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19. 리옹 길드(6)
“정말 그렇게만 해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네, 우선 제게 필요한 것은 금세공업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길드장 눈치를 덜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다고 그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건 맞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하고.”
록펠러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또 주교 각하께서도 나름의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겁니다.”
“무슨 결정을 말인가?”
“같은 가문 사람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와 주교 각하를 위한 다른 사람을 길드장 자리에 앉힐 것인지. 그에 대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흠…… 어렵군. 자넨 어려운 부탁만 하고 있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그래도 같은 식구를 챙기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 일이 어려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보단 같은 가문 사람을 더 챙기시겠죠. 그게 맞으니까요. 하지만 주교 각하께 더 이득이 되는 사람이 누군지는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교 각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
“네, 대신 저와 제 동생을 금세공업자로 만들어주십쇼. 이건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니 크게 어렵진 않으실 겁니다.”
“그건 알겠네. 금세공업자가 되는 건 그리 신경 쓰지 말게나. 내가 요청을 하면 황실에서도 당연히 들어줘야지. 감히 누가 한 말인데.”
“그럼 주교 각하만 믿고 저도 제 나름대로 움직여보겠습니다.”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은 해뒀나?”
“대충 그림이야 그려놨습니다. 일단은 말을 듣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 생각입니다. 제가 그쪽 길드장을 하려면 우선 그 길드에 계속 속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래 봤자 나중에 주교 각하의 도움이 필요할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 우선 제 나름대로 움직여볼 생각입니다.”
“알겠네. 나도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힐 것인지 나름 결정할 시간이 필요하니,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게나.”
“네, 그럼 저는 그렇게 알고 일단 물러나 있겠습니다. 아, 당분간 리옹에 계속 머무를 것 같으니 주교 각하께서도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쇼.”
“알겠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자네 동생을 내 개인 비서로 쓰고 있으니, 언제든 레오를 통해 부르겠네. 레오에게나 잘 말해주게나.”
“감사합니다. 아, 마지막으로 황실에 요청한 것은 언제쯤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겁니까?”
“아무리 길어 봤자 일주일도 안 걸리겠지. 일주일 안으로 내가 자넬 금세공업자로 만들어줄 테니,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게나.”
“그럼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베르키스 주교와의 만남을 끝낸 록펠러는 방을 나선 직후 곧바로 레오와 마주칠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밖에서 기다린 거야?”
“주교 각하와는 잘 만나신 겁니까?”
“대충. 레오야.”
“네, 록펠러 형님.”
“당분간 리옹에 계속 머무를 것 같다. 일이 생겼거든.”
“네에? 리옹이요? 리옹에 잠시 머물다가 황도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거든. 나름 골치 아픈 일이야.”
의문을 표한 레오가 다시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요?”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래서 당분간 리옹에 머물면서 우리 레오 좀 챙겨주려고.”
이 정도 대화에서 록펠러는 레오를 데리고 복도 위를 거닐었다.
대성당 입구로 향하는 길에서 록펠러가 가볍게 웃어 보이자 레오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안 풀리셨다니……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아니, 딱히 없는데. 그냥 내가 머무는 위치만 잘 알고 있으면 돼. 듣자하니 네가 베르키스 주교 각하의 비서 일을 하고 있다면서?”
그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아무래도 주교 각하께서 저를 챙겨주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개인 비서까지는 아니고 개인 비서 밑에서 여러 일들을 배우고 있거든요.”
“정식 비서는 아직 아니구나.”
“네, 제가 어려서 배울 게 많습니다.”
“그래도 그 나이에 그런 자리에 있는 게 어디야. 남들은 생각도 못 하는 자리니 너도 나름 자부심을 가져.”
레오가 베르키스 주교의 개인 비서가 된 일이야 록펠러 입장에선 이해 안 되는 게 아니었다.
‘하긴 누구 덕분에 교회 재산을 불리고 있는데. 저 정도야 당연한 거지.’
대성당 출입구에 거의 다다르자 록펠러가 레오의 한쪽 팔뚝을 툭툭 쳐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가 볼게. 형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너는 네 나름대로 잘 해야 돼. 형이 언제까지 다 챙겨줄 순 없으니까.”
“제 걱정은 너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애도 아닌데 제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구나. 아무튼 리옹에 좀 머물 생각이니 위치가 정해지면 곧바로 알려주마.”
“네, 머물 곳이 정해지시면 제게 바로 알려주세요. 저도 시간이 날 때마다 록펠러 형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그래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일이 바빠서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거든.”
그렇게 레오와의 만남을 끝낸 록펠러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부터 확인했다.
‘이거…… 서둘러야겠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대성당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던 안내자를 대동한 록펠러는 시간에 쫓기듯 게토 누오보 지역으로 다시 찾아갔다.
그러곤 길드 본부가 있는 리옹 방코로 가,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벤자민 길드장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갔다 온 일은 어찌 됐나?”
대뜸 결과부터 묻는 그에게 록펠러는 선한 미소부터 지어 보였다.
‘당신이 원하는 결과는 아마 안 나올 거야. 하지만 당분간은 당신 장단에 맞춰줘야겠지. 이쪽도 나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역시나 주교 각하의 반응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제게 신앙심을 들먹이며 교회 재산을 막무가내로 품으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피식 웃어 보이는 벤자민 길드장이 대꾸해 줬다.
