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18. 그대여, 빚에 먹히리 #3(2)
넷째 레오가 거의 업고 키우다시피 했던 이 집안의 막둥이가 벌써 숙녀티를 내고 있다는 게 앤드류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루시아도 진짜 많이 컸네. 지금 나이면 내가 떠날 때쯤 레오랑 비슷한 나이인가?”
“레오 오라버니는 개인적으로 제가 여기 있는 오라버니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오라버니랍니다.”
루시아가 말을 마치자 은연중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두 남자가 갑작스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시아가 급히 말을 덧붙여주었다.
“그래봤자 극히 미묘한 차이니, 여기 계신 두 오라버니께선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조슈아가 볼멘소리를 냈다.
“야, 레오가 간 뒤론 거의 다 내가 키웠잖아.”
“그땐 이미 다 커버렸는걸요?”
록펠러도 나름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루시아, 나도 딱히 부족하게 해주진 않은 것 같은데?”
“록펠러 오라버니께서는 무조건 돈이시잖아요. 제게 옷이나 인형을 던져주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나야 일 때문에 바쁘니까.”
“핑계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하도 놀라워 쉽게 입이 다물어지지 않던 앤드류가 이 자리에 없는 넷째를 찾아 물어보았다.
“그보다 레오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 물음에 답한 건 루시아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조슈아였다.
“레오야 잘 지내고 있지. 이번에 리옹 쪽으로 소속 교구를 옮겼어.”
“리옹으로? 원래 여기 있던 거 아니었어?”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크게 되려면 나름 큰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어?”
조슈아가 턱짓으로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록펠러를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이건 록펠러 형님의 뜻이기도 해.”
앤드류는 자연스레 록펠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록펠러 형님께서 레오를 리옹으로 보내신 겁니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하던 록펠러가 그런 앤드류의 물음에 차분히 답해주었다.
“리옹에 계신 주교 각하와는 이미 각별한 사이다. 그쪽 교구 재산을 우리 카터 방코에서 일부 관리하고 있거든? 그래서 나도 그쪽 주교 각하께 부탁 좀 드렸지. 레오가 여기 있는 것보단 리옹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그래서 레오가 리옹으로 간 겁니까?”
“조슈아가 했던 말처럼 사제든 뭐든, 남자가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노는 게 맞는 거니까. 그리고 레오도 원하는 일이었어. 레오도 나름 큰 꿈을 가지고 있었거든.”
“큰 꿈이요? 그게 뭐죠?”
록펠러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아…… 레오도 생각보다 욕심이 많았나 보네요? 전 레오는 그렇게 안 봤는데.”
여기에 대해 반응을 보인 건 같이 자리하던 조슈아였다.
“아니야. 레오는 우리 같은 욕심 없어.”
“레오가 욕심이 없다고? 그럼 왜 그런 꿈을 가진 거야? 그건 너무 나갔잖아.”
짧은 침묵 뒤에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다 우리 때문이지.”
조슈아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그제야 앤드류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의 꿈은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레오가 착하긴 했지.’
“그보다 오랜만에 이 자리에 있게 돼서 너무 기쁘네요. 여길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감상에 젖은 앤드류가 다음 말을 아끼자 지켜보던 루시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도 앤드류 오라버니가 이 자리에 있어서 너무 기뻐요. 앤드류 오라버니, 이왕 내려오신 거 편히 쉬다 가세요. 저도 앤드류 오라버니께 궁금한 게 참 많거든요.”
“나한테?”
“네, 사관학교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리고 무엇보다 황도 생활이 어떤지 듣고 싶어요.”
“너도 황도 생활에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니요. 이건 제가 궁금해서 듣고 싶은 거예요. 나중에 제가 어디로 출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거기가 황도일 수도 있고. 그래서 여기저기 얘기를 미리 들으려고요.”
그러자 조슈아가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야! 아직 새파랗게 어린 애가 무슨 벌써부터 출가 얘기야. 설사 그 나이가 돼도 이 오라버니가 아무한테나 안 보내는 건 알고 있지?”
“어머, 조슈아 오라버니. 그건 전적으로 제가 결정할 일이랍니다. 저도 제 배우자를 고를 권리가 있거든요.”
만찬 전, 가볍게 안부 이야기가 끝나자 록펠러는 차려진 만찬을 즐기기 위해 양식기를 들었다.
“얘기는 그쯤하고. 자, 들자. 음식 식겠다.”
그때.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저택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종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막둥이 루시아였다.
“저기 오라버니들. 밖에 누가 온 모양인데요?”
조슈아가 표정을 구겼다.
“이 시간에?”
행복한 만찬 시간에 무슨 훼방이란 말인가.
표정을 잔뜩 찌푸린 조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갑작스레 묘한 느낌이 든 록펠러가 그런 조슈아를 손으로 제지시켰다.
“조슈아, 내가 나가볼게.”
“왜요? 그냥 제가 나갈게요.”
“아니야. 그냥 내가 나갈게. 시어들일 수도 있고.”
조슈아를 말린 록펠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입구로 향하자 이를 지켜보던 루시아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누굴까요?”
여기 사정이야 앤드류가 알 수 없으니, 추측을 하는 건 같이 자리하던 조슈아였다.
“설마…… 시어들인가?”
시어들이야 이따금씩 시간을 막론하고 록펠러에게 찾아오곤 했었다.
영지 내의 중요한 일이거나 아니면 급한 일일 때 찾아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까.
그러자 그 말에 의문을 표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앤드류였다.
