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72화 (72/181)

§72화 18. 그대여, 빚에 먹히리 #3(5)

이놈이 언제부터 그 방코 업자 놈을 존대했는지.

영주가 오버시어를 고깝게 쏘아봤음에도 불구하고 오버시어는 그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오버시어도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해 버린 영주에게 큰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급여도 방코에서 주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신경 쓸 일도 없었다.

다만 록펠러가 그를 다시 영주로 대우해 주라는 말에 그러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오시는군요.”

당나귀를 탄 록펠러가 등장하자 소란스럽던 영지민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번 일의 원흉은 확실히 영주였지만, 카터 방코와 관련된 록펠러 역시 나름 당사자였다.

그러나 영지민들이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내지 않는 것은, 그가 그 일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그 일의 유일한 해결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영주를 쏘아보는 시선과 달리 록펠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약간의 원망과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

그에게 조금만 밉보였다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Gold 차용증서가 영원히 휴짓조각이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단상 위에 오른 록펠러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영주와 눈을 마주치게 됐다.

록펠러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이자 영주는 속으로 그를 욕했으나, 이미 약속한 게 있어 어색하게라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저런 근본도 없는 놈하고 엮이게 됐는지…….’

스텔라가 저녁 만찬을 즐기고 간 다음 날.

영주는 뜻밖의 소식을 제 딸로부터 듣게 됐다.

시집을 가는 것으로 로스메디치 집안에서 자신의 빚을 해결해 주기로 했지만, 거기에 또 다른 조건이 있다고 했다.

그 조건 이야기를 들은 영주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듯이, 결국 완고했던 영주도 제 딸을 이기지 못해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진짜 내 딸만 아니었어도.’

그러면서 영주가 생각하기를.

아마 스텔라가 나서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록펠러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영주인 자신이 거의 반쪽짜리가 되는 것도 모자라 한낱 평민 가문의 눈치를 보고 사는 그런 영주가 되어버리는데, 그 누가 환영하겠는가?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 것은 어차피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양아들 정도를 생각해 두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그런 부분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단상 위.

록펠러와 마주 보는 자리에서 영주 역시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 더러운 면상을 확 찢어버리고 싶네만.”

이에 굴할 록펠러가 아니었다.

“그리 말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더욱 가깝게 지낼 사이인데 그렇게 험하게 말하시면 되겠습니까?”

“자네. 참 오래도 살겠군. 예로부터 남에게 미운털이 잔뜩 박히면 오지게 오래 산다는 말이 있어.”

“하하, 그건 칭찬입니까? 어차피 저는 남에게 존경받을 생각 따윈 전혀 없습니다.”

록펠러가 옅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저희 집 가훈이 그렇거든요. 존경 보단 두려움을 택하라. 조부님이 남기신 가훈이셨죠.”

록펠러가 앞을 힐끔 쳐다봤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영지민들이 숨죽이며 자신과 영주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엔 분명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빚쟁이 영주가 있는 자리에서 저리 조용할 수 없었다.

‘내 힘을 알고 있는 거지. 내 말에 따라 저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갈 테니까.’

“웃죠. 사람들이 저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나름 중요한 자리가 아닙니까?”

록펠러가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영주가 코웃음 치며 반응을 보였다.

“그렇겠지. 나름 의미가 있는 날이겠지. 내 빚이 청산됨과 동시에 영주인 내 힘이 반으로 쪼개지는 날이 될 테니까.”

그 말에 록펠러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작게 대꾸해주었다.

“반쪽짜리라…… 이미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시끄럽네. 질질 끌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끝내버려. 어차피 저들이야 내 말 따윈 듣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도 제가 영주님 권위는 계속 챙겨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쭉 이 영지를 훌륭히 이끌어 가시려면 영지민들로부터 두려움과 존경을 받는 그런 영주님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게. 듣기 역겨우니까.”

록펠러가 단상 앞에 모여 있는 영지민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 저희가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중대한 발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록펠러의 말에 모두가 숨 죽이며 조용해졌다.

