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19. 리옹 길드(1)
대격변.
과거엔 분명 존재했지만 역사엔 기록되지 않은 고대 마수, 베헤모스가 잠든 고대 유적지에서 소설 속 주인공이 깨어난 베헤모스를 죽이고 그의 마검을 얻게 되면서 생겨난 마법적인 힘이 제국 변방 지역을 크게 강타하며 생겨난 지각 변동.
이 일로 인해 제국 변방에 속한 몇몇 지형이 크게 바뀌며 하루아침에 없던 지형들이 생겨나고 또 있었던 지형들이 사라지게 되는 등 큰 변화가 찾아왔다.
수차례에 걸친 큰 지진으로 인해 몬테펠트로 영지는 다른 곳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결과 영지 내에 있는 수많은 집과 건물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여기엔 영주성 역시 포함되어 있었고, 계속되는 지진으로 인해 다른 곳에 미리 피신해 있던 영주는 다행히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누가 마법이라도 쓴 건가?’
제국이 기록하는 역사서에는 대지를 부수고 갈라지게 할 만큼 강대한 마법을 가진 대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마법명가, 싱클레어의 초대 가주의 이야기였다.
‘내가 어디서 원수진 일도 없을 테고.’
절반 이상이나 무너져 내린 영주성을 바라보던 영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집을 잃은 사람이 됐으니 그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하…….”
‘세상에 되는 일 하나 없군. 내 딸이 근본도 없는 집구석에 팔려간 지가 언젠데, 이젠 내가 살던 성까지 무너져 내리다니.’
지진의 강도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미약한 지진이 그의 발끝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전에 느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끔찍하군. 그때 있었던 일은 정말 기억하기도 싫어.’
대격변의 첫 시작은 나름 강렬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심해졌는데 전날부터 많이 조용해지고 있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영주 옆으로 말을 탄 오버시어가 찾아와 불쑥 말을 붙였다.
“자네 왔나?”
“네,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오는 중입니다.”
“이거 대체 언제까지 이러는 거야?”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갑작스레 생겨난 일인지라. 그래도 이젠 잠잠해지고 있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그저 하늘이 노한 건가?”
“교회에선 그렇게 떠들고 있습니다만. 그거야 모르죠.”
“어떤 마법사가 여기까지 와서 장난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장난치고는 너무 심하군요. 그럴 이유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영주가 눈가를 좁힌 채 제 턱수염만 매만졌다.
‘설마 누가 마법으로 장난친 건 아니겠지?’
“주변은 둘러보고 왔나?”
영주의 물음에 오버시어가 바로 답해주었다.
“네, 기존에 있던 길은 포기하고 새로 생겨난 다른 길로 대충 둘러보고 왔는데, 확실히 영지 지형 자체가 크게 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며칠 동안 그렇게나 흔들어댔는데 땅이 가만히 있는 게 웃긴 거지.”
“없던 능선 같은 것도 보이고, 또 계곡이나 물줄기도 기존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마 저처럼 둘러보시면 영주님께서도 크게 놀라실 겁니다.”
“크흠!”
살던 곳이 무너져 내렸고, 영지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영주는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뭐 어차피 무너진 거야 다시 세우면 되는 일이고.”
그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
딱 한 가지였다.
‘이렇게 되니 차라리 잘됐군. 나야 돈 문제는 이제 신경 안 써도 되니까.’
“필요한 돈이야 그 잘난 방코에서 알아서 마련해 주겠지. 그래, 그 녀석은 지금 뭐 하나? 설마 이 와중에 갑자기 죽은 건 아니겠지?”
그 물음에 오버시어가 답해주었다.
“그분께서는 지금 리옹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신 상태입니다.”
“리옹? 갑자기 리옹은 왜? 본래는 황도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이유야 제가 알 순 없지만, 아무래도 방코 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영주가 표정을 구겼다.
“녀석이 지금 방코 주인이나 다름이 없는데, 놈이 떠나면 여긴 어떻게 하라고?”
“방코 일을 혼자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셋째 동생분께서 방코에 같이 있는 마당에 큰 문제야 있겠습니까?”
언제부터 가족 같은 경영이 됐는지.
영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기가 차는군. 누가 보면 카터 방코가 아니라 그놈의 로스메디치 집안의 방코인 줄 알겠어.’
“언제부터 거기가 지들 방코였다고. 카터는 아예 일에서 손 뗐나?”
오버시어는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카터가 방코 일에서 손을 뗀 지가 꽤 됐기 때문이다.
“제 기억상으론 아마 일은 안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기 가게인데,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쓰나.”
“저희야 그쪽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 알아서 하겠죠.”
“하긴.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굴러갈 테니까.”
무너진 영주성.
그리고 마을 사정도 이와 비슷하거나 더 심할 것이라 생각한 영주가 도리어 웃어 보였다.
‘아무튼 영주성은 알아서 복구해 주겠지. 지가 한 말이 있는데, 설마 여기랑 영지를 이딴 식으로 계속 놔두진 않겠지.’
그런 영주에게 오버시어가 말을 남기며 떠나갔다.
“그럼 전 방코에 좀 들러야겠습니다.”
그렇게 떠나는 오버시어를 보는 영주의 표정이 어두웠다.
‘돈 문제야 신경 안 써서 좋은데, 완전 찬밥 신세로군. 예전 같았으면 나한테 보고하고 끝냈을 텐데.’
영지를 둘러보다 영주와 우연히 만났던 오버시어는 그대로 카터 방코로 향했다.
시장 어귀로 진입하자 전날보다 더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영지민들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엔 하나같이 수심이 가득했다.
