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19. 리옹 길드(5)
베르키스 주교가 의문을 표했다.
“도와달라고?”
“네. 제가 만약 교회 재산을 계속 품게 된다면 길드 쪽에선 어떤 식으로든 압박이 시작될 겁니다. 우선 길드로부터 퇴출을 당하게 되겠죠.”
“길드로부터 퇴출당하는 걸 내가 막아줄 순 없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길드에서 퇴출되는 걸 주교 각하께 막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걸 주교 각하께서 막아줄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도와달라는 겐가?”
앞서 록펠러는 생각했었다.
만약 둘 중에 하나와 손을 잡는다면 나머지 하나와는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말이다.
‘오히려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변방 영주가 되는 길을 포기한 결과 현재 록펠러의 신분은 평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방코의 두 연합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리옹 길드장은 제국에서 그리 홀대받는 직책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제국과 황실에 큰 자금을 댈 수 있었고, 그런 이유로 황실과도 인연이 깊으니, 제국에서도 리옹 길드장에 대한 예우를 어느 정도 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귀족으로의 대우였다.
‘귀족에도 나름의 등급이 있지. 리옹 길드장은 제국의 오등작 중 4번째인 자작에 해당돼.’
세습되는 귀족 계급 중에서 가장 위가 공작이었고, 가장 밑이 남작인 귀족 계급에서 자작이라 하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위치였다.
‘평민이 하루아침에 공작이 될 순 없을 테니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신분 상승일 수도 있어.’
만약 록펠러가 체스터 영주를 몰아내고 몬테펠트로 영지의 영주가 됐다면, 아마 남작 정도의 신분을 가졌을 것이다.
‘영주라도 영지의 지위가 낮다면 그 계급도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지.’
대개 영지를 거느린 경우 오등작 중 3번째인 백작의 지위를 갖게 되는데, 그것도 영지의 지위가 어느 정도 있을 경우에만 백작이 될 수 있었고, 언제 잃어도 상관없는 제국 변방에 위치한 아주 별 볼 일 없는 영지의 경우 백작 다음이라는 자작보다도 낮은 위치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변방의 영주가 다 같은 대접을 받는 건 아니었다.
변방의 영지가 아주 중요시되는 경우 변경백이라 하여 오히려 백작보다도 더 높은 후작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이것은 제국 변방의 땅이라 해도 그 가치에 따라 그 땅을 지배하는 자의 대우가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땅이 곧 영주고, 영주가 곧 땅이라는 말이 생겨났지.’
즉, 몬테펠트로 영지는 제국에서 중요도가 현저히 낮았고, 그런 연유로 몬테펠트로 영주는 남작이란 신분에만 머물러야 했다.
실제로도 몬테펠트로 영주는 기사보다 위라는 남작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 계급을 더 세분하게 따진다면 남작보다 더 낮은 기사 계급도 있고, 공작보다 더 높은 대공이란 것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고.’
어쨌든.
리옹 길드장이란 직책을 갖게 된다면 변방 영주보다 더 높은 귀족이 될 수 있었고, 록펠러는 그 자리를 꿰찰 생각을 하게 됐다.
‘이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지만. 제국 금융 전반을 지배하려면 언젠간 차지해야 할 자리이기도 했어.’
아주 다행스럽게도 리옹 길드의 길드장은 세습되는 게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리옹 길드장은 리옹 길드에 속한 모든 방코 업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고 투표하는 방식으로 뽑고 있었다.
그러니 리옹 길드에 속한 여러 방코 업자들이 강하게 지지해 준다면 록펠러가 길드장 자리를 꿰차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 밑에선 제대로 일할 수도 없고. 그리 꽉꽉 막혀서야 돈을 어떻게 벌겠어. 절대로 못 벌지.’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 지급을 당연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여기 길드장의 생각을 바꿔야만 합니다. 하지만 제가 벤자민 공과 대화를 나눠보니, 벤자민 공이 있는 한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 지급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이건 주교 각하께서도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저보다도 여기 길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건 자네 말이 맞을 거야. 놈은 돈을 너무 밝혀서 금화 보관료만 뜯으려고 할 테지. 절대 이자 같은 걸 줄 위인이 아니야.”
“그럼 이런 상황에서 주교 각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까?”
베르키스 주교가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그래서 자네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제가 여기서 하려는 말은. 벤자민 공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벤자민 길드장은 베르키스 주교와 같은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말에 베르키스 주교가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아무리 그래도 같은 가문 사람인데. 자네 생각이야 대충 알고 있네만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어찌 같은 가문 사람을 배척할 수 있겠나? 아무리 내 욕심이 있다고 해도 그럴 순 없네.”
“그럼 금화 예치에 따른 이자 지급은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쪽에선 어떻게든 저흴 막으려고 할 텐데, 거기다 길드 퇴출까지 강행시킨다면 저희가 무슨 수로 교회 재산을 계속 품고 있겠습니까?”
대답이 없는 베르키스 주교를 향해 록펠러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벤자민 공께선 어떤 식으로든 교회 재산을 자신의 방코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금화 예치에 따른 금화 보관료를 받게 될 테니까요.”
“크흠…….”