그들이 록펠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구원.

그리고 록펠러 역시 그것을 들고 나왔다.

“오늘부터 저희 카터 방코에서는! 지금까지 책임질 이유가 전혀 없었던 Gold 차용증서를 다시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그 말이 이어지자 당황한 영지민들이 크게 술렁였다.

“저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Gold 차용증서를 책임지겠다고?”

“의무가 없잖아?”

“쉿! 조용히 해봐. 말이나 들어보자고!”

모여 있는 영지민들의 반응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록펠러는 준비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 배경에는 영주님과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주님께선 현재 자신의 이름으로 발행된 차용증서를 처리할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여, 그 빚을 저희 카터 방코에서 대신 책임져 주는 대신, 영지의 권리는 전부 저희 카터 방코가 갖는 것으로 잠정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 말에 또다시 영지민들이 술렁였다.

“아니, 영주가 영지 권리를 전부 팔았다는데?”

“그래서 카터 방코에서 다 책임져 준다고?”

“그런 거 같은데?”

말을 마친 록펠러가 영주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시면 하시죠. 여기서 저만 떠들 순 없잖습니까?”

자신이 한 말에 대한 확인을 요하는 자리.

표정을 구긴 영주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기 시작했다.

“큼! 나 체스터 드 몬테펠트로는 오늘 이 자리서 선언하겠다. 오늘 이후로 이 땅의 모든 권리를 로스메디치 집안에 양도하겠다. 대신. 내 딸 스텔라 드 몬데펠트로를 로스메디치 집안의 둘째…….”

하기 싫은 말이었으나,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살 길은 단 하나.

그리고 딸도 이미 각오한 일이라 영주는 눈물을 삼키며 다음 말을 잇고 말았다.

“앤드류 로스메디치와 혼인시키겠다. 혼인 이후, 이 약속은 정당한 효력을 갖는다.”

이어 록펠러가 말했다.

“이상의 내용으로 저희가 영주님이 진 모든 차용증서를 책임지기로 했고, 그 결과로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Gold 차용증서를 저희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물론 영주님 딸이 제 둘째 동생과 혼인을 하는 그 시점부터입니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려는 그때.

록펠러는 마지막 말까지 계속 이어주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더 이상 영주님에 대한 비난을 삼가 주시고, 또 앞으로 영지 세금은 저희가 걷기로 영주님과 잠정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권리 확보에 따른 의무이니 그동안 세금을 내지 않으셨던 영지민들은 다시 때에 맞춰 세금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영지 운영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내용이니, 부디 이의가 없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치매 모여든 영지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휴짓조각이 되었던 Gold 차용증서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리라.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러가면서 환호하는 영지민들을 바라보며 록펠러는 작게 웃었다.

‘대중이 우매하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까?’

자신이 가는 길은 민중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우매한 그들을 기만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자리.

지금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애당초 이 모든 일은 자신이 기획했으며, 또한 휴짓조각이나 다름없는 Gold 차용증서를 다시 받아들인다고 해서 카터 방코나 자신이 입는 피해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말이다.

‘Gold 차용증서야 다시 IOU 차용증서로 바꿔서 주면 돼. 그럼 당장 빠져나갈 금화는 생각보다 적지.’

영주를 구워삶아 영지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됐으니 여기서 나오는 세금이라면 예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거기다 이 땅엔 그게 있지.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맥이.’

또한 영지의 권리를 카터 방코가 아닌 로스메디치 집안으로 한 것은 영주와 나름 합의본 내용이었다.

‘이 땅의 권리자가 카터 방코가 아닌 우리 집안이 된 것은 나중에 있을 쓸데없는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지.’

카터 방코도 이제 끝물이었다.

다만 새로운 방코를 열지 않는 것은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

‘카터 아저씨도 일을 놓은 지 꽤 됐지.’

록펠러가 전면에 나서고, 또한 조수 느낌으로 제 동생을 들이자 카터가 딱히 할 일이 없게 됐다.