‘대부분 집을 잃었으니까.’
그도 사람인지라 영지민들이 걱정되긴 했다.
몇 세기에 걸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 일로 집을 잃게 되었는데, 그들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이 일도 해결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마 무리겠지.’
그렇게 생각했건만.
막상 그를 찾아가 보니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무너진 집이야 다시 세우면 됩니다.”
그런 록펠러의 말에 오버시어가 다소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대출이 필요하겠죠.”
찾아간 카터 방코 역시 지진 피해로 인해 가게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다른 가게와 달리 마법보호가 걸려 있어서 무너져 있거나 하진 않았다.
“대출이라 하시면…….”
이런 데서 대출 이야기라니.
오버시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록펠러가 바로 이어 말했다.
“물론 이자는 생각보다 낮습니다. 이런 때에 이자까지 높게 받으면 지진 피해로 고생하시는 영지민들이 어찌 다시 일어나겠습니까?”
“그럼 이자는 대충 어느 정도 생각하시는지?”
“이걸로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빌린 돈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라야겠죠.”
애당초 수익 창출을 위해 대출을 크게 늘릴 계획이었던 록펠러에겐 이번 대격변은 아주 환영할 일이었다.
이 일로 영지민 전부가 빚을 지게 된다면 자신은 더더욱 살찌게 될 터.
“하여 신용이 건실하다면 매달 3퍼센트 이자로 빌려드릴 생각입니다. 기존 6퍼센트 이자의 절반이죠.”
“3퍼센트라…….”
“모두에게 3퍼센트는 아닙니다. 사정에 따라선 1퍼센트 이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1퍼센트까지 내려주시는 겁니까?”
록펠러가 선하게 웃어 보였다.
“다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오버시어가 나름 감동했다.
보통 방코 업자라 하면 제 잇속만 챙기기 바빠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더 높은 이자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집 잃은 사람들이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 집을 지어야 했으니까.
“정말 착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제까지 방코 업자는 다 같은 줄 알았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이 영지가 빠르게 복구되고 안정되어야 세금을 걷는 저희에게도 좋은 겁니다.”
“어찌 됐든 영지민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영주님보다 더 하시군요.”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야 항상 영지를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이 사실을 영지민들이 알게 되면 영지민들이 아주 기뻐할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오버시어가 갑작스레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록펠러에게 건네주었다.
“아 이건 길가다 우연히 찾은 건데.”
오버시어는 오늘 아침, 영지 주변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크게 바뀐 물줄기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게 됐다.
전날 비까지 온 상태라 물이 크게 불어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들에게 찾아갔더니, 글쎄 아이들은 거기서 반짝이는 돌 같은 걸 줍고 있었다.
“굳이 이걸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시니 알아두시는 게 좋을 거 같아 하나 챙겨왔습니다.”
오버시어가 건넨 반짝이는 돌.
그것은 광석 사이사이에 아주 미세한 자연금이 박혀 있는 금광석이었다.
‘이건…….’
놀란 표정을 감춘 록펠러가 태연히 물어보았다.
“이게…… 뭡니까? 뭔가 군데군데 반짝이는 거 같긴 한데.”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제가 볼 땐 아마 금광석으로 보입니다. 최근에 지형이 크게 뒤틀리지 않았습니까? 예전에 여기가 아즈락 골드마인이라고 해서, 엄청난 금광이 있던 곳이라 했는데. 제가 잘은 몰라도 이번 지형 변동으로 인해 예전에 잊혔던 금광석 몇 개가 불어난 물줄기를 따라 여기까지 굴러온 모양입니다. 그걸 아이들이 찾으며 놀고 있길래 가서 하나 받아왔습니다.”
오버시어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이 대격변 이후로 이 땅이 금싸라기 땅이 될 것을.
하긴 짐작도 못 하겠지.
하지만 록펠러는 달랐다.
‘이런. 좀 더 서둘러야겠어. 대격변으로 인해 금광석이 나오는 걸 막진 못할 거야. 이미 뒤집힌 지형에서 금맥이 노출됐을 테니까.’
그동안 이 땅에 고이 잠들어 있던 금맥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서 생겨난 금광석과 사금들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지는 것은 이제 막을 수 없는 일로 보였다.
오버시어가 별생각 없이 주워온 금광석이 과연 한 개일까?
계속 눈에 띄게 된다면 아마 오버시어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 땅이 과연 죽은 땅이 맞는지.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어.’
“아…… 그 얘기 저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여기에 드워프들이 살았다고 했었죠?”
그 말에 오버시어가 고개를 주억였다.
“네, 오래전엔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그땐 이 땅이 금광으로 넘쳐났다고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그게 금광석이 맞다면 제 생각엔 예전에 드워프들이 흘리고 간 금광석 중 일부가 이번 대지진으로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버시어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땅에서 무슨 금광석입니까? 대지진 때문에 우연히 주운 거겠죠.”
그러면서 이 말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게 계속 나온다면 참 좋겠군요. 그럼 이 땅의 가치도 달라져서 더 이상 제국 변방이 아니라 나름 중요 지역으로서 폐하의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외세 침입이 있을 때 황실의 도움이라도 받지 않겠습니까?”
오버시어가 하던 말을 계속 이어주었다.
“예전에 토템전쟁이 있었을 때 황실에서 얼마나 매몰차게 이 땅을 외면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냥 버린 땅이더군요.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황실에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렇겠죠. 관심조차 없으니 도와주지도 않았겠죠. 이 땅이 어떻게 되든 말든, 거기선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