“교인들이야 다 그렇지. 그렇게 앞뒤 꽉꽉 막혀 있는 놈들인데 자네는 그런 자들의 배를 불려주고 싶나?”
“그래도 저는 신과 교회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자 벤자민이 표정을 구겼다.
“길드에서 퇴출당하고 싶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하는군. 그래서 교회 편에 서기로 했나?”
그 물음에 록펠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벤자민 공. 제가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했지, 언제 충성한다고 했습니까?”
이놈 보소.
“그래서?”
“이자 주는 사업은 안타깝게도 잠시 철회하기로 했습니다. 리옹 길드에 속하지 않고선 방코 일을 계속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제야 벤자민 길드장이 나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벤자민은 습관처럼 책상을 거칠게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 길드에 속하지 않고서는 방코 장사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건 신이 와도 마찬가지야. 방코는 신뢰가 곧 생명이야. 하지만 길드에 속하지 않은 방코는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지. 그러다 망해버리면 뭘 어쩔 건데? 맡긴 금화는 대체 어디서 찾으려고? 전부 다 우리 길드가 있기에 방코 업자들도 안심하고 장사를 계속할 수 있는 걸세.”
저 혼자 흥분하여 소리쳤던 벤자민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의자를 비스듬히 돌려 앉았다.
그러면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알겠네. 알았으니 이제 돌아가 보게. 아, 철회하기로 했으니 그 일은 조속히 철회하고.”
“그럼 저희 방코는 계속 길드에 남아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제 턱수염을 매만졌다.
‘은근히 거슬리는 놈인데. 하지만 그쪽 주인은 아니니까.’
“내 말을 들었으니, 당장 자를 생각은 없네. 만약 내 말을 안 들었으면 내쫓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자네가 그리 말하니 생각을 좀 바꿨지.”
벤자민이 계속 생각했다.
‘카터에게 말해서 저놈은 그냥 잘라 버리라고 해야겠어. 그렇게 하는 게 왠지 맞을 것 같아. 알게 모르게 거슬리는 놈이라 나중에 뭔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일단은 퇴출시키지 않고 가만히 두겠네. 나중에 헛짓거리만 안 하면 그쪽 영지에도 방코 하나 정도는 필요하니까.”
속내를 감춘 건 록펠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앉아서 짱구를 오지게 굴리고 있군. 그래 봤자 그 자리에 오래는 못 있을 거다. 당신 같이 무능한 사람이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간 길드에 속한 모든 방코 업자가 재미를 못 볼 테니까.’
방코 연합.
그것은 한때 모두로부터 핍박받던 고리대금업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결성된 모임이었다.
지금에서야 그 의미가 많이 변질되어 단순 생존이 아닌 더 많은 이익을 더 추구하기 위한 이익 집단으로 바뀌게 되었고, 만약 길드원 모두에게 보다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면 그 사람이 기존의 길드장을 몰아내고 새로운 수장이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록펠러는 생각했다.
‘지금 당신이 앉고 있는 자리는 당신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야. 길드에 속해 있는 그 탐욕스러운 방코 업자들을 진정으로 배불려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지.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빵점짜리 수장이야. 퇴출감이지.’
“길드에는 아직 퇴출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알아서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하는 벤자민이 거만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이번 길드장 주최로 길드 회의를 열어 확실히 못 박아두는 게 좋겠군. 자네 생각이 확실히 틀렸다고 말이야. 자네가 그 회의에서 확실히 증언해 주게.”
“길드 회의요?”
“그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니면 몇 년마다 한 번씩 길드에 속한 모든 방코 업자를 불러 회의를 하는 자리네. 거기서 새 길드장을 선출하기도 하고, 아니면 새로운 지침을 내려 모든 길드원에게 강제할 수 있다네.”
벤자민이 이어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이자 주는 일 때문에 길드 자체에서도 시끌벅적해. 지들끼리 맞다 틀리다 아주 난리도 아니지. 거기서 확실히 말해주는 거야. 자네 생각이 완전히 틀렸었다고. 그리고 나는 길드 지침으로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 지급을 영원히 금지할 생각이라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발상인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야.”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다니!
록펠러는 치솟는 입꼬리를 막기가 힘들었다.
‘저 혼자 뒈지려면 뭘 못하겠어. 길드 회의를 열어 내 생각을 완전히 묻어버리려는 모양인데. 그건 아니지. 오히려 그 회의가 네 무덤이 될 거다.’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저도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그 자리서 확실히 증언하고 싶습니다.”
저 혼자 만족감에 취해 고개를 주억이는 벤자민이 말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게. 아마 바로 모이긴 힘들 거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길드원에게 전부 알리고, 또 그들이 모이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2주 뒤에 회의가 열리겠군. 자네, 시간 좀 있나?”
“어떤 시간이 말입니까?”
“회의가 열리는 그때까지 여기 리옹에서 잠자코 기다려 줄 수 있냐 이 말이야.”
“네, 물론입니다.”
“그럼 다행이군. 길드 회의 전까진 여기에 잠시 머물러주게. 머물 곳은 내가 마련해 주지.”
제 무덤을 파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 제 등에다 칼을 꽂을 위인에게 잠자리까지 제공하다니!
“벤자민 공께서 저를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록펠러는 최대한 본심을 숨기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