“같은 가문 사람이라 주교 각하의 판단이 어렵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주교 각하께 이득이 되는 사람인지는 잘 따져보셔야 합니다.”
그 말에 베르키스 주교가 의문을 표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벤자민 공의 자리를 제가 맡는 게 어떨까? 주교 각하께 묻고 있는 겁니다. 저야 항상 교회의 편이고, 또 주교 각하의 편이니까요.”
“뭐라?”
베르키스 주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록펠러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자네 지금…….”
“제가 볼 땐 주교 각하께서는 항상 리옹 길드에 불만을 가지고 계셨던 걸로 보입니다. 교회 재산을 품고 있으면서 감히 금화 보관료나 뜯을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가지고 뭐라 하자니, 같은 가문 사람이라 할 말은 또 못 하겠고. 솔직히 이런 심정이 아니었습니까?”
“크흠…….”
애꿎은 헛기침만 연발하던 베르키스 주교가 마지못해 인정해 주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자네 말이 어느 정도 맞네. 이제까지 길드에 대한 불만이야 항상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건 길드장이 같은 가문 사람이어서 그런 겁니까?”
“그런 거지. 그게 아니면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놈에게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겠나? 내가 바로 교회고, 교회가 바로 난데. 내 말은 곧 신의 뜻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교 각하의 말씀은 곧 신의 의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놈도 여기 길드장이라 그런지 나름의 입김이 있어. 이곳의 돈줄을 죄다 쥐고 있으니 놈이 하는 말도 여기선 나름 법이지. 그래서 나도 놈의 눈치를 은근히 보는 중이고.”
“그렇다고 해서 일개 길드장의 말이 신의 뜻보다 더 높을 순 없는 법입니다.”
“그건 맞네. 여기엔 자네 같은 사람이 아주 많아야 할 텐데, 막상 보면 그렇지가 않아. 다들 길드장 눈치를 보고 있지.”
“그런 부분은 굉장히 아쉽습니다. 다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잠시의 침묵 뒤.
록펠러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 주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참에 주교 각하와 뜻이 맞고, 또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교 각하 입장에선 다른 사람보단 주교 각하께 충성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같은 가문 사람인데.”
그 말에 록펠러가 설핏 웃어 보였다.
“같은 가문 사람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득을 본 적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벤자민 공께선 교회에 득이 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습니까?”
“크흠…….”
애꿎은 침음성만 계속 흘리던 베르키스 주교가 이내 찌푸린 표정으로 록펠러에게 다른 걸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그 자리에 앉을 수나 있겠나? 자넨 아직 금세공업자도 아니지 않는가? 아직 금세공업자도 아니면서 어찌 길드장 자리에 앉으려고.”
“그건 맞습니다. 아직까진 금세공업자도 뭐도 아닙니다.”
“듣자 하니 금세공업자가 되기 위해선 리옹 길드나 블랙라벨 유니온에 가입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그 둘 중에 어느 곳도 몸담지 않고 있는데 자네가 그런 말을 꺼내기 전에 우선 금세공업자가 되는 게 순서가 아니겠나?”
“거기에 대해선 저도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여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뭘 말인가?”
“애당초 이자 지급 문제로 리옹 길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그쪽 길드에 가입하여 금세공업자가 되는 길은 막힐 것으로 보입니다. 벤자민 공께서도 제가 이자 주는 사업을 철회하지 않으면 제가 금세공업자가 되는 일을 허락해 주지 않겠죠.”
“그렇겠지.”
“그렇다고 해서 제가 블랙라벨 유니온 쪽으로 찾아가서 그쪽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확실한 게 아닙니다. 그쪽도 제가 가진 생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럴지도.”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베르키스 주교가 가만히 앉아 록펠러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애당초 금세공업자가 되는 건 황실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황실에선 일일이 금세공업자를 선별하는 일이 귀찮아 그 일을 두 방코 연합에 위임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두 연합에 속해 있는 방코 업자라면 무조건 금세공업자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사정이야 이러하니 제가 주교 각하께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애당초 금세공업자가 되는 건 두 방코 연합의 승인 없이 황실의 허락만 있으면 끝나는 일입니다. 굳이 여기서 길드장의 승인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는 소리죠.”
록펠러가 곧바로 이어 말했다.
“주교 각하께서 힘 좀 써주십시오. 그럼 주교 각하께서 맡기신 금화는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령 저희 방코가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계속 품고 가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그의 입장에선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가문 사람을 배척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까.
“금세공업자가 되기 위해선 황실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황실의 허락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주교 각하의 위치라면 황실에 그런 요청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금세공업자야 그리 대단한 직업도 아니니 황실에서도 주교 각하의 요청을 물릴 이유가 없고요.”
베르키스 주교도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지. 내 입김이 그렇게 작진 않으니 황실에서도 외면하진 않을 거야. 아니지. 외면하는 순간 그건 큰일이지. 나를 우습게 봤다는 소리니까.”
“저도 주교 각하를 위해 어떻게든 힘써드릴 테니, 우선 저와 제 동생 조슈아를 금세공업자로 만들어주십시오. 그다음 여기 길드장과 관련된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