금화세공이야 록펠러나 조슈아가 할 수 있었고, 또한 교회의 일이 있었기에 카터도 두 형제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편히 쉬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여기 일을 알아도 별말 안 하실 거야. 일에서 손을 뗀 지 좀 되셨으니까.’

카터 골드스미스는 나름의 특권으로 꽤 높은 이자를 받아가며 자신의 금화를 로스메디치 형제에게 맡겨놓은 상태였다.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매달 높은 이자가 들어오는데 왜 일을 하겠는가?

‘그런 거지.’

그렇게 환호하는 영지민 앞에서.

록펠러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옆자리에 서 있던 영주를 찾아 말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무슨 기분!”

영주가 쏘아붙이자 록펠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빚쟁이에서 탈출하신 기분이요.”

“흥, 별걸 다 물어보는군.”

“알고는 계시겠죠? 저희가 아니었다면 영주님께선 영원히 빚쟁이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뭐 어쩌자고?”

“지금 이 자리서 한 약속은 그대로 이행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마 영주님께서도 따님이 시집가는 집안을 나쁘게 만들진 않으시겠죠. 자식이야 하나뿐이니, 영주님의 사랑.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네…….”

영주의 시선은 여전히 고까웠다.

“한스 장례식 때부터 느낀 거지만 항상 마음에 안 들었어. 어쩌다 그런 거지 집구석이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

“하지만 믿고 계시겠죠?”

“믿는다고? 뭘?”

“그런 집안이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영주가 옅게 코웃음 쳤다.

“흥, 그래서 무슨 재주로? 이런 촌구석에서 날 기만한 것 가지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될 텐데요. 저희가 계속 이대로 남는다면 영주님 따님은 평생 평민집안 사람과 살게 되는 겁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그래서 내가 여기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나? 내가 반쪽짜리 병신이 됐어도 별말을 안 하는 건 다 내 딸 덕분이야. 그게 아니었으면 죽어도 그런 일은 없었어.”

“어차피 담보로 잡힌 게 있어서 영주님이 똥고집을 부려 봤자 별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다만 저도 이 영지를 직접 운영하기 귀찮으니 서로에게 좋은 길을 간 것뿐입니다.”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옆에서 응원이나 해주십쇼. 나중에 저희 집안이 크게 되면, 저도 거느린 영지 중에서 어르신께 적당한 거 하나 정도는 떼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남이 차지하는 것보단 집안 식구가 차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럴 날이 올까?

영주의 태도는 여전했다.

“퍽이나 그렇겠군.”

록펠러는 환호하는 영지민 앞에서 박수를 치며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영지의 권리를 가져오는 일차적인 일은 끝났어.’

목표했던 영주는 되지 않았지만, 영지에 대한 권리를 전부 가져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한 영지 운영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주에게 맡기면 됐으니 자신이 영지 일에 신경 쓸 일이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재정적인 부분을 꽉 잡고 있기에 영주에게 강압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지구 역사에서 누가 그랬던가?’

정치는 그의 집에서 행해진다.

법도, 전쟁도, 평화도, 오직 그가 결정한다.

우리가 부르지 않을 뿐…….

‘그가 왕이다.’

록펠러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내가 바라는 이상이기도 하지.’

몬테펠트로 영지와 관련된 1차적인 일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금맥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대격변 이후 대륙 전역에 큰 지각변동이 생길 거야. 그때 드워프들이 놓치고 간 금맥이 터져 나오게 되지.’

그때가 되면 토템전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드워프들이 황금에 미쳐 이 영지로 몰려들게 된다.

그때 발발하는 전쟁이 바로 금맥전쟁.

‘드워프와 제국 간의 전면전이지.’

앞서 있었던 토템전쟁에선 드워프가 얻을 게 별로 없었지만, 금맥전쟁은 달랐다.

대륙에서 가장 큰 금맥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세력판도가 크게 바뀔 것은 자명한 일.

‘드워프들이 이 땅의 권리를 내세우는 순간 골치가 아파질 거야. 아마 양보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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