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20. 길드 회의(3)
그가 고심하는 듯 보이자 록펠러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이번엔 교황 성하가 되셔야죠. 어차피 자리란 건 하늘이 정해준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바로 하늘에서 정해준 사람입니다.”
너무 높아 감히 오를 수 없을 거라 장담했던 자리.
이제까지 생각조차 못 해본 일을 어느 방코 조수가 넌지시 찔러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베르키스 주교의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과연 가능할까?
사실 이전까지 그러한 노력들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도 교단에 관심을 받으려면 돈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단에서 가장 경멸하는 방코 업자들을 감싸며 그들이 편히 장사할 수 있게 길을 터주었고, 그 결과 방코 업자들이 많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속한 교구에 많은 성금이 모이게 됐다.
과거 일을 회상하기 시작한 베르키스 주교가 운을 뗐다.
“그때만 해도 참 좋았었지. 내가 다른 교인들과 다르게 방코 업자들을 밀어주니까 성금도 잘 걷히게 되고, 또 그 성금으로 교단에 잘 보일 수 있었으니까.”
리옹 교구에서 모인 성금은 자연스레 법황청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당시 교황이었던 펠릭스 3세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그는 대주교 자리까지 오르게 됐다.
“그 당시만 해도 교황 성하와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었는데…… 그놈의 이간질 세력들이 문제였지.”
하지만 갑작스레 급부상한 그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교단 내부에서 생겨나게 됐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교단 세력들이 그가 했던 일, 즉 방코 업자들을 감싼 일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방코 업자들하고 한통속이다. 지옥에 갈 놈들을 왜 구제해 줬냐. 말들이 참 많았지. 그 많은 성금들이 어디서 나온 줄 뻔히 알면서 그랬던 거야. 그냥 내가 눈꼴셨겠지. 사제장이나 하던 녀석이 갑작스레 대주교 자리까지 올랐으니 말이야. 그래도 교황 성하는 내 편이었지.”
역시 소문은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교황 성하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렇지. 그때만 해도 참 좋았어. 그게 틀어지게 된 계기가 줄어든 성금 때문이었지만.”
씁쓸한 나머지 살며시 표정을 구겼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줄어든 성금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서 이간질하던 세력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 어찌 됐든 성금이 줄어든 이후로 날 대하는 태도가 변하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줄어든 성금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서 이간질하던 세력들 때문인지 확실하지가 않아. 그냥 재수 없게 그 시기가 우연히 겹쳤을 수도 있고.”
“주교 각하께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그래도 그때 좀 더 무리해서 성금을 오히려 더 늘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이간질하는 세력들이라도 성금을 그렇게 많이 내버리면 찍소리도 못하게 되거든.”
“그 당시 법황청에 기부하는 성금은 더 늘리지 못한 겁니까?”
베르키스 주교가 자연스레 고개를 저었다.
“힘들었어. 그때만 해도 무리였거든. 방코 업자들을 쥐어 짜내고 만들어낸 게 그 성금이었는데…… 아무튼 그날 이후로 성금이 계속 늘어나진 않고 어느 정도 줄어든 이후로 계속 이 상태라네. 발전이 없지. 그러니 교단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기 시작했고.”
베르키스 주교가 록펠러를 향해 말했다.
“갑자기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그런 얘기를 내게 할 줄은 몰랐어. 교황 성하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 줄이야…… 솔직히 나도 예전엔 그런 욕심이 있긴 했었네. 그 자리가 어떤 자린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어떻게 보면 황제보다 더 높은 자리잖는가?”
“그건 맞습니다.”
“그 누구보다 요한 님과 가까이 있는 자리니까. 그런 자리긴 한데…….”
그가 아쉬운 듯 뒷말을 삼키자 록펠러가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가능하십니다.”
그 한마디에 베르키스 주교가 반응을 보였다.
“가능하다고?”
“네, 저와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실 겁니다.”
“그럼 지금은 전혀 가망이 없다고 보는가?”
그 물음에 록펠러가 옅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저보다 주교 각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떠십니까? 주교 각하께서 보시기엔 그 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베르키스 주교의 침음성이 길게 이어졌다.
확실히 록펠러의 말대로 지금 주어진 현실은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여기 방코 일들이라도 잘되면 또 모를까. 방코 업자들이야 돈을 잘 벌면 지옥에 가기 싫어 성금을 많이 내게 되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업들이 전혀 커지질 않고 있어. 내가 볼 땐 그 사업들이 지금보다 더 커지려면 대출해주는 돈이 지금보다 많아야 할 텐데…… 한데 그러기가 쉽지 않아. 그럴 기미도 안 보이고.”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대출해 주는 돈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런 업자들에게 성금을 받아 법황청을 달래야 하는 내 입장도 있고, 또 여기 길드장 녀석은 어떻게든 금화 보관료나 뜯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러니 들어오는 성금이 안 늘어나 이 모양 이 꼴인 게지.”
한숨 쉬는 그에게 록펠러가 강하게 말했다.
“저와 함께하신다면 분명 달라지실 겁니다.”
“자네와 함께하면 달라질 수 있다고?”
“네, 제가 장담해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질 겁니다.”
베르키스 주교가 짧게 혀를 차주었다.
“이보게. 나는 말뿐인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네. 자네처럼 날 교황 성하로 만들어주겠다고 말만 떠벌리는 사람들이야 주변에 널려 있지. 심심하면 보는 게 그런 사람들이야. 그러니 내가 자네를 믿을 수 있도록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대체 어떤 식으로 날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인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달라는 소리야.”
록펠러는 이쯤에서 느낌이란 게 왔다.