“시어들이라고?”
“응, 찾아온 사람이 여기 시어들일 수도 있어.”
“아니, 시어들이 여길 왜 와?”
“아 그게, 여기 영주가 제 구실을 못 하게 됐거든.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시어들이 록펠러 형님을 찾아오더라고.”
“그게 가능한 얘기야?”
“당연하지. 지금 시어들 급여를 누가 주고 있는데. 여기 영주가 빚쟁이잖아. 그래서 우리 방코가 대신 시어들 급여를 챙겨주고 있어. 어찌 됐건 영지가 혼란스러워지면 우리야 장사가 안되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 앤드류는 영주 사정이 생각보다 더 좋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사정이 안 좋으면 시어들 급여를 방코에서 챙겨주겠는가?
‘진짜 망하긴 했나 보네. 어쩐지 돌아오는 내내 표정이 너무 안 좋더라.’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녀에 대한 걱정도 생겨났다.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부디 너무 안 좋은 쪽으로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앤드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록펠러는 자신의 저택에 찾아온 뜻밖의 손님을 마주하고 있었다.
역시나 뭔가를 느꼈던 자신의 촉이 맞았던 것이다.
‘어쩐지 왠지 이럴 거 같았어.’
“아니…… 아가씨께서 이런 시간에 어쩐 일로?”
로브 후드를 깊게 쓰고 홀로 찾아온 그녀는 영주의 딸인 스텔라였다.
“방코야 문을 닫았으니까요. 아버지 빚 문제로 그쪽과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이 되실까요?”
그녀의 방문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바.
록펠러는 찾아오는 그녀를 막지 않기로 했다.
“물론입니다. 아, 이왕 이렇게 오신 김에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죠. 오늘 앤드류도 왔겠다 저희 가족은 지금 막 저녁 만찬을 즐기려는 찰나였습니다.”
이어 록펠러는 이 말도 빼먹지 않았다.
“아가씨께선 운이 참 좋으시군요.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았다면 같이 드시죠. 저와 할 이야기도 그 자리서 같이하시면 됩니다.”
갑작스러운 저녁 초대에 스텔라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약간의 갈등을 한 그녀가 마지못해 승낙해 주었다.
어찌 됐든 그와 얘기는 필요했으니까.
“제가 그 자리에 끼면 가족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불편할 거 없습니다. 아가씨와의 만찬인데 오히려 저희가 더 큰 영광이죠.”
“그럼…… 가족분들께 큰 실례가 되겠지만, 할 얘기도 있고 하니 그 자리에 참석해 보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평민이 사는 저택치고는 너무나도 좋은 곳이었다.
하긴 왜 사람들이 돈에 환장을 하겠는가?
이처럼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에 다들 환장하는 게 아니겠는가?
‘생각보다 넓다. 가구들도 평범하지 않고 전부 고급스러워.’
록펠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까지 오게 된 스텔라는 만찬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겉만 평민이지 사실상 작은 귀족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방코에서 돈을 진짜 많이 번 모양이야. 앤드류 가족이 이렇게까지 살 줄은 몰랐어.’
차려진 음식들이 너무나도 호화스러웠다.
저기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여기 사람들이 다 마련하지는 않았을 터.
모르긴 해도 솜씨 좋은 사람을 불러다 썼을 게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온 거야?’
그녀의 등장에 가장 놀란 건 앤드류였다.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앤드류가 찾아온 스텔라를 향해 말했다.
“네가 여기까진 왜 온 거야?”
“그게…… 갑자기 초대를 받았거든.”
록펠러가 그녀에게 앤드류 옆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미리 준비된 자리가 아니다 보니 아가씨에 대한 대접이 미흡한 점,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그녀가 오자 조슈아와 루시아도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조슈아 로스메디치, 스텔라 아가씨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스텔라 아가씨.”
“조슈아도 많이 컸구나. 몰라보겠어.”
“네, 감사합니다.”
조슈아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옆에 있던 루시아도 앙증맞게 인사를 올렸다.
“스텔라 아가씨죠? 조슈아 오라버니에게 가끔씩 이야기를 들었어요. 착하고 예쁘시다고요. 전 루시아 로스메디치랍니다. 편히 루시아라 불러주세요.”
“네가 루시아였구나. 앤드류에게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앤드류 오라버니께서 제 얘길 빼놓지 않고 해주셨다니 너무 기쁘네요.”
잠시 후 그들은 꽤나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 빚 문제로 맘 편히 식사를 할 수 없었던 스텔라는 만찬 도중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전에도 한번 말했던 거 같은데.”
록펠러야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뿐.
나름 집안의 대표답게 최대한으로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록펠러가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네, 말씀하시죠.”
“제 아버지가 진 빚. 아니, 여기 영주님이 진 빚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건가요?”
나름 배를 채웠다고 생각한 록펠러가 냅킨으로 입을 가볍게 닦고는 그녀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이야기야 저번과 같습니다. 저희 카터 방코에선 영주님께 금화를 빌려드렸고, 영주님께선 마땅히 그 금화를 갚으셔야 합니다.”
“그건 아는데, 이자가 너무 부담되잖아요. 지금 그 이자 때문에 나머지 땅들도 전부 담보로 잡혔다고 하는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너무한 거 아니냐?
방코 업자라면 매일같이 듣는 소리였다.
록펠러는 전과 다른 분위기 속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자 문제야 영주님께 금화를 빌려드렸던 저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저희도 나름 리스크를 안고 그 많은 금화를 빌려드렸던 것인데, 거기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