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70화 (70/181)

§70화 18. 그대여, 빚에 먹히리 #3(3)

“보상이야 이미 충분히 받지 않았나요?”

그녀가 보기엔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였다.

현재 영주가 지고 있는 빚은 막대한 이자로 인해 원금이 무색해질 정도였으니까.

“이런 식이라면 저희 아버지는 이자도 못 갚고 그대로 파산하실 거예요. 땅을 담보로 한 일 때문에 세금도 못 걷게 했잖아요? 그렇다는 말은 제 아버지 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으라는 소리가 아닌가요?”

애당초 이번 일은 영주의 잘못으로 인해 비롯된바.

만약 갚을 능력이 안 됐다면 처음부터 조심했어야지.

“아가씨. 영주님께서 남발한 차용증서부터 먼저 생각해 주시죠. 그 당시 영주님 생각을 제가 알 순 없지만, 애당초 차용증서는 그걸 갚기 위해 발행하는 겁니다. 그럼 영주님께서도 나름의 계획이 있으셨겠죠. 그게 아니고서야 그런 식으로 차용증서만 생각 없이 찍어낼 순 없는 겁니다.”

스텔라가 반박했다.

“전부 영지를 위한 일이 아니었나요?”

“영지를 위한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인정해 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 자금이 영지 방비를 위해 쓰인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일부는 영주님 본인을 위해, 그리고 영지 방비에 쓰인 돈도 영주님께서 너무 과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쓰실 필요가 없었는데, 너무 뒷일을 생각 안 하시고 빌려온 돈을 흥청망청 쓰신 건 영주님 잘못이 분명 맞습니다.”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여기가 안전해졌다면, 당신들도 나름 호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영지 방비가 마냥 영주님만의 일은 아니잖아요? 세금이야 낸다지만 당신들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 나름의 의무가 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도 록펠러가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의무라…… 그건 세금으로 답해드리는 겁니다. 저희가 낸 세금에 대해서 너무 우습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희의 의무는 그걸로 끝, 영지 방비는 오로지 영주님 몫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희가 세금을 낼 필요가 없고, 또 영주님께 충성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영주는 영지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영주는 그 돈으로 영지민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그런 논리…… 그래요.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한 번쯤 실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실수라……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 아닐까요? 실수라고 보기엔 고의적인 의도가 분명해 보이는데.”

“잘못이라도요.”

록펠러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에선 칼 한 번 잘못 써도 죽게 됩니다. 그만큼 잘못이란 건 생각보다 무서운 겁니다. 전장터에선 잘못 하나에 사람 목숨이 날아가는데, 돈 하나 잘못 쓴 일로 한 사람이 파산하게 된다?”

록펠러는 옅게 웃어 보였다.

“그 정도면 나름 양호한 편 아닙니까?”

그녀가 반박할 거리를 찾고 있자 록펠러는 다음 말도 이어주었다.

“그리고 영주님 빚 문제를 여기서 따져 봤자 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영지민 전체가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가지고 있는 채권자입니다. 저 말고 영지민 모두가 영주님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다는 소리죠. 말인즉 아가씨께서 절 잘 설득해 봤자 어차피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란 소립니다.”

맞는 말이었으니 스텔라도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분한 마음에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앤드류가 입이 간질거려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록펠러를 생각하여 말을 아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해진 만찬 자리에서 스텔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요? 그래도 가장 큰 채권자는 카터 방코잖아요?”

그 물음에 록펠러는 고심하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방법이야 물론 있지. 문제는 우리가 얻어야 할 게 있다는 거야. 그걸 내줄지 안 내줄지는 이 대화에 달렸고.’

“방법이라. 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우선 영주님께서 무분별하게 남발하셨던 차용증서로 인해 지금 이 순간 영지민들은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Gold 차용증서를 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죠. 왜냐? 금화로 교환이 안 되는 차용증서는 그저 휴짓조각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저도 알고 있어요.”

“비단 그 일의 피해자가 영주님 혼자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따지고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기 영주님을 믿고 금화를 빌려준 저희와 그것을 토대로 발행된 Gold 차용증서를 마치 돈처럼 썼던 수많은 영지민들입니다.”

이에 대해선 그녀도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자 록펠러가 이를 알게 모르게 흡족해했다.

“영주님께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우를 범하셨습니다.”

“…….”

“잘못은 이미 저지르셨고, 자구책 또한 없으며 해결의 의지 역시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일을 수습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피해자인 저희들뿐입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선 이렇게 불쑥 찾아와 저희가 마치 가해자인 양 그렇게 구박하시면 저희야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말을 들어보니…… 여기까지 온 제 생각이 너무 짧았네요. 아버지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당신들인데, 제가 너무 아버지만 생각해서 말했던 거 같아요. 불쾌하셨다면 미안해요.”

“미안하다니요. 아가씨께서 잘못하신 건 없습니다. 아가씨야 무슨 잘못입니까? 잘못은 영주님께서 하셨는걸요.”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고,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다만 이번 일의 해결책에 대해 알고 있는 록펠러는 슬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기 위해 다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 일을 해결할 방도라…… 아, 딱 하나 있군요.”