베르키스 주교가 이렇게까지 나왔다는 것은 이번 대화에 따라 자신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선 베르키스 주교 각하께 가장 필요한 것은 애석하게도 성금입니다. 교인에게 성금이 무슨 대수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록펠러의 말을 듣고 있던 베르키스 주교가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됐네. 그런 걸 애써 포장할 필요도 없이 성금이 최우선이네. 그건 내가 잘 아니까.”
“큼! 맞습니다. 성금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금은 강요한다고 해서 걷히는 게 아닙니다. 그만한 주변 여건이 갖춰져 있어야만 자연스레 성금이란 것도 따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현시점에서 벤자민 공은 리옹 길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록펠러를 보고 베르키스 주교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벤자민이 길드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네, 제가 볼 땐 벤자민 공은 오히려 길드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 주는 사업을 막아서는 것만 봐도 크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자 주는 사업이야 그냥 나와 그자의 단순한 이권 문제지. 그게 왜 길드장 자질에 문제가 되는 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방코 일이야 베르키스 주교가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하는 말이나 들어보고 싶은 심정에 베르키스 주교가 턱짓하며 말했다.
“계속 말해보게.”
“앞서 주교 각하께서도 말했듯이 여기 방코 업자들이 기존보다 대출 사업을 더 크게 늘리려면 남에게 대출해 줄 금화가 더 필요합니다.”
“그건 맞지. 가진 금화가 많아야 대출도 많이 해줄 테니까.”
“그러면 여기서 묻겠습니다. 사람들은 금화 보관료나 뜯는 방코에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금화를 맡기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이자까지 챙겨주는 방코에 맡기겠습니까? 둘 다 똑같은 방코라는 가정하에서 말입니다.”
이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이자 주는 곳에 맡기겠지. 둘 다 문제없는 방코라면 말이야.”
“그렇습니다. 이렇듯 이자 주는 사업이 오히려 저희가 벌이는 대출 사업에 더 좋은 겁니다. 제가 모르긴 해도 여기 있는 방코 업자들이 이자 주는 사업을 시작한다면 리옹에 있는 숨은 쌈짓돈까지 전부 방코로 모여들게 될 겁니다. 그럼 대출해 줄 돈이 많아지게 되니 대출 사업도 나름 번창하게 되겠죠.”
록펠러의 말에 관심을 보인 베르키스 주교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오호라. 그런 게 있었군.”
“물론 이자 주는 게 아깝고 방코 업자에게 손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율을 조정하면 되는 겁니다. 저희가 금화를 빌려줬을 때 달마다 6퍼센트의 대출이자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교 각하께는 3퍼센트 예금이자를 제안했었죠.”
베르키스 주교가 고개를 주억였다.
“맞네. 3퍼센트였었지.”
“그럼 다른 사람들한텐 1퍼센트 이자만 제안해도 되는 겁니다. 아니, 0퍼센트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겐 금화 보관료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이득이니까요.”
그제야 베르키스 주교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그런 게 있었어.”
“그렇게 되면 방코에선 지금보다 더 많은 금화를 대출해 줄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른 수익 역시 확연히 늘어나게 될 겁니다. 몇 푼 안 되는 금화 보관료를 뜯는 것보다 대출에 따른 이자 수익이 훨씬 크니까요.”
록펠러의 말이 이어졌다.
“주교 각하. 방코의 주된 수입원이 금화 대출에 따른 이자 수익이란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금화 보관료는 그 자체만으로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런 거로는 큰돈을 벌 수 없습니다.”
베르키스 주교가 공감했는지 다시 고개를 주억였다.
“그건 자네 말이 맞네. 나도 그놈의 금화 보관료가 되게 거슬렸으니까.”
“만약 주교 각하께서 제 생각에 동조하신다면 벤자민 공은 길드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언가 아쉬웠는지 베르키스 주교가 록펠러에게 물어보았다.
“자네는 그런 부분에 대해 벤자민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줬나?”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해 자체를 안 하려고 하십니다. 오히려 금화 보관료만 받아오던 기존의 형태를 더 옹호하고 계시죠. 그리고 저 같은 사람이 이자 주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기존에 있던 금화 보관료를 받는 사업이 완전 망하게 되니, 이를 우려하여 오히려 이자 주는 일을 길드 강령까지 발표해서 막아서는 겁니다.”
쉴 틈이 없는 듯.
록펠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 머무는 며칠 동안 몇몇 방코 업자들을 만나봤습니다. 그들도 생각이 제각각이지만, 제 생각에 동조해서 저처럼 이자 주는 사업을 진행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길드장 눈치가 보여 감히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리옹에서 리옹 가문 사람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대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한 명도 없겠지. 그 누가 우리 가문 사람에게 그러겠나.”
“지금 벤자민 공이 딱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리옹에서만큼은 그는 절대 권력자입니다. 하물며 주교 각하까지 같은 가문 사람으로 있는데 그 누가 그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록펠러의 말을 들어보니 리옹 길드는 앞뒤가 꽉꽉 막힌 길드장으로 인해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후…….”
그래도 같은 가문 사람이었다.
한숨을 짙게 내쉬는 그에게 록펠러가 계속 밀어붙였다.
“이 일이 주교 각하께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같이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고 근본도 없는 녀석보단 그래도 같은 가문 사람이 길드장 자리를 차지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 순간 록펠러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합니다. 벤자민 공이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한. 제가 벌이는 이자 사업은 그대로 사장될 것이고, 또 주교 각하께서도 현실에 계속 안주하셔야 할 겁니다. 주변 환경이 전혀 변하질 않는데 어떻게 주교 각하께서 예전의 대주교 자리와 그보다 더 나아가 교황 성하의 자리까지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