게나 중요했던 겁니다. 주교 각하의 도움이 없다면 절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