스텔라가 록펠러의 말에 반응하며 숙였던 고개를 살포시 들어 올렸다.

“방도가 있는 건가요? 이번 일을 해결할 방도가 말이에요.”

“네, 딱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록펠러가 말하는 해결책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게 뭔지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궁금해서요.”

“원하신다면 이 자리서 말해드릴 수 있겠지만, 그전에 아가씨께서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저희가 그 방도를 알고 있다고 해도 나름의 이유 없이는 절대 진행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가 희생하는 만큼, 영주님 쪽에서도 그만한 희생을 하셔야지 이뤄질 수 있는 일이거든요. 대충 내용이야 이럴 건데, 어떠십니까?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네, 들어볼게요.”

“들어보신다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영주님은 이제까지 남발하신 모든 차용증서를 처리할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갚을 의지도 없고, 갚을 방법도 없죠. 이건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네, 알고 있어요.”

방법이야 다 막혀 있었다.

록펠러가 영주의 팔다리를 진즉에 다 잘라놨으니까.

악덕 채무자란 이름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희 카터 방코에서는 그 빚을 충분히 떠안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말이 나오자 그녀가 반색하기 시작했다.

“그럼 아버지 빚을 카터 방코에서 전부 갚을 수 있다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희가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만한 이유입니다.”

그 말에 스텔라가 풀이 죽었다.

“이유…… 라고요?”

“네, 저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호의만으로 영주님이 진 빚을 전부 떠안는다는 건 솔직히 좀 웃긴 일 아닙니까? 저흰 오히려 영주님께 빚을 받아야 할 채권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이유도 없이 전부 떠안겠다니? 이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해해요. 이유 없이 그 빚을 전부 떠안긴 힘드시겠죠.”

하여 록펠러가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면 저희가 영주님 빚을 그냥 떠안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아가씨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스텔라는 미리 각오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답변하기 시작했다.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겠죠. 아니면…….”

“아니면?”

“제가 이 집안 식구가 되면 어떨까요?”

“식구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나오자 록펠러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동시에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조슈아와 루시아가 저마다 반응을 내놓기 시작했다.

“스텔라 아가씨가 여기로 시집을 오시겠다고요?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죠?”

“어머! 정말요?”

앤드류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스텔라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앤드류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스텔라가 그의 한쪽 손을 강하게 잡으며 록펠러를 찾았다.

“제가 앤드류와 결혼할게요. 대신 제 아버지 빚을 카터 방코에서 책임져주세요.”

“야, 너…….”

“앤드류! 나랑 결혼할 거지?”

“아, 그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앤드류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이를 지켜보던 록펠러가 피식 웃고 말았다.

‘영주 딸이 저렇게 당돌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둘의 결혼이야 어차피 록펠러가 원하던 바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둘이 결혼하면 나야 좋지.’

록펠러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흘리니 나머지 두 동생도 알게 모르게 반기는 눈치였다.

그만큼 영주 딸에 대한 호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저희가 영주님 빚을 떠안을 나름의 이유가 되겠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둘이 결혼하는 것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록펠러는 추가적으로 무언가를 더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실 둘의 결혼 역시 이것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었다.

“여기 땅을, 아니, 영주님이 가진 모든 땅의 권리를 전부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땅을 전부 넘겨달라는 말에 스텔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건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저희 집안과 결혼까지 하는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적어도 아가씨 입장에선 좋은 게 될 겁니다. 그 땅이 애먼 데로 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제 아버지는요?”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가진 땅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면 저희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요?”

땅, 영지는 영주가 가진 전부였다.

그걸 전부 내놓으라니!

그녀 입장에선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영주님인데, 땅도 없이 이 땅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녀의 반발에 록펠러도 고개를 주억이기 시작했다.

나름 이해한다는 제스쳐였다.

“물론 아가씨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땅이 없는 영주는, 사실 영주라 보기에도 애매하죠.”

“그런데 무슨 땅이에요. 그것도 일부도 아니고 전부를 달라니…….”

“하지만 말입니다. 이건 저희도 큰 위험을 안고 하는 도박입니다. 현재 영주님이 가진 모든 빚을 저희가 청산해 드리는 대신에 그만한 땅의 권리를 받겠다는 겁니다. 제 생각에선 지금 영주님 빚이면 저희도 그 정도 요구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앤드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요? 그것만으론 부족한 건가요?”

“그것도 이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지, 아가씨가 이 집안에 시집을 오는 거로 끝낼 순 없는 겁니다. 저희도 나름 얻는 게 있어야 아가씨를 저희 식구로 받아들일 거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자신의 결혼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러다 그녀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 땅이면 이미 담보 형식으로 다 묶여 있을 텐데, 굳이 그 땅을 저희에게 다시 요구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카터 방코에선 영주가 가진 땅을 담보 형식으로 전부 묶어두고 있었다.

문제는 제국 법이 있어 담보로 잡은 땅을 채권자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제가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니 현재 제국 법에선 폐하가 하사하신 땅을 폐하의 허락 없이 남에게 양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인즉, 저희들끼리 말이 다 됐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폐하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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